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일본의 한국불교 점령

한국불교 스님들을 회유
일본 외무성도 적극 지원
日 불교 포교소 전국에 설립
韓 원흥사 건립… 견제에 실패


▲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 동국사는 한일합방 1년 전인 1909년 일본승려 우치다에 의해 ‘금강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됐다. 한일합방 이전까지 일본불교 포교소는 68개소에 달했다.
1876년 2월. 일명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이 개항정책을 취하기 시작한 19년 뒤, 승려의 도성출입이 재개되었다. 승려들은 도성출입 자체만으로도 불교탄압이 중지되었고, 사회적 지위 또한 향상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의 도성출입을 도왔던 일본 승려에게 감사장까지 헌정할 정도였다. 불교가 그동안 받고 살았던 탄압과 소외의 결과였다. 아이러니다. 설사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한국불교에 침투하여 점령할 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대응은 불가항력이었다. 강화도조약 자체가 일본의 식민지적 침략의 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도도하게, 그리고 거세게 휘몰아치는 역사의 물결을 거스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의 한국불교 침략은 강화도조약을 전후로 하여 이미 준비한 매뉴얼대로 점진적으로, 혹은 집요하게 진행되어갔다.

우리 본원사(本願寺)는 ‘종교는 곧 정치와 서로 상부상조하며 국운의 진전(進展)발양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명치(明治)정부가 유신(維新)의 대업을 완성한 뒤로부터 점차 중국·조선에 향하여 발전을 도모함에 따라, 우리 본원사도 북해도의 개척을 비롯하여 중국·조선의 개교(開敎)를 계획하였다.

1922년 대곡파 본원사와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에 수록된 내용이다. 즉 1877년 일본 정부는 본원사에 조선개교에 관한 일을 종용 의뢰하여 본원사에서는 부산에 별원(別院)을 설치했던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막부체제의 청산과 함께 천황제(天皇制)가 부활되었다. 왕정복고(王政復古)였다. 이것은 국가지상주의적 성격이 강한 일본불교의 전통이 왕법을 근본(王法爲本)으로 삼아 왕법과 불법(佛法)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왕법불법불리지론(王法佛法不離之論)’으로 대표되는 불교의 호국논리가 대두된 계기였다. 때문에 일본이 식민사업을 전개할 때 그 정신적 계몽은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의 몫이었다.

개항기 한국에 건너와 포교활동을 했던 일본 승려 카토오(加藤文敎)가 포교활동의 경험 등을 정리하여 1900년에 간행한 〈한국개교론(韓國開敎論)〉에 의하면 “일본과 동일한 불교국인 한국을 위해 포교한다는 것이 어찌 일본 불교도의 보은(報恩)적 의무가 아니겠는가. 정청군(征淸軍)의 목적으로 보나 장래 일한(日韓)간의 관계로 보나, 이것은 최대의 급무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요컨대 일본불교의 조선침략 역시 일본정부의 식민지 개척과 불교의 해외포교가 일체화되어 추진된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 불교의 각 종파는 조선의 개항 초기부터 조선의 불교를 전면적으로 장악하여 자신의 종파로서 국교화(國敎化)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들은 한국의 불교인들을 유인하고 포섭하기 위해, 더욱이 개종(改宗)까지 시키기 위해 일본 외무 당국의 원조와 협조를 받아가면서 좌담회·물질공여·교류 등을 통해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기본이었고, 조선 불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면을 만드는 제면(製麵)기술이나 종이 만드는 법, 그리고 양잠 등을 가르쳐 물질적인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승속(僧俗)을 불문하고 한국의 저명인사들에게 일본사찰을 알선하여 호감을 갖게 하고, 한국인 교사를 채용하는 학교를 만들어 청년을 계발하는 방법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 일본 승려 카토오가 포교활동의 경험 등을 정리하여 1900년 간행한 〈한국개교론〉
실제로 합방(合邦) 전인 1907년에는 이능화(李能和) 등 30명을 데려다가 3개월 동안 일본의 각 관청·학교·공장·명소(名所) 등을 관람시켰으며, 1909년에는 홍월초(洪月初)·김동선(金東宣) 등 60여 명을, 1917년에는 권상노(權相老) 외 8명의 본산 주지를 초청하여 일본의 문물을 소개하였다. 그때마다 일본정부는 적극적이었는데, 총독이 직접 장려금까지 내놓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개교총감 오오타니는 “처음에는 조선인으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도록 조선인 교사 1인을 채용하고 생도로부터는 전혀 수업료를 받지 않으며 지필묵(紙筆墨)을 대주면서 재래의 학예만을 수업시키다가 차차 지리, 역사 등을 수업하고 마지막으로 종교윤리를 교육시킬 것”이라는 방침을 정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생도는 10명 정도로 하고 관찰사나 지방관 등과 교섭하여 가급적 상류생활을 시키며 뛰어난 자는 발탁해야 한다.”고 했는데 생도 수를 10명으로 제한한 것은 보편적인 교육이기보다는 그들을 추종하는 엘리트의 양성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종교윤리 교육 또한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는 한국인 인재를 양성하자는데 목적이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일본불교 윤리를 주입하고자 한 것이었다. 예컨대 왕법위본 충군애국(王法爲本 忠君愛國)의 국가지상주의적 불교를 조선에 이식(移植)하는 것이었다.

문호개방 이후 끊임없이 한국으로 본격적인 침략행위를 감행한 일본 불교종파는 진종(眞宗) 대곡파 본원사와 일련종(日蓮宗)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일본 각 종파가 1878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이전까지 전국 각지에 설치한 별원과 포교소, 출장소의 수는 68개소에 달했다.

오늘 일본이 강유거세(剛柔巨細)한 수단을 다하여 조선을 병탄하려는 계획을 착착 진행함에 하나도 소홀함이 없다. 정신을 빼앗기면 스스로 함닉(陷溺)하나니 어찌 비참하지 않으며,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항차 정부에 있는 어리석고 용렬한 인물과 사회의 몰지각한 무리가 저들의 술수에 빠져 스스로 동족을 멸하게 하나니 그 죄악이 하늘에 이른다.

1905년 일본의 본원사가 용산에 조선개교총감부(朝鮮開敎總監部)를 설치하고 오오타니(大谷尊寶)를 총감으로 보낸 것에 대해 대한매일신보가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한 글이다. 기사는 이어서 ‘이토(伊藤博文) 통감이 정치상의 통감이라면, 오오타니 총감은 종교상의 총감’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본원사가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계획에 따른 것이라는 이러한 지적과 비판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를 해제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한편 이와 같은 일본불교의 한국점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1902년 1월 원흥사(元興寺)가 창건되었다. 즉 정토종의 확산을 중심으로 한 밀려오는 일본불교의 빈번한 활동을 견제하는 한편 한국불교의 위상을 정립하고자 국가에서 불교를 관리하겠다는 의도였다. 정부는 동대문 밖의 별장이었던 영미정(潁眉亭)을 매입해서 원흥사라 하고 총섭(總攝)을 두게 하였다.

당시 관리자였던 권종석은 1902년 7월 고종의 명을 받아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의 시행규칙인 ‘국내사찰현행세칙’을 제정하였다. 당시 원흥사에 설치된 대표적인 승직(僧職)은 도섭리(都攝理)와 내산섭리(內山攝理)였다. 이들의 소임은 각각 총무원장과 경성의 사찰을 총감독하는 위치였다.

원흥사는 이와 동시에 13도에는 각각 1개소의 으뜸 사찰 즉 중법산(中法山)을 두어 도내 사찰의 사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사사관리서가 궁내부(宮內府)에 속한 기관이어서 궁내부 관리가 나와 사무를 관장하여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혼란한 정치와 관리의 부패로 인해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 불교계의 승려들은 불교 통할기관인 원흥사가 존속하기를 바랐지만, 급기야는 관리서가 폐지되고 원흥사를 없애라는 칙령에 따라 일본 정토종 이노우에(井上玄眞)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불교연구회에 그 관리가 넘어가고 말았다. 이후 이회광 스님이 불교연구회 회장을 맡으면서 한국불교는 자주적 의지에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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