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모든 것을 항상 주처에다 맡겨놔라

▲ 그림 최주현

마음관념의 틀을 깨고 싶습니다
문)
일체가 고정됨이 없다는 걸 이론적으로 알면서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떤 때는 주인공이라는 것도 관념화가 돼 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관념의 틀을 깰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만약에 박카스 병을 본다 하더라도 박카스 병이라고 관념을 두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신호등 불빛을 갖다가 저게 그냥 빨갛다 파랗다 이렇게 볼 뿐이고 그렇지, 파랗다 빨갛다 이런 관념을 두지 마시라 이겁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물질적인 문제라는 거는 항상 변질되고 부서지고 만날 없어지는 거지 어디 그게 항상 있는 겁니까, 그게? 그러니까 ‘있다가 없다가,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요, 그대로 그냥 여여하다.’ 이 소리가 아주 그대로 그냥 묘법이지요.

그런데 이 관념을 부숴 버리질 못합니다, 모두. 그냥 닥치면 닥치는 대로 거기에 그냥 딱 뭉쳐 버리고 딱 뭉쳐 버리고, 딱 걸리고 그러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허공같이 쓰질 못하고. 아, 자꾸자꾸 돌아가면서 허공같이 돌아가는데 글쎄 왜 거기다가 자꾸 걸립니까. 그게 바로 고정관념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옛날 선지식들도 그런 말을 했잖습니까. “뜬구름과 같으니라.” 모든 걸 그렇게, “허망한 거지만 허망한 게 아니니라. 허망한 게 아니면서도 허망한 거니라. 그러니 뻘건 거 흰 거, 무슨 푸른 거 이런 거를 고정관념으로 두지 말고 그냥 허공과 같이 봐라.” 이 소리가 바로 그 소리에요. 그런데 그걸 납득을 못하면 “왜 이건 박카스 병인데 컵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박카스 병이라고 그래서 박카스인 줄 알지 이 컵이라 그러면 박카스를 압니까?” 이러거든요. 그러나 이 박카스 병은 우리가 볼 때 박카스 병이고 컵이지만, 내가 볼 때는 박카스 병도 아니고 컵도 아니다 이겁니다.

이게 나툼이기 때문에 허공과 같고, 마음의 허공이다. 나툼이기 때문에 바로 ‘무(無)’라고 한 거다. 이렇게 가르치는데도 그것을 납득을 못하고 자꾸 이 허공에 걸리고, 여기에 걸리고 저기에 걸린단 말입니다. 이 주인공이라는 것도 어느 달까진 이게 관념 속에서 요렇게 뭉쳐 놓고 전부 여기다 내버렸으면 이것까지도 내버릴 줄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냥 마음이 허공이기 때문이죠. 나툼이고. 마음이 나툼이고 허공이고. 아, 생명의 실상은 원소 자첸데 원소 자체의 문제가 그냥 거기에서 능력으로서 흐르기만 하고 돌아가는데 그걸 어떤 거를 집어서 말을 하겠느냐. 그러니까 허공과 같다고 하고 나툼이라고 하고 이렇게 말을 할 수 밖에는 없잖습니까.

나툼이기 때문에 허공과 같다. 나툼이기 때문에 고정된 관념으로써 ‘이건 박카스 병이지.’ 요렇게 관념을 두지 마라 이겁니다. 박카스 병이면 박카스 병이고, 이것도 지나가면 고만이에요. 지나가면 고만이지 이거를 또 그냥 죽도록 생각할 게 없다 이 소립니다. 우리 살아나가는 게 오늘 생각은 안 하고 어저께 생각만 그냥 죽도록 생각할 겁니까. 그러니깐 사람이라는 게 이 고를 면치 못한다는 것도 있지마는 육도윤회에 걸려서, 항상 걸려서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런데 대인은 어저께 어떠한 문제가 생겼어도 그거를 걱정 안 합니다. 왜? 자기가 자기대로 일단 그렇게 했으면 그냥 내버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거는 살아 있는 생명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돌아옵니다. 그러나 내가 그걸 버리질 못하고 꼭 쥐고 있으면 그 관념 속에서 그건 그냥, 이렇게 좀 지혜 있게 탁 넓혀서 다시 돌아오게끔 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내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그렇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바둥바둥하던 것도 놔 버려라. 놓으면 살아요. 탁 놔 버려야 된다 이겁니다. 놔 버리는 힘이, 그것이 허공과 같은 뿌리 없는 기둥이 그게 빙글빙글 빙글빙글 돌아가는데 그놈의 걸 그냥 탁 내 버리면 그 어마어마한 그 허공의 기둥이 그냥 그냥 돌아가고 빛이 그냥 활활 비치는데 아, 이놈의 거는 그냥 꽉 붙잡고 있으니 이게 어디까지나 마음의 고정된 관념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거 아닙니까.

사실 지금 배우는 사람들은 고정된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습이 어느 땐가 자기도 모르게 이게 고정된 관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더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실천이 문제다 이겁니다. 이해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실천이 문제다 이겁니다.

절에 가서 법문도 열심히 듣는데…
문)
불법을 공부하고자 절에 왔다 갔다 하면서 법문도 열심히 듣는데도 실제적으로는 체험도 한 번 못해 보고 있는 게 너무 속상합니다. 공부는 열심히 하고 싶은데 뭐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요.

답)
여러분이 수차적으로 그렇게 다니시면서 공부하시려고 애를 쓰시는데 듣기만 하고 겉으로 사량적으로 감응만 돼서 다녀서도 아니 됩니다. 우리가 듣고만 그대로 다니면서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보람이 없잖아요. 왔다 갔다 왔다 갔다만 하면 뭘 합니까. 여러분도 사회에서 살면서 일한답시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다가 차비만 버리고 다 버리고선 그냥, 돈도 벌지 못하고 그냥 허탕 친다면 이게 사는 겁니까. 이게 사람이 하는 일이냐고요. 그와 똑같은 일입니다. 우리가 듣는 것도 항상 새겨서 굴려 놓고, 감사하게 놓고,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고, 모든 하나하나 움죽거리는 것이 다 나와 더불어 상대와 나와 둘이 아니게 항상 그렇게, 주인공에서 모든 일체를 한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렇게 다니면서 얘기만 듣고 ‘아, 그러려니.’ 하고 내가 부딪쳐 보지 않고 내가 아파 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그거 느끼지 못해요. 남이 저렇게 아프다 하면은 ‘아, 그거 그렇게 아프려니.’ 이렇게 하지, 자기가 경험해 보는 것만은 못하죠. 그러니까 자기가 경험을 하고 체험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프라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실감을 해야지, 자기가. 사람이 살다 보면 아프기도 하고 가정에 또 혼란도 오기도 하고, 가난도 들기도 하고 우환도 들기도 하고, 병도 들기도 하고 파산이 될 수도 있고, 이건 일도 되는 노릇이 없이 안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예요. 가지각색으로 지금 사람이 고를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오는 것을 내가 항상 주처에다 맡겨 놔라 이겁니다. 모든 것은 자기 청수에서 하는 것이지, 청수에서 대뇌를 속달로 오관을 통해서 모든 거 하는 거지, 나는 물건이에요, 물건. 청수에서 이것을 쓰기 위해서 물건이 나온 거예요. 이 물건은 부서지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하고 그러지만, 청수라는 그 자체의 불성은 절대로 망가지지 않습니다. 본래 죽지 않길 때문에 산다 죽는다는 언어가 붙질 않아요. 그걸 불성이라고 그럽니다. 자성이라고 그러고.

그런데 자성과 불성과 둘이냐.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서 나와 저 지구와 둘인가요? 둘이 아니죠? 지구 속에 더불어 같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 집도 집이요, 지구도 집이라 이거야. 그렇다면 모든 걸 감사하게 놓고 믿어야 됩니다. 첫째 믿고, 두 번째 믿었으면 거기다가 맡겨라. 맡겨 놔라.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게 놔라. 안된 일이 생기면 바로 안되는 것도 거기서 하는 일이니까 거기에다가 맡겨 놔라. 그리고 또 믿었으면 물러서지 말아라. 의정이 나면 의정이 나는 대로 거기다 놔라. 놓고 또 의정이 나면 또 놔라. 의정이 났을 때 또 딴 의정이 생기걸랑 먼저 쥐었던 거는 놔라. 모든 걸 놓고 돌아간다. 모든 걸 놓고 돌아갈 때 보림이 돼서 완전히 내가 탄생이 됐을 때는, 그때는 놓고 또 쥐고 그런 게 없어요. 체험만 하고 돌아가면서 또 보림을 하는 거죠.

처음에 놓는 보림을 하면은 몽땅 차츰차츰 다 놔지고 다시 또 보림을 할 때는 체험하고 보림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을 다 둘이 아니게끔, 두 자리가 아니게끔, 두 말이 아니게끔, 두 생명이 아니게끔, 두 체가 아니게끔 이렇게, 두 아픔이 아니게끔. 슬프고 아주 기쁘고 이런 것이 둘이 아니게끔. 이런 것을 한데 합친 한 방울의 물처럼, 한 방울의 피처럼 이렇게 만들어서, 천차만별로 하고많은 게 이 물이라면, 그 피라면 바로 그것이 둘이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듣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우리가 들었으면 한번 새겨서 이 머리로써 이해가 됐으면 딱 청수로 놔 버려야 합니다. 주인공에다 놔 버리세요. 그것도 믿음직하게 믿으니까 놓는 거여야지 믿지도 않고 그냥 ‘에이, 될 대로 돼라.’ 그러고 놓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써 놓는 거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공부를 해서 앞으로 좀더 발랄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괜히 차비만 들이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지 말라 이겁니다.대인은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걱정 안 합니다.

자기가 자기대로 일단 그렇게 했으면
내버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바둥바둥하던 것도 놔버려라.
놓으면 살아요.
탁 놔버려야 된다 이겁니다.

선ㆍ악의 인연에 대해서
문)
살다 보면 선한 인연도 만나고 악한 인연도 만나게 되는데 이런 인연은 어디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인지요?

답) 그래서 여러분에게 “공부를 하시오. 공부를 하시오. 바깥으로 찾지 말고 안으로 찾으시오. 바로 안에서 밝힌다면 무엇이 부족하리까.” 하고 말을 항상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악의 인연과 선의 인연, 이런 것도 붙지 않으련만 여러분이 항상 바깥으로 찾고 바깥으로 돌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 문제 등등이 모두가 여러분이 해 놓고 받는 것이지, 누구가 그대로 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고 차원에서 고 차원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악의 인연과 선의 인연을 다 놓고 맡기고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도리를 몰라서 헤매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이런 것이 없다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구! 우리 자식은 이렇게 이런 원수덩어리가 태어나 가지고….” 이러거든요. 원수덩어리는 원수덩어리를 만들어 놨기 때문에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어디에서 인연이 돼서 이렇게 왔는지 그걸 모르죠.
그런데 어떠한 사람은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예를 들어서 말하는데 이게 거짓으로 알진 마십시오. 이게 우리가 진실된 이 생활 속에서 지금 허영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모르고 그냥 살지만 그러한 일이 허다합니다. 어떤 집에서 강아지를 하나 얻어다가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가 참 착했더랍니다. 그래서 사람과 같이 언제나 밥을 줘도 그 물에다 헝덩그르르하게 그냥 뜨물처럼 주지를 않고 오밀조밀하게 해서 잘 먹이고 이러니까 강아지가 커서 개가 돼도 참 그 은혜를 항상 고맙게 생각을 하고, 우리로 따진다면은 ‘엄마’ 소리는 못해도 그 엄마라고 항상 속으로다가 생각을 했던 거죠. 아버지라고 생각을 했고요. 그랬는데 어느 날 남편이 큰 나무덩이를, 장작을 패다가 고만 장작개비가 가서는 그 머리를 쳐서 그냥 즉사를 했단 말입니다, 개가. 즉사를 하니까는 애통지통 하는데 이것을 모두 동네에서 잡아먹겠다고 하는 거를 내 집에서 키운 거 절대로 남한테 잡아먹히게 하지 않겠다고 해서 고 뒷동산에다가 묻었습니다. 그걸 잘 묻어 주고선 “아이구! 우리가 너를 죽였구나.” 하곤 그냥 항상 께름칙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사그라지다 보니까 인제 이태가 걸렸답니다.

그랬는데 그 은혜로 인해서 내 몸을 이렇게 벗겨 주고 무명을 벗겨 주고, 그 인정으로 인해서, 어머니 아버지의 인정으로 인하고 그 자비로 인해서 내가 이 옷을 벗게 됐노라고 하면서 꿈에 또 나타나더랍니다. 그러고 또 어느 날 꿈을 꾸니깐 그 개가 탁 나타나더니 자꾸 멍멍 짖으면서 이 남편이나 부인이나 바지 자락을 쥐고선 늘어지고는 놓질 않더랍니다. 그런데 부인의 꿈에는 와서 손가락을 물더랍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처럼 “아휴! 너 어디 갔다 왔니?” 하고선 이럭하니깐 이 손가락을 물더랍니다. 그게 태몽이 돼 가지고 어린앨 낳았는데 아주 장골을 낳았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효자일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짐승이든지 사람이든지 항상 마음을 인의롭게 쓰고 착하게 쓰고 항상 내 몸을 바로 그 몸으로서의 그 사람으로 한번 돌아가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지셔야 합니다. 항상 인내가 있고 자비가 있고 지혜가 있어서 여러분이 한번 돌려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라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그러한 악한 인연을 짓지 않고 선한 인연도, 모든 것을 맡겨 놓고서 살아나가는 반면에 스스로서 언제나 질서와 계율을 지키면서, 스스로서 지혜를 넓혀 가면서 그러한 악의 인연이 아니라 아름다운 선의 인연으로서 주고받는 불빛처럼 항상 밝게 살게 되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뭐 하나도 나답지 않게 보지 마시고, 또 아무리 악한 종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마음속으로 탄압하고 미워하지 말고, ‘아하, 이것도 바로 내 인연에 따라서 내 탓이지, 누구의 탓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시면서 꾹 눌러서 거기에 맡겨 놓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여러분이 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살던 습의 종문서를 모두 태워 버리는 길입니다.

영탑과 납골당의 차이
문)
큰스님의 뜻에 따라 영탑공원을 조성함으로써 오랜 세월동안 관습적으로 지속되어 왔던 장묘제도가 매장 문화에서 화장 문화로 바뀌게 되는 커다란 의식전환과 함께 여러 가지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할 때 그 화장의 타당성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설 납골당에 모시는 경우와 영탑에 모시는 경우의 차이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 우리가 예전에 큰 사찰에서 스님네들이 열반하시면은 꼭 화장을 했습니다. 다비식을 했죠. 그것은 왜냐하면은 살아서도 공해서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를 집착을 하고 만약에 땅에다 묻는다면, 이 사람이 죽으면은, 그냥 공부 안 한 사람들이 죽는다면 삼혼이 있다고 합니다. 진짜 집에 하나 있고 하나는 돌아다니고 하나는 산소에 갑니다. 이게 이렇게 해서 집착을 하게 되면 사람이 사는 데도 그 영령들이 이렇게 가면은 이게 먹는다 입는다 산다 애착을 두고 살았기 때문에 그 애착에 잠겨서 영 움쭉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영령들이 그래서 자기 갈 길을 가지 못하고 그렇게 헤매고 있는 거죠.

그러니깐 여러분이 지금 몰라서 고생하는 거와 고생이라고 하고 고생하는 거와 영령들이 또 고생을 하고 있는 거와 둘이 아니죠. 또 그렇게 하고 있다가 어떡하든지 더 살 양으로 무슨 개구리라든가 짐승이라든가 이렇게 사는 데에 접하게 되죠. 모르니깐요. 눈이 잘 보지 못하고 귀가 잘 뜨이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해서 무의 법 유의 법을 동시에 둘 아니게 알면은 그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 보니깐 그냥 집착을 했던 그 뜻으로만 알고 들어가게 되면은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 나오게 되죠. 그러면 짐승으로 살면서 또 그 습에 잠겨서 사람으로 살던 그거를 잊어버리고 짐승으로 습이 돼 버리죠. 그러니까는 짐승이 사람으로 되기가 참 어려운건데 그렇게 산소에 매달리면 아니 된다 이겁니다.
납골당이라고 하는 데에 이렇게 모셔 놓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탑에 모시는 거와 뭐가 다르냐. 이거는 이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들하고 공부 안 하는 사람하고 또 탑도 다르단 말입니다. 이 탑에 들어가는 영령들은 그냥 자유스럽게 어떡하든지 ‘내 공부할 수 있는 거처다’ 이렇게 생각하고 항상 거기 모여서 공부를 하고 또 전부 자유스럽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나가고 이렇게 자유스럽게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또 부처님께서 이렇게 저거 하시면 또 같이 모이고 또 자불끼리 모이면은 자불끼리 모여서 토론하고 이러는 장소란 말입니다, 이 공부하는 사람의 탑들을 모셔 놓은 데는. 그러나 그냥 공부를 안 하고 예 있다가 그냥 탑으로 모신다 하더라도 그건 사찰에서 그렇게 하신다면은 몰려가서 염불소리 듣고 그러고선 하는 거죠. 모두 그렇죠.

이게 다른 것이 한두 건이 아니에요. 이게 다른 것이 영원히 세세생생을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산다. 이 마음공부 하면서 탑에 모시게 되면 항상 마음공부 하는 분들도 이렇게 둘로, 영령과 둘로 이렇게 하지 않고 내가 밥을 먹어도 그 부모와 같이 먹는 거와 같단 얘기죠. 그 뭐든지 같이 하니까 함이 없이 하는 거다. 함이 없이 하되 부모가 자식 위해서 살라고 하는 거지 자식이 안되라고 하는 부모 하나도 없어요. 그런 마음이 서린 마음이 한마음으로, 공심으로 한다. 공심으로 산다. 그래서 공생이면서, 공생이다 하는 건 종자가 같다는 얘기죠. 이게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으로서 산다. 이 모두가 이렇게 탑을 정해 놓고 이렇게 하는 것은 때로는 탑에 이렇게 모시려고 한다면 영령이 이런 공부를 안 했어도 본래에 아주 착하신 분, 그런 분들은 그냥 활활 벗고 떠나세요. 떠나셔도 거기에 근거지가 있으니깐 항상 이렇게 무슨 공부한다거나 이런다면은 같이들 모이죠. 이렇게 하는 도리다, 이런 도량이다 이런 뜻입니다.

근데 납골당, 이렇게 뭘 담아 놓고 이러는 것도 이게 이 마음공부에서 벌써 먹는 거 입는 거, 우리가 모습이 공했다는 걸 알고 이렇게 모두 공부를 하는 분들은 그냥 다 이렇게 벗어 버릴 수 있으나 그런 게 없이 그냥 거기에 있으면 영령들이 때에 따라는 집으로 들고, 이걸 말로 어떻게 하리까. 쪼끔만 잘못해도 문제가 생기고 이러는데 이 탑에 모시는 조상님들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공부하는 문제죠. 그래서 탑에 모셔 놓고 거기에 꽃 한 송이를 들고 가서 놓고 참 이 공부의 도리를 같이 한자리에서 합시다 하고선 이렇게 염원하고선 오시면은 그렇게 좋아하시고들 그렇게 좋지요. 어느 거든지 다 종자가 있습니다. 종자가 천차만별이지만 그 종자가 다 있어서 끼리끼리들 모두 사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고 그러는 사람들은 금강과 같다 이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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