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의 틀린 용어 바로잡기 1. 꽃병→만병

조형언어 해독 다시 문자언어로

전주 풍남문 화반 꽃병

꽃 아닌 영기문 발산

 

▲ 풍남문 화분 채색 분석
불교미술사는 한국미술사이다. ‘불교미술’이라고 왜 스스로 한정짓는가! ‘한국미술’이라고 불러야 한다. 건축(사찰건축, 궁궐건축)-조각-회화-공예(도자공예, 금속공예) -복식 등 한국 조형미술의 모든 조형은 고차원의 불교미술 아닌 것이 없다. 사상과 문학도 마찬가지다. 원효는 불교사상가인가. 아니다. 한국사상가이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불교용어가 없다고 해서 불교문학이 아니라 하겠는가. 그 시집은 한국문학의 금자탑이다. 왜 항상 불교만 찾아서 불교미술이란 용어로 접두어로 붙여서 스스로 작게 한정시키는가. 불교계는 불교문화의 외연을 넓힐 필요가 있다.

대학시절 25세부터 미술사학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고 하면 지금까지, 반세기라는 긴 세월 50년 가까이 공부를 해온 셈이다.그동안 논문도 많이 썼고 저서도 열 권 이상을 펴냈다. 모든 논문의 주제가 불교미술, 특히 불교조각이지만 나 스스로 불교조각전공자로 인식한 적은 없다. 요즈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내가 불교전공자로 알고 있다. 나의 학문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이다.

그 학문의 대전환이란 것은 서서히 이루어졌는데 대전환의 계기는 고구려벽화의 암호 같은 조형들을 기적적으로 해독하기 시작한데서 비롯한다. 그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2년이 흘렀으며 그동안 정립한 이론은 〈영기화생론 靈氣化生論〉이란 방대한 것으로 인류 보편적인 이론으로 정립하여 가는 도중에 있으나 뼈대는 이미 정해져 있다. 나의 연구대상은 갑자기 조형미술의 모든 장르로 확대되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조형미술의 모든 장르로 무한히 확장되었으며, 영기화생론은 조형미술뿐만 아니라 언어학-사상-종교-문학-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확대전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인 것은 인류가 이루어온 무량한 조형미술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진실에 도달하고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단지 빙산의 일각만 보인다는 것에 놀란 것보다 더 경악한 것은, 그나마도 용어들이 오류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학문적 대전환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나 자신도 그런 진실을 전혀 몰랐으며 그릇된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용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까닭은 예술작품의 여러 개념들을 요약한 것이고 그 용어에 의하여 뜻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바다 밑의 거대한 빙산을 발견한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중생이 보이게끔 해야 했으며, 보이지 않았던 조형이므로 이름이 없어서 신(神)이 아닌 내가 조형들의 이름들까지 부여해야 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그 수많은 새로운 조형들의 상징을 밝혀내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 조형의 구성 원리와 상징구조를 밝힌 다음 만든 용어들을 만들었으므로 나름의 근거가 있는 용어들이다. 이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이니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때때로 중국이나 서양의 예도 들게 될 것이다.

내가 밝힌 것이란 한 마디로 ‘조형언어’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해독해낸 것이었으며, 문자언어에 문법이 있듯이 조형언어에도 문법이 있어야 하므로 그것을 정립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해독한 조형언어를 다시 문자언어로 바꾸어 써야 하는 괴로움이 있는데 결국 조형언어는 문자언어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우므로 연재에는 작품 사진과 작품을 채색분석(彩色分析)하여 설명하는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다가갈 것이다.

내가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도 여러분은 종전의 안목과 사고력과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두가 생소한 조형이고 모두가 낯선 이야기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의 소리이므로 그 조형이 보이고 상징을 들으려면 여러분이 인내심을 갖고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조건이 있다. 이 연재는 여러분이 눈을 떠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내가 해독한 조형언어 문법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조형들이 새로이 풀리게 된다. 앞으로 잘못된 용어, 아무 의미 없는 용어들을 낱낱이 증명해가며 올바른 용어로 바꿀 것이다. 그 수많은 용어들 가운데 우선 ‘꽃병’부터 시작해 보기로 한다.

 

왜 꽃병이 ‘만병’인가

사찰건축에 가보면 법당과 누각의 안팎에 꽃병 그림이 매우 많다. 뿐만 아니라 궁궐이나 문루 등 한국건축에도 많다. 한국건축은 불교건축을 올바로 연구하지 않으면 풀려지지 못한다. 꽃병을 조각하여 화반을 삼기도 하고, 포벽에 그려 넣기도 한다. 화반이란 포와 포 사이에 놓여 장혀와 창방 중간에 놓인다. 이러한 화반을 주로 개방적인 건물 즉 누각이나 문루(門樓)의 건축에서 볼 수 있어서 화반 양쪽으로는 터져 있다. 개방적이 아닌 법당인 경우에는 공포와 공포 사이를 벽으로 막고 회를 바른 다음 그 포벽(包壁)에 꽃병을 그린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개방적인 누각인 경우에는 반드시 용의 얼굴(龍面)을 조각한 것과 꽃병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여 화반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꽃병들은 과연 말 그대로 그저 단순한 꽃병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왜 꽃병을 그토록 많이 조각하여 용면과 한 세트를 이룰까? 어떤 분은 공양화(供養花)라고 한다. 요즈음 사찰건축에 관심이 많아 건축학회에서 여러 주제들을 발표하고 학술지에 싣고 있는 가운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건축 의장(意匠)에 우리나라 사상과 조형의 본질이 오롯이 표현되어 있음을 알았다. 지금 풀어나가고 있는 꽃병의 비밀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일체의 전통미술에는 중요한 우주관이나 인생관이 반영되지 않은 조형은 없다. 그런데 그 진실을 알지 못하고 아무 의미 없는 장식으로만 알고 지나치니 전통미술도 이해하지 못하고 미래를 향한 올바른 창작행위도 할 수 없다.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 더 나아가 서양의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나 일반 대중들은 모두 꽃병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던 가운데 7년 전 어느 날 밤, 조명을 받으며 뚜렷하게 보이는 전주 풍남문(?南門)의 화반에서 꽃병을 보았는데 그 꽃병에서 나오는 것이 꽃이 아니었다. 이튿날 아침 사진을 찍어서 돌아와 그려보고 채색분석하여 보니 놀랍게도 영기문(靈氣文)이 발산하여 나오는 광경이었다. 영기문이란 우주에 충만한 대생명력을 가시화한 갖가지 조형을 나는 영기문이라 이름 지었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그래서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이름이 없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면서 그런 조형에 내가 이름을 붙여나갈 것이니 여러분은 정독하여 주시기 바란다. ‘우주에 충만한 대생명력’이나 ‘우주에 충만한 성령(聖靈)’이나 ‘삼천대천세계[우주]에 가득 찬 여래’ 등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여래는 한 마디로 ‘생명’이다. 생명의 근원이어서 만물을 생성시킨다. 바로 그 갖가지 영기문이 항아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꽃병이 아니고 다른 성격임을 짐작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점차 ‘대생명력이 가득 찬 병’ 즉 만병(滿甁)이라는 만물생성의 근원이라는 도상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우선 풍남문의 꽃병을 그려서 채색분석(彩色分析)한 것을 보여드리며 설명을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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