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대중 칼럼- 허우성 불교평론편집위원장

허우성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불교평론〉은 게재된 글 하나를 놓고 논란이 일어나면서 2012년 9월경 급히 폐간되었고, 석 달 뒤 불교계 안팎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되살아났다. 이와 함께 그동안 〈불교평론〉이 벌여온 가을학술세미나, 경희대학교 비폭력연구소와 공동으로 개최하는 열린 논단, 올해의 논문 시상 등 모든 활동도 내년부터 정상화될 것이다. 〈불교평론〉의 충격적인 폐간과 복간을 두고 편집위원장으로서 만감이 교차했다.

첫째, ‘승가와 재가 학자들이 둘이 아니구나’라는 것이 가장 먼저 일어난 느낌이었다. 복간되지 않았다면 세상은 〈불교평론〉과 수덕사 모두를 싸잡아 비난했을 것이다.

승속 불이는 또 재가 불교학자들과 승단이 곳곳에서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학자들에게 주 연구 대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하여, 인도, 중국, 한반도에서 살아갔던 기라성 같은 고승대덕의 인생과 그들이 남긴 말과 글이 아니던가. 그들의 삶과 말이 없었다면, 우리는 불교의 진실성조차 의심했을지도 모르고, 연구는 아주 빈약했을 것이다. 선양회가 승가 외부 사회와 재가 신도들의 보시에 의존해 있다면, 〈불교평론〉은 그야말로 승속의 합작품인 것이다.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은, 학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비판의 자유는 무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승속이 둘이 아니니까 비판의 대상을 아프게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의 자유가 타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깊이 유의해야 할 것이다. 

셋째, 파계의 문제는 승가 내부의 책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계율을 지키겠다고 공언한 출가자가 불음 조항을 위반했다고 해보자. 그런 문제는 ‘불사음’ 계율을 좀 지키는 재가학자들이 지적하기 전에 출가 공동체가 확인하고 자정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최선이고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넷째, 외부에서 문중의 인물을 비판하는 경우 문중은 이에 대해 열려 있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자유 결사의 시대에 각 문중은 자유롭게 특정인을 대표 인물로 세워서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현창할 수 있다. 하지만 문중 인물 중에는 이미 역사의 반열에 오른 분도 있다. 그런 경우 외부인의 자유로운 연구와 비판을 감내해야 한다. 비판에 오류가 있다면 반박하면 될 것이 아닌가.

예컨대 한용운과 비구 법정은 위대한 점이 있지만,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나 다른 불교를 실천했다. 불교학자는 두 인물을 비교하면서 각자의 특성과 차이를 드러내고 한계를 비판할 수 있다. 실제 경허 스님에 대해 제자 방한암과 송만공의 평가에 차이가 있다는 것, 이는 세상이 아는 일이다.

넓게 보면 세계불교사도 한국불교사도 복수의 인물로 구성된다. 복수의 인물이 있어야 불교는 다양해지고 풍부해진다. 이런 다양함과 풍부함은 장차 더욱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 내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다섯 째, 속간에도 불구하고 깨달음과 행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떤 깨달음은 사람을 파계의 결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가? 아니면 모든 깨달음은 행위 규범을 반드시 요구하거나 수반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대답하는 데는 청정한 고승대덕이 제격이다.

굳이 필자가 대답해야 한다면, 초기불교 경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 분에게 니르바나는 탐진치가 다 끊어진 경지이고,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면 계율의 준수는 저절로 따라온다.

그 분은 또 승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수범수제(隨犯隨制) 정신으로 계율을 제정해 나간 것을 보면, 모든 행위를 덮어준다는 깨달음의 신비 장막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리라. 

계간지 〈불교평론〉은 1999년 11월 창간 이래 독자들에게 약속해온 것이 있다. 불교사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역사 정치 사회현상을 분석 조명하는 역할을 다하겠다고. 물론 앞으로도 그런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속간으로 필자는 〈불교평론〉을 일으킨 인연들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그것들이 우리의 힘 바깥에 있다는 점도 새삼스레 깨달았다.

우리는 〈불교평론〉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저 약속으로 돌아가련다. 추운 겨울에도 욕망, 분노, 무지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그곳으로. 우리는 둘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불교와 현대 사회가, 승과 속이 함께 있는 곳으로. 거기 가면 경허와 만해도 만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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