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칼럼]새 아침을 열며

한 해를 보내며 영종도의 도서관이 마련한 송년행사에 가서 시와 동화를 읽었다. 지난 한 해는 시집 두 권과 소설집을 내고 첫 그림 전시회까지 열었으니, 생애에서도 바쁘게 보낸 날들로 기록되었고, 그 마무리 행사가 되는 셈이었다. 흔히 그렇듯이 뒷부분에 질문 시간이 되자 누군가 내게 물었다.

▲ 윤후명<소설가, 국민대 문창대학원 겸임교수>
“선생님은 가장 행복을 느낀 때가 언제인가요?”
돌이켜보면 지난 인생에서 실로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갖가지 일들을 겪어왔다. 특히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란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이다. 식민의 굴레가 끝나고 전쟁이 덮쳤으며 혁명이 있었다. 보릿고개 같은 이상한 낱말이 있었던 어려운 나날, 실낱같은 목숨을 하루 하루 이어온 세상살이였다.

가장 행복을 느낀 때?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울컥 하고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자자분한 많은 기쁨들이 있었다. 그만큼의 슬픔들도 있었다. 용기의 나날, 좌절의 나날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렇게 나이도 들게 되었다. ‘가장’이라는 말이 지난 세월을 통틀어 아우른다고 할 때, 실로 어렵게 어렵게 오늘까지 지켜온 삶이 큰 느낌으로 고맙게 밀려오는 한가운데 나는 서 있었다. 그와 함께 나는 20대의 젊은 어느 날, 나 스스로에게 던졌던 숙제를 기억하고 있었다.

늙어서도 젊어 있는 삶.
나이 들어서도 젊은날처럼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각오였다. 우리 사회는 여러 방면에서 일찌감치 현역을 그만두는 풍조가 두드러진다고 생각되었다. 특히 글을 쓰는 작가들이 오래 오래 쓰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그러니까 ‘늙어서도 젊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한 외국작가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글을 썼다고 알려져 있었다. 조그만 성공에 만족하고 글을 멀리하는 작가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어서 빨리 나이 먹어 늙기를 바랐다. 그래야 나는 ‘늙어서도 젊어 있는’ 나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실천하는 나를 보여줄 것이었다. 나이 먹지 않고서는 증명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오랜 세월을 보내며 나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혹시나 세월에 풍화되어 사라지면 어쩌나, 나이듦이란 모든 것을 흐지부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투로 흐리게 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기만을 바랐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말했다시피 기쁨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다. 하루 하루 끼니를 이어가기에도 허덕이던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지상명제였다. 그동안 안타깝게 이승을 버린 동료도 몇이 되었다. 그런 한 해 한 해를 살아넘긴 것이 기적 같은 때도 있었다. 나는 한 해를 보내는 시를 적는다. 

지나온 한 해가 거울 속에 묻혀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내 얼굴,
사랑을 기대한다.
있는 그대로 없는 그대로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힘인 사랑을.
거울을 들여다보는 내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그때마다 더 깊게 파이고
새로운 날 숨가쁘게 기다리게 했으니
이제 기쁨과 슬픔 함께 버무려
거울 속 침묵의 창고에 간직하련다.
가거라, 모든 망령이여
먼 뒷날 비록 다시 모습을 드러내
거울 속에서 절규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없는 그대로
곧이곧대로의 사랑의 힘으로
이 땅에 옳음과 그름을 살피기 위하여
곧이곧대로의 사랑의 힘님께
길을 비켜라.
헌날을 데리고 서산을 넘어가
멀리 멀리 사라져가거라.
있는 것을 있게 하고 없는 것을 없게 하는
사랑을 위하여.

이제 나는 나이 들어서 ‘있는 것을 있게 하고 없는 것을 없게 하는’ 꾸밈없는 인생 앞에 서 있음을 노래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기다려온 때가 바로 지금임을 확인할 차례인 것이다. 젊어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이 마음이야말로 인생의 승리라고도 여긴다.

“가장 행복한 때는 지금입니다.” 
나는 기쁘게 말했다. 왜 그런지는 앞의 이야기를 곁들였다. 그렇게 기다려온 때가 마침내 다가왔고, 바라던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20대부터의 숙제를 푸는 작업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하여 나의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막상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고 나니 새삼스러운 감격이 밀려왔다.

플라톤은 <대화편>에서 젊은이들에게 너희도 결국 늙는다고 가르친다. 이 평범한 가르침을 위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인 이래 나는 더욱 ‘늙도록 젊어 있는 삶’을 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나는 새날을 맞이한다. 굳이 1년 단위로 시간을 나눌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마야달력의 종말론도 별일 없이 지나갔고, 무엇보다 뜨거웠던 대선도 결말이 난 다음의 지금은 예년과는 다른 시간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고 믿는다.

새롭게 나 자신을 가다듬고, 나라 역시 새로운 역사 앞에 ‘곧이곧대로의 사랑의 힘님’을 맞이하는 새해가 오고 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다. 언제까지 내게 이 행복한 나날이 허락될지 알 수는 없어도, 이 고마운 나라에 태어나 살고 있음을 나는 증명하려 한다. 

윤후명 소설가는 …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저서로 시집 〈명궁〉 〈홀로 상처 위에 등불을 켜다〉 〈쇠물닭의 책〉, 소설집 〈둔황의 사랑〉 〈협궤열차〉 〈여우 사냥〉 〈가장 멀리 있는 나〉〈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 〈삼국유사 읽는 호텔〉 〈새의 말을 듣다〉 〈꽃의 말을 듣다〉, 산문집 〈꽃〉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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