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사찰의 생태적 전통과 지혜 (1)

깨달음은 모든 생명 행복 찾는일
불교는 숲과 나무의 종교
내셔날 트러스트 통해 산림지켜
총림… 숲속에 모인 수행자 지칭

젊은 싯다르타의 고뇌 : 모두 행복할 수 없을까
싯다르타 태자는 아버지 정반왕 (숫도다나왕)을 따라 들로 나가 농부들의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제(農耕祭)에 참여한다. 이때 태자는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며 쟁기질하는 농부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농부의 채찍을 맞으며 힘들게 밭을 가는 소를 보았고, 또한 그 소의 쟁기 끝에 파헤쳐진 꿈틀거리는 작은 벌레들을 보게 된다. 그 순간 새들이 날와 그 벌레를 쪼아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나무 아래 홀로 앉아 방금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되새기면서 “아아 가엾어라, 어찌하여 살아 있는 것들을 서로 죽이기를 거듭하는가?”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생명은 더불어 함께 행복할 수 없을까”를 고민하여 오랫동안 깊은 명상에 잠겼다. 예민한 싯다르타 태자의 고민은 결국 왕위를 버리고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고, 6년간의 고행 끝에 보리수나무 아래서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셨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이처럼, ‘모든 생명이 더불어 행복하기 위한’ 생명에 대한 고뇌에서 시작된 것이다.

신라의 혜통스님은 출가하기 전 집 근처의 수달한마리를 잡아 고기를 끓여먹고 그 뼈를 마당가에 버렸다가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 그 뼈는 보이지 않고 핏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를 따라가보니 전날 수달이 잡았던 그 근처 보금자리에 수달의 뼈가 고스란이 형체를 이루고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스님은 그 감동과 죄책감으로 뒤에 출가를 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출가전 전북완주의 집에서 살면서 사냥을 나갔다가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두고는 그것 잊고 집에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그곳으로 사냥을 가서 그때까지 버들가지에 꽂힌 채 발버둥치며 살아 울고 있는 개구리를 보고, 죄책감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뇌하다가 결국 출가를 하셨다 깨달음의 세계는 결국 모든 생명이 어떻게 함께 행복할 수 있는가를 찾는 길인 것이다.

▲ 불교는 숲과 나무의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의 중흥은 산림의 중흥과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은 2005년 아스팔트 길을 깨고 흙길로 만들어 더욱 아름다워진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스님들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
나무와 숲의 종교인 불교
불교는 숲과 나무의 종교이다. 부처님은 룸비니 숲의 무우수(無憂樹 아쇼카나무) 나무아래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보리수(菩提樹-피팔라나무) 아래서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리고 녹야원(鹿野苑 사르나트)숲에서 최초로 설법을 하셨고, 쿠시나가라 숲속 두 그루의 사라수(沙羅樹)아래서 열반에 드셨다.

그리고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이 제공한 왕사성의 죽림정사라는 숲에서 제자들과 머물며 수행을 하셨다. 수행자들이 머무는 숲을 훼손하는 것은 삼보를 훼손하는 것과 같고, 초목, 숲, 산림, 강과 연못 (川澤)을 파괴하지 말라고 (니건자경)에 말씀하셨다.

또한 부처님은 기회가 있을때 마다 왕과 장자들에게 숲을 가꾸라고 권유하셨다. 한 신이 부처님에게 ‘누가 좋은 공덕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부처님은 ‘과일나무, 그늘나무, 꽃피는 나무를 심고, 공원(숲)을 만들고, 사원을 짓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불교의 계율을 적어놓은 사분율에는 ‘땅을 파지 말라. 살아있는 나무를 꺾지 말라’는 부처님의 당부가 실려있다.

산속에서 산을 지켜온 사찰
산중에는 반드시 사찰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토의 65%가 산인 이유도 있고, 산악신앙이 강했던 이유도 있었으며, 선불교가 들어와 구산선문을 열면서, 속세와 떨어진 산중에 수행처를 만들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가 혹독한 탄압을 받아 스님들은 한양의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평지사찰은 문을 닫고 결국 산중사찰만 남게 되었고, 결국 절은 산속으로 내 쫓기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스님들은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 위봉산성등 산성을 짓는데 동원되었고, 이를 지키고 유지하게 하는 역할로도 산중에 사찰이 있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신라말 도입된 풍수지리설의 산천비보설(山川碑補說)이라 하여 산은 국가의 존망성쇄와 직접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에 이름난 산에 사찰을 지어 산의 기를 지키고 허한 곳을 보강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쇠약하고 탁한 곳에 절을 세워 인위적으로 그 결함을 보강하기 위해 산에 많은 절을 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금강산, 비로봉, 반야봉, 문수봉 등, 우리나라의 산이름 모두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이 아닌 봉우리와 산이 없을 정도로 불교와 산과 숲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절이 없는 숲과 산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지만, 숲이 없는 절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일찍이 사찰이 벌려온 내셔널트러스트운동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트러스트운동(National Trust Movement)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모금을 통해 보존할 만한 자연과 문화유산을 아예 사들여 영구보존하는 운동이다. 영국은 국토의 1.5%, 그리고 해안선의 17%를 내셔널트러스트운동으로 보호하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이미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아주 뜻있는 환경운동이다.

우리나라는 국토면적의 산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많고 그중 많은 부분은 사찰의 소유의 토지이다. 근대에 들어 도심근처의 사찰부지는 이미 정부나 기업에 매각되어 개발되었지만, 산업화 이후에도 국립공원이 이렇게나마 잘 보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넒은 사찰림과 주변의 숲과 나무, 산을 소유하고, 이를 깨달음과 수행의 도량으로 지키고 가꿔온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바로 불교는 이미 실질적인 내셔날 트러스트운동을 통해 산림을 지켜온 것이다. 특별한 예로는 속리산의 오리숲은 법주사가 지켜내었고, 오대산 전나무숲은 월정사와 상원사가 아니었더라면 그야말로 무주공산(주인없는 빈산)이 되어 땔감으로 없어지거나, 일제때 전쟁물자로 무지막지한 벌목을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사찰은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는 금산(禁山)과 특정한 용도의 임산물을 채취할 목적으로 사찰이 특별 관리하는 산인 봉산(封山)의 책임을 맡겨졌다. 그래서 원주 치악산 구룡사는 왕실의 건축재와 목관재료인 금강송을 내는 황장봉산 관리를, 통영의 벽방산 안정사는 다식과 약재의 원료인 송화가루를 내는 송화봉산 관리를, 하동의 지리산 연곡사는 신주목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내는 율목봉산의 관리를 맡았다.

숲을 지키고 가꾸는 숲 전문가 수행자들
속세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는 것을 출가(出家))라고도 하지만, 입산(入山)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선원, 강원, 율원이 모두 있는 큰 절을 총림(叢林)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해인사의 해인총림, 송광사의 조계총림, 통도사의 영축총림, 수덕사의 덕숭총림, 백양사의 고불총림 등 ‘숲속에 모인 수행자 집단’을 일컫는 말이되었다.

신라의 의상대사가 심었다는 경북 울진 성류굴의 96호 천연기념물 굴참나무, 지나가던 큰 스님이 샘에 목을 축인 뒤에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자라 지금 1천년에 이른 원주 문막읍 반계리의 은행나무, 이천의 반룡송, 정선 정암사의 주목, 영주 부석사의 선비화, 승주 송광사 천자암 쌍향수,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 등은 바로 나무와 숲과 어우러 함께 해온 숲의 역사이자 불교의 역사인 것이다.

옛날 지나가던 어떤 눈맑은 스님의 가르침으로 조성되었다는 남원 서어나무숲은 지금도 찬 북풍을 막아주고 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주는 풍수비보숲이며, 청주 병암리 개울가에 소복의 원귀가 해마다 젊은이들을 데려가자 한 스님이 나타나 그 개울가에 버드나무를 심으라고 가르쳐주어, 나무를 심은 뒤부터 다시 평안을 찾게 되었고, 이 숲은 지금도 홍수로 마을사람을 지켜준 제방림이 된 것이다.

그리고 백양사의 비자나무숲은 천연기념물 153호로 비자나무가 구충선분이 있어 1970년까지 스님들이 열매를 거둬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또한 고성의 벽방산 안정사 소나무숲은 당시 세도가가 이 숲을 빼앗으려하다가, 주지스님이 8년간 한양을 오르내리며 결국 고종황제로부터 금송패 3개를 받아 이 소나무를 지켜냈다.

이뿐 아니라 다솔사 소나무숲은 이곳이 장군혈 명당임을 알고 빼앗으려는 세도가로부터 온갖 노력을 통해 결국 지켜낸 일화가 있으며,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 군락, 영광 불갑사 참식나무 군락, 백양사 극락보전 뒤 야생차와 비자나무 군락, 고창 선운사와 구례 화엄사의 동백나무 숲 등은 절집의 불이 산불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스님들이 조성한 방화림이었다.

그리고 절에는 산감(山監)이라는 산림감시원을 두어 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고, 산짐승들을 보호하는 등, 산과 숲을 관리 감독하는 소임을 대중스님들이 돌아가면서 맡았다. 그래서 땔감이 없던 시절 무분별한 화목과 벌채를 막고, 산판(山坂)으로부터 산과 숲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 환경을 지켜내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시에는 산림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생들을 한 스님들의 행장을 보여주고 있다.

“…산에 솔 기르기 그 얼마나 애 썼던가  
스님 상좌 할 것없이 성심 성의 가꿨어라
땔나무 아끼느라 찬밥으로 끼니하고
골골마다 순찰돌며 새벽종을 울리었네
고을 성안 초부들도 감히 얼씬이나 하였으랴
시골 농민 도끼야 얼씬이나 하였으랴…”

비자나무숲은 스님들이 심고 가꾼 것이 많아, 조선시대들어 왕실에서 사찰에 비자나무 공출이 심했고, 관리들의 수탈도 심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실린 ‘승발송행(僧拔松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오늘 아침 관의 공문으로 비자나무를 바치라 하니 이 나무까지도 뽑아 버리고 절문을 닫아야 지요”라고 하였을 정도이다.

그리고 용성스님이 망월사에서 1925년 만일참선결사를 시작한뒤 대중들이 점차 늘어나자 식량걱정보다 땔감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산중임해(山中林海)에 살면서 함부로 나무를 베어쓸수 없다하고는 대중을 거느리고 통도사 내원암으로 내려가셨다. 지금 도봉산의 많은 노송들은 용성큰스님의 큰 자비심의 은덕으로 살아남은 나무들인 것이다. 불교의 중흥은 산림의 중흥과 맞닿아있다. 뒤집어 말해 풍요로운 산림은 불교의 중흥과 연결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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