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생태적 사회를 위한 원칙 : 비폭력

산업사회, 비정한 승부의 경쟁사회
이 싸움터서 종교 한쪽 편만 들어
자비심 가질때 상대방 구제 가능

녹색사회, 생태사회는 비폭력 사회
분쟁해결 위해 평화교육 강조
동일 평면에 투쟁과 대립 파괴 자초

▲ 2008년 불교계를 중심으로 진행된 생명평화탁발순례. 진정한 생태사회가 되려면 개인의 폭력뿐 아니라 구조적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평화를 원하면 내가 평화가 되어라
산업사회는 경쟁사회이다. 경쟁은 기본적으로 이기고 지는 관계이다. 상대를 속이는 한이 있어도 이겨야하는 치열하고 비정한 승부의 사회이다. 때론 손해보지 않기 위해 상대를 먼저 기선제압하고 시작하려한다.

무시당하거나 호락호락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상대를 이용하지 않으면 내가 이용당하는 냉혹한 사회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은 승리감에, 지는 사람은 피해의식과 패배감을 느낀다. 피해의식과 패배감은 개인에게 억압적 정서를 만든다. 세상은 승리자보다 패배자가 더 많다. 아니 패배의 감정을 갖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한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다른 경쟁에서 계속 이기라는 보장이 없다.

어쩌면 잠깐의 성취와 승리감만 있을 뿐 대다수의 사람은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더 많이 경험하면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살고 있다. 한국 자살율이 세계 1위인 것은 ‘더빨리, 더 높이’를 추구하는 압축성장의 속도중심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그만큼 정신적 피로도와 스트레스가 누적된 것이 원인이다.

이러한 싸움터에서 종교는 싸움을 말리는 역할을 할까? 아니다. 오히려 이 싸움터에 깊숙히 편입되어 어느 한쪽을 응원하는 일을 한다. 사업 성공을 위해서 입시와 승진경쟁서 이기게 해달라고 부처님과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종교인들은 이런 사람들의 구복적인 욕망을 거부하도록 가르치기 보다는 반대로 조장하고 그 속에서 이익을 보는 집단이다. 버리고 버려 무소유의 삶을 살라는 부처님 가르침과는 거꾸로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라고 기도한다. 불교뿐아니라 우리나라의 종교심은 크게 또는 작게 “믿습니다 주시옵소서”의 정서가 지배하고 있다.

적과 나를 가르지 않아야  
싸움은 필연적으로 적(敵)과 나(我)를 명확히 구분하게 만든다. 이 싸움을 승리하기 위해 적에 대한 적개심을 최대한 강화시키고, 분노와 증오심을 증폭해 자기 세력을 공고히 결집시켜 적에 대한 공격적 파괴력을 높이려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대립은 상대에게 저항의지를 생성시킨다. 그래서 설령 싸움에서 이긴다 하더라고 패배한 사람의 저항의지를 포기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의 승리자가 향후 약화되었을 때, 혹은 패배한 상대방이 강해졌을 때, 다시 복권을 시도하려 싸움을 벌인다. 그래서 전투는 중단되지 않고 반복된다.

“자비로서 섭수하라”는 부처님 말씀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의미할까? 진정한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백전백승이 선의 선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선의 선이다’라는 말은 손자병법 제 2원칙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저항의지나 적개심을 갖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동일한 평면, 동일한 수준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보다 한차원 높은 곳에서 상대를 안타까워하며 그를 구제하겠다는 자비의 발심을 가질 때야만 가능한 것이다. 싸움에서 설령 이겼다고 해도 상대방이 적개심과 저항의지를 포기시키지 못했다면 완전히 승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의 대립을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서도 파괴된다. 증오의 정서는 자신을 황폐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는 완전한 승리, 최종 승리는 불가능하다. 또한 증오의 감정도 상대에게 포섭된 마음이며 미워하면 닮게되기 때문이다. 실제 괴물과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은 처음부터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원칙은 적과의 ‘대립’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와 협동’ 곧 ‘자비와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다. 상대와의 싸움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섭수하는데 집중하는 것이다. 그를 돕기위해 이익을 주는 방법을 찾아 노력하는 것이다. 미운사람을 자기사람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좋아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근본은 아(我)와 적(敵)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에 승리에 집착하지 않고 목적이나 의도마저 갖지 않는 것이다. 무심(無心)한 상태이다. 무엇을 걷거나 이익을 보거나 승리하겠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상대에게 자비로운 마음 을 갖고 정진하다보면 목적은 어느덧 달성되게 된다. 아니 그 이상을 얻게 되며 이 과정에서 목표는 오히려 과정의 부산물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이익이나 무엇을 얻겠다는 손익계산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생태사회는 이분법적 사고를 부정하고 다양성의 사고를 지향한다. 자신은 천사라고 생각하고 상대를 악마라고 생각하는 이분법을 반대한다. 그래서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양성이다. 다른 것이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과 가치의 절대성, 배타성을 내려놓아야 가능하다.

폭력은 비폭력사회를 만들 수 없다
녹색사회, 생태사회는 비폭력사회이다. 폭력적으로 비폭력사회를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생태사회를 이루는 방식도 폭력적 일체의 방식을 거부한다. 목적을 위해서는 그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이 과정에서 보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폭력은 ‘개인적인 폭력’과 ‘구조적인 폭력’으로 나눈다. 생태사회는 개인적으로 가해지는 폭력 뿐아니라 국가와 제도에 의해 가해지는 국가폭력과 억압 모두를 종식하고자 한다.

따라서 생태사회에서는 개인과 집단에서 자기 결정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한 분쟁해결을 위한 비폭력적 수단과 방법의 평화교육을 강조한다. 국가 자체는 폭력기구이기 때문에, 생태적 미래를 구상하는 사람들에겐 경찰과 검찰, 군사 등 각종 폭력기구가 어떻게 억압적으로 이용되지 않게 할 것인가가 대단히 중요한 과제다. 그리고 폭력의 집결체인 정부와 군산복합체에 의해 촉진되는 군비증강과 무기 경쟁에 대해서 적극적인 저항을 하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녹색대안사회는 사회화된 폭력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부장제사회에서 흔히 보는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성적소수자, 재외국인 등 소수집단에 대한 일체의 폭력과 억압이 종식되는 사회를 꿈꾼다. 그래서 철저한 평등을 지향한다. 그리고 사람과 자연간의 폭력적인 관계를 상호균형과 존중의 관계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독일 녹색당의 초대 당수였던 '페트라 켈리'는 “비폭력은 생태주의적 사회에서 필수요소”라고 말했다.

비폭력 행동이 가지는 힘
나쁜 사람과 착한사람이 싸울때 단기적으로 착한 사람은 불리하다. 아니 오히려 쉽게 패배한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은 비열한 방법을 포함해 온갖 전술을 동원할 수 있지만, 착한 사람은 전술동원에 제한 받는다.

즉 착한 방법 밖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이긴다. 당장은 자신이 폭력과 고문속에 패배한 듯하지만, 그의 도덕적 행동은 주변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수의 감정을 변화시켜 거대한 힘으로 작용되기 때문이다.

총 드는 것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대체복무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무기라고 하는 폭력적 도구를 들지 않을 양심과 신념의 자유를 위해 감옥을 비롯해 어떠한 시련도 감내하며 불복종운동을 전개해 왔다. 결국 이들의 감동적 행동이 전세계인의 인권과 평화에 눈 뜨게 했고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서 이제 유엔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권 차원에서 존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비슷한 수준, 동일 평면에서의 투쟁과 대립은 서로 파괴만 자초한다. 한단계 위에서 자비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감있게 그들을 섭수하는 것, 이것이 비폭력행동이다. 과거 혁혁한 독립운동가였지만, 독립이후 독재자가 돼 수많은 민중을 죽게하고 도탄에 빠트렸던 지도자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불교의 개혁 또한 사회민주화나 정치혁명처럼 총무원의 지도자를 폭력적으로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불교개혁은 부처님의 정법을 올바로 세우는 것이 목표이다. 사회개혁과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개혁하는 과정의 모습이 이들 이후에 만들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폭력은 폭력적 사회를 구원하는 수단이자 이후 사회를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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