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신사상과 불상의 관계

불교는 숭배아닌 귀의 강조
법신은 부처님 법 계승 의미
불상·불탑 귀의 위해 제작
불상의 진상·가상 이중주 속
청정한 허공의 몸을 보리라

▲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은 초기 부처상. 부처의 몸을 보여주는 불상은 숭배가 아닌 법신에 귀의하는 의미로 조성·발전돼 왔다.
모든 종교에는 입문절차가 있다. 불교에도 불자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입문절차가 있다. 최근 조계종에서는 불교대학 기본과정을 이수해야 신도증을 교부하도록 규정하는 등 불교 입문을 위한 형식들을 만들고 있지만, 불자가 되려는 사람이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삼귀의(三歸依), 부처님과 그 분이 가르친 법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귀의하는 것이 불자가 되기 위한 기본 요건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불교에는 형식적인 입문절차가 없다. 출가자를 위한 입문의식인 수계의식과 절차가 율장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부처님 재세 시에는 ‘오라, 비구여!’라는 한 마디면 그의 제자가 되었다. 재가자의 경우에는 그저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하면 불자가 된다. 특별한 의식이나 절차보다 마음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삼귀의 중 이미 열반에 들어 존재하지 않는 부처님에 대한 귀의는 어떤 의미인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법과 승가와 비교해 볼 때 부처님에 대한 귀의는 귀의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모호한 것은 신앙심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대부분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은 분명하게 이해되는 것이 선호된다.

불교의 진실한 귀의처는 어디인가
따라서 모든 종교는 그 교주를 불멸의 존재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부활이 그런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미 죽음을 맞이한 예수를 불멸의 존재로 만드는 장치이다. 예수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고 믿을 때에만 예수에 대한 귀의가 분명하고 의미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성된 모든 것의 변화와 사라짐을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신격화가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가? 살아있는 부처님조차 그 육신은 제한되고 허망한 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부처님만 가지고 있는 특징인 삼십이상과 팔십종호조차 그 본질이 아니다. 설사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원하는 곳에 몸을 나투더라도 그것은 가상에 불과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귀의해야 할 귀의처가 아닌 것이다.

부처님의 육신과 신통력으로 나타난 형상조차 허망하다면 우리는 무엇에 귀의해야 하는가? 진실한 것에 귀의할 때만 우리들의 귀의도 진실한 것이 될 것이다. 과연 진실한 것은 무엇일까?

부파불교 시대에도 이 문제가 진지하게 토론되었다. 부처님의 색신은 허망하지만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만드는 것, 즉 그 본질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출생이나 은총이 아니라 스스로 수행하여 깨달은 법에 의해 부처님이 되셨으므로,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만든 본질은 바로 부처님이 깨달은 법이다.

이 법은 부처님 입멸 이후에도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는 법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에 대한 귀의는 부처님이 깨달은 법에 대한 귀의에 다름 아니다.

법신, 가장 진실한 귀의의 대상
이로부터 법신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만들어졌다. 법신, 즉 ‘진리의 몸’은 부처님 그 자체, 가장 진실한 부처님을 말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동시에 부처를 부처로 만드는 본질인 법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는 부처가 될 가능성, 다시 말해 법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법성이 실현될 때 우리는 부처님과 같이 ‘진리의 몸’을 이루게 된다. 반야경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다, 곧 지혜의 완성은 법성으로서의 공성과 그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법신은 가장 진실하고 궁극적인 진리의 몸인 동시에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법신사상은 대승불교 비판자들이 주장하듯이 역사적 존재인 부처님에 대한 신격화나 신비화가 아니다. 그것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부처님이 처음부터 강조했던 정신의 계승이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리라.”는 〈상응부경〉의 말씀이나 “여래가 법을 공양하기 때문에 법을 공양하는 자가 있다면 나를 공경하는 것이며 법을 관찰한다면 곧 나를 보는 것이며 법이 있으면 곧 내가 있느니라.”는 〈증일아함경〉의 말씀은 법과 불이 하나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법신사상은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던,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으라는 말씀과 일치한다.

법신은 지혜와 자비가 구체화된 몸
법신사상의 새로운 점이라면, 법을 아비달마의 주제인 제법처럼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지혜와 자비라는 부처님의 구체적인 덕성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불멸 후 사람들은 부처님이 실제로 일생 동안 세속의 오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으며 세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출세간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청정한 지혜와 자비의 몸을 가진 부처님은 열반에 든 뒤에도 어딘가 청정한 곳에 계속 존재하면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싹트게 되었다. 자비의 화신인 부처님이 우리를 버리고 떠날 리 없다는 생각은 부처님의 열반이 단지 현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이끌어내었으며, 그 결과 불멸하는 존재, 영원한 현재를 표상하는 법신이 역사적 존재인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더 높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법신은 역사적 존재인 부처님의 신격화가 아니라 불법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대표한다.

사실 법신사상은 부파불교의 스콜라적 사변으로부터 다시 삶의 현장으로, 사회로 되돌아오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불상의 조성은 법신사상의 출현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기원후 1세기 경 간다라 지방과 미투라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불상이 제작되었는데, 불상의 인도문화의 자생적인 발전 결과이든 헬레니즘 문명과의 교섭 결과이든 불멸 후 5백년 가까운 무불상시대 이후에 출현한 불상은 불교사상과 실천의 변화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어느 지역에서 먼저 불상이 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불상의 제작이 대승불교의 출현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불교미술사는 불상의 조성을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대승불교로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로 설명하여왔다. 따라서 불상 역시 단순한 숭배의 대상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그렇게 본다면 불상은 다른 종교인들이 비판하는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을 것이며 대승불교도 비판자의 견해처럼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초기불교로부터의 이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저 심원한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너무 안일한 결론이다.

무불상시대에 부처님의 색신을 대신하여 불교조형물 속에 나타난 보리수, 불족적(佛足跡), 빈 대좌, 법륜 따위는 부처님의 색신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거기서도 부처님을 잊지 않으려는 제자들의 사무치는 그리움을 읽을 수 있다.

▲ 남방불교에서 흔희 볼 수 있는 불족적
불상·불탑은 숭배 아닌 귀의 의미
하지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던가? 부처님을 색신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거부는 사실은 부처님의 색신에 대한 강한 관심과 결합되어 있다. 구체적인 인간의 형태로 표시되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상징들은 부처님의 역사적 실존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다시 말해 색신의 부재는 역사적 실존인물로서의 부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가지야마 유이치 같은 일본 불교학자도 부처님 사후 수세기 동안 부처님의 육신에 대한 존경이 사리를 보관한 불탑에 대한 숭배로 표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형상화에 대한 이처럼 조심스럽던 태도와 비교해본다면 불상의 출현은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새롭게 등장한 법신사상이 불상을 조성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준 것은 아닐까? 법신에 호소하는 것은 육신이 아닌 정신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역사적으로 실존한 부처님의 존재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형상화에 대한 제한도 과감하게 떨쳐버릴 수 있지 않을까? 역설적이게도 법신에 대한 사유가 부처님의 형상을 물질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금기를 깨뜨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불상은 무지몽매한 재가신도들이 부처님을 신격화된 존재로 숭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부처님에 대한 귀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상은 부처님의 덕성을 가상의 몸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상한다. 덕분에 우리는 진리의 몸, 법신을 감성적으로 이해하고 체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에 남아 있는 금석문 분석을 통해 불상 숭배가 사찰과 관련이 있으며 출가 의식의 하나라는 그레고리 쇼펜의 실증주의적 연구결과도 매우 흥미롭다.

모든 형상은 그림자, 가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변화하는 모든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날마다 돌부처님, 흙부처님, 나무부처님에게 귀의한다.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며, 단멸된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닌 부처님. 변하는 것도 아니고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에 이분법의 양변을 떠나 있으며 색깔과 모양, 크기로 표현할 수 없는 부처님. 그래서 찬탄의 대상이 아니지만, 불자들은 “가는 자도 아니고 오는 자도 아니며 간다는 행위도 없는 선서(善逝: 부처님 십호 중 하나)”에게 귀의한다.

지극한 그리움으로 불상에 깃든 진상과 가상의 이중주에 귀 기울인다면 그 속에서 모든 차별이 사라진 법신의 세계, 청정한 허공의 몸을 보게 되리라.

“당신의 몸은 영원하고 견고하고 심원하고 평온하십니다. 그것은 법의 본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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