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승려 도성출입금지 해제

日 일련종 사노의 건의로
출금 해제 윤허는 일반론
여과 안된 일본 식민사관
‘자체적 노력 결과’ 반론도
“당시 시대상을 냉정히 읽자”

▲ 승려 도성 출입 금지 해제 전후의 남대문 전경 사진. 승려 도성 금지 해제는 근대불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승려 도성 출입 금지 해제는 일본 승려 사노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다는 게 일반론이지만 조선불교의 자체 노력이 있었다는 반론도 제기돼고 있다.
1895년(고종 32) 3월 29일 승려들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단속하는 금령(禁令)을 해제하였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이때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 1861~1839)가 “승도(僧徒)들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금령(禁令)을 해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아뢰자 고종이 윤허(允許)했다는 것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의하면 일본 일련종(日蓮宗)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날 고종의 윤허는 그 후 한 두 차례 금지와 해제를 반복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지만, 한국근대불교사의 본격적인 서막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동인(李東仁) 스님을 중심으로 불교계의 개화운동 등을 사례로 들면서 근대불교의 시작을 좀 더 이른 시기로 끌어올리려는 학자의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일본불교나 불교개혁론과의 관계 등 일련의 상황들을 생각한다면 이전 시기의 불교양상과 확연히 다른 본격적인 근대불교의 시작은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로부터 상정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조선은 건국 이후 승려 수를 줄이고, 사원전과 노비를 몰수하는 불교정책이 진행되면서 세종대부터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령이 내려져 조선중기인 현종 대는 도성 안의 사찰을 헐어 서당(書堂)으로 고치도록 하였다. 영조 대에는 사찰에 조상의 위패를 봉안하지 못하도록 엄단했으며, 정조 대에는 승려의 도성출입을 엄금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과 탄압의 과정에서 불교계는 유구한 세월 동안 발전시켜 온 사상과 신앙, 교단의 체계화 등이 급진적으로 쇠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역대 왕들의 표면적인 배불정책(排佛政策)과는 달리 16세기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하는 법령은 없었다. 아울러 당시까지만 해도 도성 내에는 적지 않은 사찰들이 명맥을 유지하며 존재하였고, 왕실과 사대부가의 신행(信行)사례가 보이고 있어 승려의 도성출입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이 다시 시작되고 난후인 1896년 7월 도성출입금지 해제를 주선했던 사노 젠레이(佐野前勵)는 도성해금을 축하하는 대법회를 마련하였다. 즉, 황제폐하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중흥과 유신에 대한 업적을 기리는 대법회였다.

5월 5일 도성 안 원동의 북일영(北一營, 현재 동숭동 서울대 병원자리)에서 개최한 한일승려합동무차대법회(韓日僧侶合同無遮大法會)는 당시 북한산 승대장(僧大將)이었던 중흥사 주지 권재형(權在衡)과 남한산 승대장 이세익(李世益)을 비롯하여 화계사(華溪寺)·백련사(白蓮寺)·용주사(龍珠寺) 및 금강산 등에서 300여 명의 승려들이 운집했다. 아울러 외부(外部)·학부(學部)·농상공부(農商工部) 대신과 김홍집 총리대신의 대리 등 20여 명의 조정 고관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능화는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이 “조선의 승려는 수백 년 동안 문외한(門外漢)의 신세였는데, 오늘에 와서 비로소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로써 불일(佛日)이 다시 빛날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용주사의 취허(就墟) 스님은 사노 젠레이에게 감사장을 증정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극히 비천하여 서울에 들어가지 못하기를 지금까지 5백여 년이라 항상 울적하였습니다. 다행히 교린(交隣)이 이루어져 대존사 각하께서 이 만리타국에 오시어 널리 자비의 은혜를 베푸시니 본국의 승도로 하여금 5백 년래의 억울함을 쾌히 풀게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왕경(王京)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실로 이 나라의 한 승려로서 감사하고 치하하는 바입니다. 이제 성에 들어가면서 감히 소승의 얕은 정성으로나마 배례하나이다.

취허 스님은 도성에 500년 동안을 들어가지 못해 항상 울적했는데, 이제부터 왕경을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사노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 해제와 이후 불교계의 이와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려 있다. 박경훈은 “한국 불교계 안에 친일의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라고 했으며, 최병헌 역시 “결과적으로 한국불교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환영받았던 해제 조치가 한국 불교발전의 계기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친일적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일본불교로의 예속화의 단서를 열었다는 점에서 불행한 사건이었다”라고 하였다. 정광호와 김광식 역시 “해금의 계기를 제공한 것이 일본승이었기 때문에 불행한 불교 역사가 시작되었다”라고 규정지었다.

반면 다른 시각도 있었다. 조계종 교육원에서 편찬한 〈조계종사〉 근현대편은 고종의 해금에 관한 윤허가 있기 이전인 1894년 6월 이미 갑오경장(甲午更張)의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던 군국기무처가 개혁안으로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를 포함시켰음을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의 내용을 근거로 전제하였다. 이 책은 “해금(解禁)은 19세기 말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과정에서 주도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박희승 역시 해금은 김홍집과 박영효가 건의했고, 고종이 결정을 내렸음을 전제로 “그런데 왜 이 조치를 일본 승려가 했다고 하는가. 그것은 일본 식민주의 역사가 다카하시의 〈이조불교(李朝佛敎)〉의 내용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결과 때문”이라고 해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론을 비판하였다. 참고로 다카하시 토오루의 의견을 보자

사노가 경성에 오랫동안 머무르지는 않았지만, 조선불교의 생기가 이미 다하여 승려에게 종승(宗乘)도 없고, 종지(宗旨)의 신조도 없음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일본불교의 종지에로 개종케 하고, 일련종으로써 조선불교계를 통일하는 것은 반드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믿고, 이때에 조선 승려를 위한 파천황(破天荒)의 은혜를 베풀어 이로써 저들을 일본불교로 유인하는 계기를 삼고자 꾀하였다. 그리하여 기재(奇才) 사노가 붙든 것은 실로 조선 승려에 대한 입성해금(入城解禁)의 수행이다.

주목할 부분은 조선불교의 생기가 다해 조선의 승려들에게는 종승도, 종지도 없다고 한 것이다. 박희승은 이밖에 해금의 최종 결정권자가 고종이었고, 1894년부터 약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해제와 금지가 반복되어 1895년 3월의 조치만 따로 보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니며, 조선 승려들의 자주적인 노력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에 온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사노가 5백 년 동안 유지되었던 해금을 해결한 것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해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가 일본인 승려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이후 한국불교가 굴절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부정적인 시각과 해제 자체는 우리의 자체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부정론의 대체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사노 젠레이의 해금에 대한 건의는 사실이고, 다카하시의 당시 조선 승려가 종승과 종지가 없다는 지적 또한 사실에 가깝다.

필자는 몇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려 한다. 첫째, 취허 스님이 500년 동안 도성을 들어가지 못했는데, 왕경을 볼 수 있게 되어 조선 승려의 5백년의 억울함을 풀게 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능화가 무차법회를 관람하다가 들은 “조선의 승려는 수백 년 동안 문외한(門外漢)의 신세였는데, 오늘에 와서 비로소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당시 불교계의 상황이다. 돋보기로 실상을 좀 더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사노에게 감사장을 증정한 일을 두고 취허 스님을 ‘속 모르고 사노에게 감사장을 준 스님’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조선에 온지 한 달도 안 된 사노가 해금을 해결한 것을 두고 너무나 잘못된 해석으로 몰아 갈 수 있을까.

조선왕조 전 시기 동안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동향과 같은 일련의 상황을 냉정하게 살필 수 있다면, 그리고 해금이 있었던 당시 조선의 국내외 정세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면 해제조치가 “한국불교 발전의 계기가 되지 못했고 더 나아가 일본불교로의 예속화의 단서를 연 불행한 사건”으로 단정할 수 있을까.

일본은 이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거치면서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걸음을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착각하지 말라.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당시 조선 불교는 곳간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채워나가야 했다. 역사는 흔히들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를 분석하고 살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그들의 눈으로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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