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마을’일구는 각현 스님 국제연꽃마을 회장

홍콩 사찰 속의 복지 보고 복지 눈떠
1993년 교계 첫 용인 무료 양로원 완공
베트남에 한국형 복지타운 추진
원력과 업력 이제 경계 두지 않아
 

각현 스님은 … 1944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1968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월탄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대구 동화사 강원에서 공부했고, 1974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홍콩 중문대학 중문학부를 수료했으며 동국대 행정대학원 복지행정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의왕 청계사 주지, 홍콩 홍법원장, 법주사 부주지를 지냈다. 1990년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 이사장에 취임해 현재까지 법인을 이끌며 복지 불사를 계속해 오고 있다. 조계종 11대 중앙종회의원, 청주불교방송사장, 용인요양원 원장, 한국 노인문화진흥회 공동회장, 법보신문 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2011년 12월 출범한 사단법인 국제연꽃마을 회장직을 맡고 있다.
“나의 부모 형제는 버렸지만, 더 많은 이웃의 부모 형제를 만났으며, 산사의 솔바람 소리는 뒤로 했지만, 사람 냄새가 묻어나는 현장의 목소리가 정겹고, 대강백의 꿈은 접었지만 본지풍광(本地風光) 드러내며 얽히고설키고 사는 맛으로 위안하려하나 허허로운 마음을 떨치지 못하니, 오호라, 숙세의 업연을 어찌 탓하겠습니까?” 스물넷에 불가에 귀의한 스님은 20년 넘게 자신의 부모 형제보다 더 많은 이웃의 부모형제를 위해 살고 있다. 1990년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 2대 이사장으로 취임해 지금까지 법인을 이끌면서, 한국 불교계 복지의 지평을 넓혀온 각현 스님이다.
이제 그의 불명은 ‘복지’라는 배접지에 단단히 배접되어 있어서 그의 이름과 얼굴은 ‘복지’와 함께 떠오른다. 하지만 숙세의 업연이라고 한 허허로운 그 마음 또한 새롭게 스님의 이름 위에 배접된다. 그랬다.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보게 된 스님 저서의 서문에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았던 스님의 긴 그림자를 본다. 20년 이라는 세월이 이제는 제법 긴 그림자를 만든 것이다.
이어지는 서문에서 그 아쉬운 마음을 본다. “마음의 고향은 산사(山寺)이며, 안심입명(安心立命)은 소승의 삶의 목표입니다. 산사에서 들려오는 경(經) 읽는 소리가 정겹고, 면벽구도의 수도자는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일찍이 이 시대의 부루나 존자를 꿈꾸기도 했고, 옛 선사들의 행적을 흉내 내고도 싶었습니다.” 법의(法衣)를 입은 사문으로 어찌 솔바람 부는 호젓한 산사의 정취와 ‘저쪽’이 보이는 선방의 좌복 맛을 모를까. 스님의 복지 20년은 그렇게 한 사문이 사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얻은 열매다. 스님은 “하고 싶은 일은 원력(願力)이고, 해야 할 일은 업력(業力)이다.”며 걸어 온 길과 아쉬움을 갈무리한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 스님의 복지 서원을 원력이라 해야 할까 업력이라 해야 할까. 스님을 만나러 간다.

원력의 시작
1978년 청계사 주지로 재직할 때였다. 스님은 돌연 홍콩 유학길에 오른다. 스님은 새로운 공부에 대한 갈증을 느꼈고, 결심한 것이 유학이었다. 스님은 중국어 공부를 하기 위해 홍콩 중문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스님이 공부를 마칠 때쯤 스님에게 남은 것은 중국어가 아니라 ‘복지’였다. 홍콩의 복지를 보게 된 것이다. 사찰 속의 복지를 보게 된 것이다. 사찰 대부분이 복지시설과 함께 하고 있었다. 복지를 통한 포교였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포교’라는 생각이 스님의 가슴과 머리를 흔들고 때렸다. 복지는 자비의 또 다른 말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홍콩의 불교와 복지를 생생하게 체험하고 돌아온 스님은 ‘생활불교’에서 한국불교의 미래를 보았다. 1982년 귀국한 스님은 1984년 동국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에 본격적으로 복지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공부를 마치고 난 스님은 고민했다. 산으로 갈 것인가. 대중속으로 갈 것인가.

기다리고 있었던 인연
스님이 20년 넘게 몸담게 되는 ‘연꽃마을’은 스님이 이사장에 취임하기 1년 전인 1989년, 조계종 원로의원 성수 스님이 설립한다. 인연은 그랬다. 각현 스님이 복지를 공부하는 동안 성수 스님은 연꽃마을을 만들고 있었다. 성수 스님이 설립한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은 이 나라 어르신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보람되고 존경받는 노년과 성공적인 노후를 위해 설립됐으며, 설립자이며 초대 이사장인 성수 스님은 이를 통해 ‘효의 사회화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법인을 설립한지 1년이 되어 갈 무렵이었다. 법인은 설립 후 1년 이내에 목적사업을 시행해야 하는데 연꽃마을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수 스님은 연꽃마을을 이끌어 갈 사람을 하루 빨리 찾아야 했다. 백방으로 사람을 찾던 차에 각현 스님에 대해 알게 됐고, 성수 스님은 법주사로 사람을 보낸다. 각현 스님은 당황스러웠다.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실무 경험이 전혀 없었던 스님에게는 부담스러운 제안이고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사장에 취임에 첫 사업으로 양로원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복지’와의 첫 인연이 너무도 큰 불사였기에 스님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저 힘든 청동미륵대불 불사도 해냈으니 잘 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성수 스님은 각현 스님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결국 각현 스님은 성수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90년 8월 각현 스님은 연꽃마을 2대 이사장에 취임한다. 하지만 막막했다. 기반은 너무나 열악했다. 당시 양로원이라 하면 전국에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을 때였다. 더욱이 불교계의 노인복지분야는 비교할 것 자체가 없었다. 복지라는 큰 틀도 문제였지만 당장 양로원 하나를 지어야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1000원의 힘
스님은 차분히 처음부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양로원을 지을 수 있을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자금이었다.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그 때 스님이 생각해낸 것이 ‘캠페인’이었다. 스님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불자들의 성금으로 무료양로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료양로원 건립 모연문’과 함께 ‘연꽃마을 후원 신청서’를 들고 법회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신청서에는 ‘마을마다 연꽃마을, 마음마다 연꽃마음’이라고 적혀있었고, 매월 1000원의 후원금을 부탁했다. 3개월 만에 1만 여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교계에서 양로원 건립불사를 해본 적이 없던 당시로서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드디어 첫 삽을 뜨게 됐다. 이사장 취임 후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듬해 5월 후원회원은 1만 명을 돌파했다. 그리고 1993년 드디어 불교계 최초의 무료양로원이 완공됐다. 용인양로원이다. 불자들의 순수한 성금으로만 지어진 양로원이었다.
보시는 물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스님은 복지의 꽃은 자원봉사라고 생각했다. 보시는 물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가지고 있는 재능을 나누는 것도 보시이고 나눔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1999년부터 자원봉사를 모집하기 시작한다. 현재 연꽃마을이 확보한 자원봉사자는 2만에 달한다. 법인이 주최하는 행사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일이면 언제든지 달려온다. 전국 최초로 자원봉사자 명단을 데이터베이스화했고, 봉사 시간에 따라 많은 혜택을 부여한 결과 연꽃마을의 자원봉사자는 이제 연꽃마을의 사업을 극대화 시키는 원동력이다. 스님은 불교의 ‘보시정신’이 이 사회에 꼭 필요한 ‘나눔의식’으로 확대되길 바랐다. 그리고 이런 나눔의식의 확산과 더불어 스님은 성수 스님의 원력이기도 했던 ‘효 사회화 운동’을 이어가고자 했다. 스님은 복지시설이 아무리 훌륭해도 마음이 없는 나눔과 복지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고 생각했다. 효의 정신이 전제되지 않은 노인 복지는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들의 정신적인 공허함을 채워주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연꽃마을
그렇게 ‘1000원’에서 시작한 스님은 연꽃마을을 현재 파라밀요양원을 비롯한 요양시설 5곳, 파라밀노인복지센터를 비롯한 재가노인복지시설 21곳, 군포시매화종합사회복지관을 비롯한 복지관 8곳, 성동구립 금일어린이집을 비롯한 아동복지시설 7곳, 연꽃경로식당을 비롯한 경로식당 11곳, 노인의 집 1곳, 파라밀양한방요양병원을 비롯한 의료시설 8곳, 중증장애인요양원을 비롯한 장애인시설 2곳, 송파푸드마케 등 기타사업 5곳 모두 68개의 시설을 운영하는 최대의 사회복지재단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그 곳에는 1천 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동안 연꽃마을을 거쳐 간 이웃은 이제 헤아릴 수 없다.
“무척이나 지루한 세월이었습니다. 앙상한 회색빛 골조만 쳐다보고 지난 세월이 어언 5년이 지났습니다. 올려다 볼 때마다 자괴심으로 제 자신을 많이도 탓했습니다. 내 것을 남에게 줄 주도 모르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더욱 할 줄 모르는 못난 사람이, 의욕만 앞세운 결과가 한숨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지난 2008년 파라밀병원을 개원하며 밝혔던 스님의 소회다. 20년을 지나오는 동안 힘든 순간이 파라밀병원뿐이었을까. 쉽지 않은 재원마련, 커져가는 법인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들, 사회전반에 부족한 복지 마인드 등으로 그야말로 ‘복지’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딛고 지금의 스님과 ‘연꽃마을’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스님의 손길, 연꽃마을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했던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닐 움막집에서 중풍과 싸워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할머니, 명절만 돌아오면 외손자가 보고 싶다며 성치 않는 다리로 문 밖만 서성이던 할아버지, 말 할 수 없는 아이, 듣지 못하는 아이, 사랑받지 못한 아이, 씻겨드려야 하는 어르신, 먹여드려야 하는 어르신. 그들은 어디서 왔을까. 연꽃마을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커져야 했다. 움막집에 사시다 양로원으로 옮긴 중풍 할머니는 양로원에 오신지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직원도 울고, 자원봉사자도 울고, 지린내 난다고 그렇게 싫어하던 할머니들도 울었다. 스님의 책 서문 뒤에 이어지는 사연들 속엔 스님과 연꽃마을이 받아낸 아픔과 함께 나눈 눈물이 끝없이 이어졌다. 멀리 2008년에 힘겹게 완공되었던 파라밀병원이 보였다. 책을 덮고 스님을 만난다.

해외로 영역을 넓히다
경기도 안성 파라밀병원. 투명한 출입문 안으로 스님이 보였다. 앉자마자 스님은 두툼한 자료가 든 대 봉투 하나를 건넸다. “베트남에 한국형 사회복지시설을 건립하자” 대 봉투 속에서 꺼낸 8쪽짜리 안내 책자 표지다. 그리고 그 제목 밑엔 ‘베트남 쾅남성 세종학당 조감도’가 그려져 있다. 작성자는 ‘사단법인 국제연꽃마을’이다. 각현 스님은 베트남 쾅남성 팀키시로부터 2만평 부지를 무상으로 임대받아 한국형 종합복지타운 ‘베트남 연꽃마을’을 설립, 운영하기로 했다. 각현 스님은 2005년부터 베트남 쾅남성 교육위원회에 매년 500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해 왔다. 2011년 쾅남성장이 고마움의 표시로 스님에게 감사장과 함께 부지를 기증하면서, 복지시설이 열악한 베트남에 한국형 사회복지 시설을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스님은 사업을 위해 (사)국제연꽃마을을 설립했다. 베트남 사업만을 전제로 한 법인이다. 스님의 복지사업은 이제 해외로 영역을 넓혔다.
탐키시에서 기증한 2만평의 부지에는 교육시설인 세종학당을 시작으로 직업훈련원, 연수원, 보육시설, 노인요양원, 병원, 재활시설 등이 세워질 예정이며, 그 중 1차 사업으로 올 12월 12일 세종학당 기공식을 갖는다. 대지 1100평에 6동으로 세워지는 세종학당은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세워지는 ‘한국어 전문 학당’이다. 교육 후에는 현지 한국기업 취업 및 한국 방문 취업기회를 제공하며, 양국 문화교류와 쾅남성 지역사회복지 사업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님은 이번 사업에도 정부 보조금 없이 후원 회원, 베트남 현지기업 협찬, 월남 참전 전우회, 국제연꽃마을 회비, 국내기업 협찬 등 순수한 모금으로 재원을 마련할 계획이다. 각현 스님은 “월남전 당시 전투가 치열했던 빈선현 빈호아사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를 보고 파병국의 국민으로서, 불제자로서 아픈 역사의 인연을 모른 채할 수 없었다.”며 “이번 사업은 양국 친선도모, 한국문화 전파와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와 해원(解寃)의 의미도 담겨 있다.”고 사업의 취지를 밝혔다. 아울러 국제연꽃마을은 전쟁의 피해로 장애를 입은 쾅남성 시민을 대상으로 의수족보장구 지원사업과 안면기형자 수술 지원, 고엽제 피해자 치료지원 등의 사업을 함께 진행할 계획이다.

스님의 복지관(福祉觀)
“지난 시절의 사회복지는 ‘구휼’이 전부였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오늘날의 사회복지는 ‘영혼의 안정’입니다.” 20년 넘게 복지 현장에서 얻은 스님의 복지관이다. 스님은 그것을 ‘종교적 사회복지’라고 말했다. 당장 입에 넣을 밥 한 술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닌 시대라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치유가 모두 필요해진 것이다. 아울러 종교가, 불교가 하는 복지는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종교가 있어야 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제 100세를 사는 세상이다. 고(苦)의 시간도 그만큼 많아졌다. 영혼을 돌봐야 한다는 스님의 복지관은 100세 시대로 접어든 고령화 사회에 꼭 필요한 복지라는 생각이다. 그 옛날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난 곳에 극락정토가 있다고 했다. 스님은 그 10만억 국토를 열심히 지나고 있었다.

스님의 서원은?
“스님 저서의 서문에서 사문으로서의 아쉬움이 많이 느껴집니다. 서문에서 말씀하신, 하고 싶은 일, ‘원력’은 언제 쯤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원력(하고 싶은 일)’에 대한 아쉬움이 있으신지요?” 스님이 말씀하셨다. “그것이 사문으로서 그리움이고 아쉬움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매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산 속에서 수행하는 것만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수행자와 실천자가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필요한 서원을 했다면 원력이든 업력이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스님의 서원은 원력인 동시에 업력이었다.
스님을 뵙고 나오는 길에 다시 스님의 책에 눈이 갔다. 서문 끝을 읽는다. “내가 베푼 작은 사랑 때문에, 내가 만든 작은 시설 때문에,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하고 싶은 일’을 가슴에 안고 업파(業波)에 넘실대며 살겠습니다. 소승은 오늘도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마음의 방랑자가 되어 노인복지 현장을 맴돕니다.” 

1993년 설립된 용인 양로원이 2010년 용인노인전문요양원으로 다시 개원했다.
2008년 개원한 파라밀요양병원
각현 스님은 2008년 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12월 12일 기공식을 갖는 베트남 ‘세종학당’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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