남을 해하게 안 했는데 어떻게 내게 해함이 돌아오겠는가

▲ 그림 최주현

제주도의 여러분, 참 오랜만에 이렇게 한자리 하게 됐습니다. 몇 달 됐지요?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왜 기복으로 믿게 됐는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사람으로 나기도 어렵고 부처님 법, 정법 만나기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부처되기가 어렵다는 얘깁니다. 부처가 된다는 뜻은 자유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무의 세계 유의 세계, 보이지 않는 데 보이는 데를 한마음에 쥐고 만 가지 생산을 해낼 수 있는 자유인 말입니다. 그 자유인이 되기 어렵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그 자유인이 되려면 정법을 만나야 되는데 정법 만나기가 또 어렵다는 얘깁니다. 사람은 많지만 사람 만나기 어렵고, 절은 많지만 그 절에 사람이 있어야 부처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허물은 썼지만 마음 씀씀이를 잘 쓰면 사람이고 잘 쓰지 못하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쳐서라기보다도 자기가 한 생각을 잘하고 행동 하나를 잘하고 말 한마디를 잘했을 때, 삼합(三合)이 맞았을 때에 보지 않는 것 같아도 어딘가 봐 주는 데가 있습니다. 그건 왜냐. 여러분의 마음이 알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자기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것만치 다 안다 이겁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속지 않고 자기를 속이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써 말을 하고 행을 했을 때에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참나는 알고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잘 알기 때문에 우주간 법계에서 안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우주 천체, 일체 만물만생이 공생하면서 공용하면서 공체로서 공식하고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알죠.

내 마음을 잘 쓰면 체가 없는 마음이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가면서 모두 한마음이 되게 하니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해 줄 수 있지만, 내 마음을 잘못 쓰면 잘못 쓴 대로 배척을 당해서 보이지 않는 데서 한마음이 돼 주질 않아요. 사람은 전부 마음에 의해서 육신이 움죽거리게 돼 있고 마음에 의해서 좇아다니는 거니까요. 그 마음들이 한마음이 됨으로써 육신은 거기에 호응을 해 주는데 마음이 그렇지 않으니까 육체도 호응을 안 해 주죠. 그러니 무의 세계에서,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오지 않으면, 봐 주지 않으면 보이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런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 따로 있고 지금 현상세계가 따로 있고 이런 게 아닙니다. 순간순간 돌아갑니다. 한 찰나에 돌아갑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지만…, ‘마음은 하나지만’ 하는 건 축과 같다 이겁니다. 저 프로펠러가 돌아가든 연자 방아가 돌아가든 뭐가 돌아가든 축은 움죽거리지 않습니다. 영원한 겁니다. 여러분 안의 축을 믿으세요. 축을 믿는다면 그 축에 의해서, 그걸 심봉이라고도 합니다. 프로펠러가 돌아갑니다. 이 세상 법이 다 돌아갑니다. 그러면 우주 전체가 돌아가듯이 이 몸뚱이도 내 축에 의해서, 그 힘에 의해서 마음을 만 가지로 낼 수 있죠. 만 가지로 낼 수 있는 그 마음을, 즉 말하자면 묘법이라고 할 수 있죠. 망상이라고는 생각 마세요. ‘나는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렇게 나오니 이거 언제 공부하느냐.’ 하고 생각하지 마세요.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에 이런 게 있죠. ‘고ㆍ집ㆍ멸ㆍ도’ 이랬습니다. 고를 고라고 생각을 안 하니 집착이 없어요. 집착이 없는데 멸이 어디 있겠습니까. 멸이라는 언어가 붙습니까? 그러니 도는 무(無)죠. 왜? 어느 거 하나 돌아가지 않는 게 없고, 어느 거 하나 생명 없는 게 없고, 어느 거 하나 내버릴 게 없기 때문이지요. 프로펠러가 막 돌아가는데 어느 것이 프로펠러고 어느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없듯이 세상 이치가 그렇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만 어머니 아버지가 있는 게 아니라, 음과 양이 있는 게 아니라, 영혼이 있는 게 아니라 벌레도 엄마 아빠가 있고 자식을 낳고 그렇습니다. 이 세상만사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어서, 풀포기 하나도 둘이 아니므로 버릴 게 없습니다. 모두가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이 영역을 우리가 마음대로 잡아 쓸 수가 있고 꺼내서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길러야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첫째는 각자 내 영원한 내공을 타파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자신의 길잡이가 생겨서 샘물의 맛을 볼 수 있으며 ‘아, 샘물 맛이 참 좋더라.’ 하고 따라갈 수 있는 겁니다. 내 내공의 타파가 있어야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삼심(三心)의, 삼세심(三世心)의 내공을 타파할 수 있죠. 그거를 타파함으로써 내가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을 다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 그때에 사공법을 타파할 수 있죠, 이 세상 법을. 그렇지 않을까요?

알지도 못하는 데다가, 조그마한 그릇에다가 에너지만 많이 넣어 주면 담기지도 않고 넘쳐 흘러서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른다 할지라도 이치적으로만 들어 놓아도 언젠가 문득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아, 그 스님이 그렇게 말을 했지.’ 하고 말입니다. 사공법을 타파함으로써, 즉 말하자면 오신통을 자유스럽게 굴릴 수가 있는 거죠. 오관을 통해서 들이고 내는 오신통을 뭐라고 그러냐 하면, 그전에도 얘기했죠? 지금은 망원경이라고 하던가? 자연법칙에 의해서, 망원경을, 즉 천안통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 얘기를 언젠가 했습니다. 또 숙명통은 컴퓨터라고 해도 됩니다. 또 타심통은 탐지기라고 해도 됩니다. 또 천이통을, 예를 들어서 천체무전통신기라고 해도 됩니다. 표현을 말입니다. 이 다섯 가지 안에 들어 있으면 다섯 가지를 굴릴 수가 없으니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야 원통력을 벗어난다는 얘깁니다. 즉 말하자면 항아리 속에 들어 있으면 항아리를 굴릴 수가 없고 항아리를 벗어난다면 항아리를 굴릴 수가 있죠. 안 그럴까요?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체가 없으니까 지구 바깥을 벗어나든지 우주 바깥을 벗어나든지 그 안에 있든지 자유롭습니다. 내가 났기 때문에, 내가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곧 내 마음의 근본으로부터 이 세상 천지 만물 이 자체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근본이나 태양의 근본이나 인간 삼세의 근본이나 인간의 모든 삶의 근본이 바로 내 한마음 근본인 거죠. 체도 없고 보려야 볼 수도 없고 내놓을 수도 쥘 수도 없는, 빛깔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영묘하고 영원한 그 불심 자체, 바로 표현해서 주인공 그 자체의 근본입니다, 축.
그러니 그 근본에 모든 게 들어 있고 그 근본에서 모든 게 나갑니다. 여러분 마음은 하나지만 마음내는 거는 천차만별로 낼 수 있죠. 24시간을 통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해요. 애정, 미움, 증오, 사랑, 온통 그냥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니 머리카락 수효보다 더하죠. 머리카락을 헤아릴 수가 없듯이, 모래알을 셀 수가 없듯이 세상은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했어도 무효입니다. 생각을 했어도 없고 또 생각을 했어도 없고 그렇건만, 여러분은 생각을 해 놓고 그것에 착을 두고 잡고 있어요. 그러니 끄달리죠. 생각 하나 잘하면 그게 바로 생산을 해내는 건데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르칠 때에는 주인공을 믿고 거기에다가 모든 걸 놓으라고 합니다. 잘되는 거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놓고 안되는 거는 ‘주인공밖엔 해결 못한다.’ 하고 믿고 놓고 이런다면 양면이 다 거름이 되는 거죠. 그냥 넣기만 하면 없어지고 넣기만 하면 없어지고 그러니, 수가 없이 넣어도 넣은 사이가 없고 꺼내도 꺼낸 사이가 없이 여여하게 이 세상을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 내 영원한, 내 몸 태어나기 이전, 그 콩씨를 알게 된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콩싹이라면, 작년에 콩씨를 심어서 콩싹이 되었다면 화한 겁니다, 그게. 자연적으로 화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콩이 그대로 있는 줄 알고 싹은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콩씨, 작년 콩씨를 바깥에서 찾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이 얼마나 기복에 얽매이고 있습니까, 네? 바깥에서 찾는 게 바로 기복이에요. 여러분이, 사람이 귀신 노릇을 안 하는데 어떻게 귀신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남을 해하게 안 했는데 어떻게 여러분 앞에 해함이 돌아오겠습니까? 그건 자연의 법칙이고 질서입니다. 틀림없는 질서.

어떤 때는 여러분이 질문을 해 주시길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어도 안 하세요. 서로 모르든지 알든지 높든지 낮든지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조그마한 거 하나라도 쳐다보기만 하고 못 집어 먹는다면 그건 어리석음이요, 내가 그것을 마음대로 갖다 놓지 못하고, 또 가고 오기만 하고 그것을 집어 먹지 못한다면 그것도 걱정이고 무효예요. 그러니 내가 갔으면 봐야 하고 봤으면 먹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동일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바로 자성신
이 세상을 두루 할 수 있는 자성신
묘한 묘법을 가진 능력있는 사람들입니다.



부처님 법이 따로 있고 인간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난 그전에 그렇게 생각을 했었죠. ‘부처님을 처음에 가서 보니까 막대기 같고 나중에 보니까 진짜 부처 같더라.’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내가 없으면 부처님이 어디 있겠느냐는 거를 생각했고, 나중에는 부처가 나하고 둘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그 다음에는 ‘아하! 부처가 둘이 아닌 까닭에 이 세상은 부처 아닌 게 없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 도리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하루 동안 살면서 참다운 인간의 맛을 알고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 흐뭇함, 싱긋이 웃을 수 있는 그 흐뭇함을 한번 느껴 보셨습니까? 아마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든 잘됐든, 몸이 비참하게 됐든 안 됐든 그거를 다 놔 버리세요. 이 육신을 받아 가지고 있는 거는 바람결 같아요. 뜬구름이 금방 한데 모였다 헤어지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그런데 내 안에서 자동기가 그대로 돌아가고 있어서, 그 마음에 따라서 육체가 움죽거리고 있으니 마음에 능력이 생기면 못 쓰던 육신도 발육을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동 발전소가 있어서 꺼내도 줄지 않고 넣어도 부풀어지지 않는, 즉 영원한 보배, 생산처가 거기 그대로 있는 거죠. 생산처.

그런데 여러분이 한 가지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거죠. 천차만별의 용도대로, 내 앞에 닥치는 대로 서로 주고 서로 먹고 쫓고 쫓기고 이러면서 사는데 그 많은 것을 어떻게 이루종차 몸뚱이로 다니면서 다 하리까. 마음 한 번 잘 쓴다면, 이 자동기 하나만 잘 돌리면, 믿고 거기 놔서 돌리면 스스로 자동적으로 내 앞에 금으로 생산이 돼 나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넝마니 무쇠니 은이니 하는 가지각색의 이름 있는 모든 것이 그 자동기만 잘 돌리면 거기에 들어가서 용도에 따라 자동적으로 내 앞에 생산이 됩니다.

그렇게 집어 먹을 줄 안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믿고 나갈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너무나 좋아하는 분들도 많거든요. 난 아무 걱정 없다고 그러거든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그건 왜냐? 자기가 샘을 파서 자유스럽게 샘물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몸을 움죽거려서 먹는 게 아닙니다. 이 우주의 에너지는 말입니다. 내 한생각에 스스로 오고 스스로 빠지고 하는 그런 자동기와 같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컴퓨터를 만들어 놓으셨지마는 내용을 입력해야만이 컴퓨터에서 나오죠? 그러니 인간이 없다면 컴퓨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전에 계신 부처님을 생각하고 “난 아무개 부처님을 믿어.” 이럽니다. 그런데 ‘부처님 법’ 하면…,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왜 관세음보살이라고 해 놨고, 왜 지장보살이라고 해 놨고, 왜 그렇게 일체제불의 이름을 전부 따로따로 해 놨나를 말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하다면 관세음보살을 찾을 겁니다. 이치가 그러하니까요. 또 좋은 데로 가려면 아마 지장보살을 찾을 겁니다. 명을 길게 해 달라고 하려면 칠성부처 찾겠죠? 또 일이 잘못돼서 재판이나 걸리고 그러면 산신을 찾거나 신장을 찾을 겁니다. 마음이 고렇게 요변덕스럽게 요것 찾고 조것 찾고 그렇게 되는데, 세상일도 그래요. 경찰서에 갈 일이면 경찰서에 가야 하고 또 법원에 갈 일이면 법원에 가야죠. 그거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만법의 근본, 즉 말하자면 그 근원은 바로 내 마음에 있다는 겁니다. 그럼 거기서 그걸 다 해내느냐? 그렇습니다. 마음! 지장은 보배와 같다는 얘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면 마음이라는 이 두 글자가 얼마나 묘한지 모릅니다. 임신을 했는데 애가 잘못됐느니 어떻게 됐느니, 또는 어린애가 갓 태어났는데 사람 노릇을 못할 정도로 어디가 아파서 애를 쓴다든가, 가정에 별의별 일이 다 생기죠. 또는 무슨 일이 생겨서 경찰서에 간다든가 이런다면 자동적으로, 자기한테 일이 생겼을 때는 자기가 더 잘 압니다. 남들보다도 자기가 더 잘 알지요. 어떤 변고가 생겼다는 건 자기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자기 주인공이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주인공 그 자체에….

예전부터 장자 설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내 주인공 자체 근본은 아버지죠. 아버지는 아주 더 바랄 게 없는, 칠보를 가득히 가지고 있는 부자인데 자식은 아비를 찾지 않고 고아로서 항상 바깥으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가난하고 배가 고프고 추운 겁니다. 그러니 아비를 찾을 줄 알아야 된다 하는 걸 말했을 겁니다. 아비는 자식을 아는데 자식은 아비를 모르는 겁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의 그 영원한 자기의 근본, 즉 말하자면 주인공은 아비가 되고 지금 육체를 움죽거리고 다니는 운전수는 자식이 되는 거죠. 그게 마음입니다. 축은 아비요, 바로 그 열 가지 백 가지로, 천차만별로 생각나는 거는 바로 아들입니다.

그러니 그 아들이 하자는 대로 육체는 따라다니니까 마음에 따라서 배가 고프게도 만들고 구덩이에 빠지게도 하고 별의별 짓이 다 나죠. 그런데 그 심봉을, 여기는 시골이니까 잘 아시겠죠. 맷돌을 돌릴 때 그 심봉, 축을 끼우지 않고 돌리면 잘 갈아집니까, 안 갈아집니까? 안 갈아지죠? 그것을 끼우고 돌리면 잘 갈아지죠? 우리가 일체를 소화시키는 데도 그와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고 생활을 해 나가는 거하고 안 믿고 그냥 해 나가는 거하고는 천차만별로 다른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바로 자성신, 이 세상을 두루 할 수 있는 자성신, 묘한 묘법을 가진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을 높게 생각하지도 말고 낮게 생각하지도 마세요. 낮다고 깔보지도 말고 높다고 높게 보지도 말고 평등하게 자기로만 보세요, 자기. 몸도 자기와 같고 아픔도 자기와 같고, 모든 걸 자기같이만 본다면 외착이 나지 않습니다.
오늘 설법은 횡설수설했습니다. 여기 가서 조금 떼다 붙이고 저기 가서 조금 떼다 붙이고요. 왜냐하면 한 구절을 얘기하려면 여러 군데서 거기에 필요한 부속이 가서 붙어야 되니까 오늘 어떻게 하다 보니…. 저는 무슨 책에 있는 거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예전에 어느 선지식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 세상 돌아가는 걸 잘 파악한다면 너희는 성불할 수 있느니라. 이 세상 돌아가는 거를 모른다면 네가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네가 돌아가는 걸 모르면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른다. 그러니 어찌 네가 자유스럽게 걸리지 않고 여여하게 살 수 있겠느냐.” 하고요.

그러니 영계에서는 여러분이 주장자를 쥐고 있지 못해서 주인이 없으면 빈집이란 말입니다. 왜 미치는 일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집을 비웠으니까 영계들이 들어온단 말입니다. 주인이 없는 빈집이니까 들어왔다 이겁니다. 들어와서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니까, 본래 주인과 들어온 주인이 서로 싸우는 겁니다. 하하하…. 내칠 힘은 없고 그러니까 서로 싸우죠. 그러니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열심히 하셔야죠. 또 보이지 않는 세균이 내 몸에 들어와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여기 내 몸속에 천차만별로 모습을 해 가지고 내 식구들이 있는데 왜 한마음이라고 그러는 줄 아십니까? 내 식구들이 지금 몸에 수십억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수십억 마리가 모습은 각각일지언정 생명은 같고, 내 마음 가는 대로 몸에 들어 있는 생명체들이 다 따라 줍니다. 그 묘한 법을 여러분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여왕벌 하나가 움직이면 벌들이 그냥 다 따라가듯 하고, 국방부장관이 명령하듯 합니다. 국방부장관의 명령이 한번 떨어졌다 하면 뭐, 그건 일사천리니까요.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문지기가 지키고 있으면서 탁탁 치는 겁니다. 그럼 법에 의해서 못 들어가는 거죠.

그렇듯이 이 몸뚱이의 모든 생명들은 내 한생각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거나 장사를 하다가 망하면 여러분은 ‘아이고, 이제는 죽었구나.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는 신경을 쓰고 속이 상해서 술을 마시고 이러니까 속에 있는 생명체들도 다 타락을 하는 겁니다. 타락을 했으니 몸에 병이 안 날 수가 있나요? 병나서 고통스럽고 식구들도 다 고통스럽게 만들고, 마음 괴로우니 화합하지 못하고 단란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글쎄, 하늘이 무너져서 금방 굶어 죽게 된다 하더라도 왜 타락을 합니까? 그것도 주인공이 한 건데, 자기가 한 건데 말입니다. 자기가 안되게도 했지만 안되게 했으면 잘되게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도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으니까 겁을 내는 겁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삶의 보람을 느끼려면 그런 거에 얽매이지 마세요. 주인공이 모든 것을 들이고 내는 것이니까요. 가난함도 가난치 않음도, 어떠한 일이 생기는 것도 안 생기는 것도, 아픈 것도 안 아픈 것도 모든 일체를 거기서 하는 거니까 네놈이 알아서 하라고 놓으세요. 이열치열이 있죠, 왜? ‘네놈이 이 세상에 네 몸을 내놓고 이렇게 돌아가게 만들었으니 네놈이 해라.’ 이거예요. 막말로 무식하게 ‘네놈이 이 몸뚱이도 만들어 놨으니까 네놈이 알아서 해!’ 이렇게 그냥 놔 버려요. 모든 걸 그렇게 믿고 놔 버리세요. 포기하는 놔 버림이 아니라 믿고 놔 버리세요. 잘하고 못하고 죽고 사는 건 너한테 달렸으니 네가 해라 이거예요. ‘난, 몸뚱이는 너 하는 대로 따라갈 뿐이야.’ 하고요.

그리고 내가 오관을 통해서 바깥의 좋고 그른 거를 다 들여 주기는 한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은 문간의 문지기나 한가지예요. 보고 듣고 들여 주는 거요, 마음속에. 문지기가 들여 주면 또 안에서 문지기를 통해서 내주죠. 그러니 모두가 둘이 아니에요.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88년 2월 28일 국내지원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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