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진흥원 신년대법회-금강경의 현대적 조명-김윤수 (前 판사)

“보아뱀 뱃속 코끼리 볼 수 있어야

〈금강경〉 지혜의 눈으로 이해 가능”

고집멸도 실체 보는것 쉽지 않아

욕망은 ‘苦’의 본질…수행으로 소멸

▲ 김윤수 前판사는 1951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1976년 제 18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교수,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광주시법원 판사,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파주시법원 판사 등을 역임했다. 불교 저서로는 〈불교는 무엇을 말하는가〉 〈보신의 주에 의한 대승입능가경〉 등이 있다.
<금강경〉은 가장 대중적인 경전이다. 많은 이들이 수지하고 독송하는 이 경전을 현대적으로 조명하는 자리가 있었다. 바로 대한불교진흥원의 신년대법회 시리즈 중 하나로 열린 1월 30일 김윤수 前판사의 법회는 〈금강경〉의 탄생과정과 불교 변천사를 통해 부처님의 진정한 말씀을 다시한번 일깨우는 자리가 되었다. 정리=정혜숙 기자 bwjhs@hyunbul.com

 

이번 법회의 주제가 ‘금강의 현대적 조명’입니다. 저는 대승불교의 소의경전이라고 하는 〈금강경〉을 공부하기 전에 이것이 나온 배경을 미리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라는 작품에 보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부분이 이 그림을 모자라고 하지요. 저는 〈금강경〉이 이렇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당시 초기불교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대승불교의 이야기만 하고 있죠. 눈이 밝은 사람은 코끼리를 볼 수 있으나 눈이 어두운 사람은 모자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17~18년 전부터 불교를 공부했습니다. 참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도 불교가 뭘 말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잘 잡히지 않을 정도로 불교가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어서 보통 사람이 불교를 이해할 수 있을까 늘 걱정을 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불교의 전체 모습을 먼저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 경험상 굵직굵직한 역사적 줄기를 꿰뚫고 나면 불교를 휠씬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코끼리 코를 코끼리로 생각하거나 코끼리 다리를 코끼리로 잘못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체 코끼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세부적인 것을 설명해줘야 쉽게 설명이 된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우쳐서 중생들에게 가르친 불교는 지금 불교와 비교했을 때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괴롭습니다. 괴롭지 않은 사람은 없죠. 이는 우리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가진다고 해서 달성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욕망을 없애버리면 되죠. 그렇다면 이 욕망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느냐 그것은 수행을 통해 가능하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본질 깨닫는 거 자체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괴롭다는 것이 인생의 본질일까요? 보람 즐거움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것도 많은데 왜 인생이 괴로운가요? 궁극적으로 욕망이 충족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욕망을 없애는 것은 깨달아야 하지만 너무 어렵습니다. 간략히 줄여서 얘기한다면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훈련을 해야 하는가 하면 또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마치 물과 같아 변화하고 고정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연에 의해서 생기고 멸하기 때문에 계속 부단히 변화해 붙잡을래야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죠. 계곡물이 상쾌하지만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생은 물과 같이 붙잡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동떨어져서 봐야 합니다. 지혜의 눈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하죠. 어떤 대상에 대해 집중해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욕망을 가지려 해도 가질 수가 없는 구조가 돼 있습니다. 욕망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불교를 근본 불교라고 하는데 BC 7세기 경 정도의 불교를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수천명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눈을 떠서 완전 자유를 구했습니다.

이 당시 불교는 욕망은 괴로움을 일으키는 본질이기 때문에 그 욕망을 없애야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죠. 또 이를 위해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불교가 많이 발전하고 변화했지만 이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이런 구조만 이해해도 일상에서 상당 부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500년이 지나니 깨닫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 돼 버렸습니다. 실제로 잘 깨닫지 못하는 세상이 온 것이죠. 그러면서 수행자들도 어떻게 보면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서 남을 인도하는 것도 힘들어집니다. 기존의 불교가 기본적으로는 힘을 잃게 됩니다. 또 이렇게 불교가 힘을 잃게 된 데에는 아라한이 되는 데에 너무 치중했던 것도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는 대단한 사건이지만 그 한 분만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죠.

결국 열반하시기까지 그 분을 굉장히 존경할 수 있고 좋아할 수는 있지만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런 의문에 빠지게 되죠. 결국 중생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떡해야 될까요?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결국 〈금강경〉을 가지고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을 이루면 부처님과 같이 뛰어난 능력을 가지게 되고 많은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금강경〉 제 4품 묘행무주분(妙行無主分)에는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해야 한다’ ‘보시하되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모든 상이라는 것은 허망하고 실제가 없는 것입니다. 컵도 계속 미세하게 변하고 있죠.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 형성되고 조건에 의해 변화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기 위해서는 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법이라는 상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해야한다는 마음을 먹고 보시를 하되 상에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서 보시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가 불교수행의 핵심이라는 말에 근거가 됩니다. 일체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금강경〉이라는 것은 코끼리를 삼키고 있는 보아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불교의 신앙화입니다. 의지하는 불교는 불교가 아니지요. 보아뱀 안에 든 코끼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자가 아니고 말이죠.

▲ 대한불교진흥원은 금강경의 현대적조명을 주제로 신년대법회를 열었다. 1월 30일 김윤수 前판사의 법회에는 150여 명의 대중이 참여했다.
하지만 대승불교가 일어난지 500년이 지나자 이것이 사변화 되고 중생 이끄는 데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어난 것이 선불교입니다. 결국 불교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교의 뼈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왜 대승불교가 일어났는지를 알야야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걸 이해하는데 5년 걸렸습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을 유심히 챙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승불교 선불교 티베트불교 등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불교를 좀더 객관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부처님께서 처음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유심히 챙겨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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