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봉 스님과의 담론 회상

1815년 겨울, 학림암에서 법거량을 나눴던 해붕스님(?~1826)을 끝내 잊지 못했던 추사였다. 해붕의 큰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던 그는 학림암의 일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회상했다. 초의스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에는 해붕에 대한 그리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산중에서 하루 밤을 묵으니 마치 제유(諸有)를 벗어나 삼매에 들어 간 듯합니다. 다만 몽중의 망설이 많아서 스님들에게 괴이하고 무능함을 보였으니 산이 조롱하고 숲이 꾸짖을 일은 아닌지요. 곧 스님의 편지를 받고 보니 끊어지지 않는 인연이 이어진듯하여 기쁘기도 하고, 또 기려집니다. 해 스님의 한결같은 맑고 아름다운 마음은 질박한 마음에서 생긴 정이니 끊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속인의 속된 일은 옛일에서 이어진 것이니 노스님의 마음(梵聽)에 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염주를 이 인편에 보냅니다. 원래 (이 염주는)42 알로 만들어 42장경의 숫자에 맞춘 것입니다만 두 개가 깨져 한스럽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一宿山中 若可以超諸有入三昧 第夢中妄說多 爲師輩見怪能無 山嘲林誚否 卽枉梵椷可續未了之緣 且欣且頌 海師一味淸旺 結成情根 不可斷除也 俗人塵事 依舊相仍 無足爲累於梵聽也 珠串玆以奉呈 而原爲四十二顆 以應四十二章之數 二則見壞可恨 奈何)

 

이 편지는 추사의 <<완당전집>>에 수록된 <여초의(與草衣)>38신 중 제 1신이다. 이 편지가 어느 시기에 초의에게 보내진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해붕스님과의 공각(空覺)의 능소생(能所生)을 담론했던 사실이 추사의 회상을 통해 이 편지에 드러나므로, 대략 1816년경에 쓴 편지라 여겨진다. 이는 그가 ‘산중에서 하루 밤을 묵으니 마치 제유(諸有:중생의 과보)를 벗어나 삼매에 들어간 듯’하다고 말한 점이나 ‘몽중의 망설이 많아서 스님에게 괴이하고 무능함을 보였다’는 것을 통해 학림암의 옛일을 회고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그의 망설은 ‘산이 조롱하고, 숲이 꾸짖을 일’이었다고 했다. 추사의 호기(浩氣)야 해붕이 그에게 써준 일갈로 이미 참패되었던 것. ‘해붕스님의 한결 같은 맑고 아름다운 마음은 질박한 마음에서 생긴 정’이어서 끊을 수가 없다는 것이 추사의 진심이었으니 해붕에 대한 추사의 존경심은 이 행간에 오롯이 배어난다. 후일 추사가 <해붕대사화상찬(海鵬大師畵像贊)>을 쓴 것은 이날의 인연 때문이었다. 특히 그가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눈이 가늘고 검어서 푸른 눈동자가 사람을 꿰뚫어 보는 해붕의 모습이다. 비록 (그가) 재가 되었지만 푸른 눈동자는 오히려 살아있다(尙記鵬 眼細而點瞳碧射人 雖火滅灰寒 瞳碧尙存)’고 한 것에서 추사에게 각인된 해붕의 첫 인상은 이처럼 강인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더욱 눈에 띠는 것은 추사가 불교의 초기 경전인 42장경에 맞추어 42알로 만든 염주를 초의에게 보냈다는 사실이다. 아마 수정으로 만든 귀한 염주가 아니었을까 짐작되는데, 불경에 대한 추사의 관심을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추사가 ‘곧 스님의 편지를 받고 보니 끊어지지 않는 인연이 이어진듯하여 기쁘기도 하고, 또 기려집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음이 확인된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야 추사의 문집이나 최근에 발굴된 추사의 편지첩을 통해 추사의 속내를 확인할 수 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초의가 보낸 편지는 지금까지 한 통도 발굴된 적이 없다. 소중한 친구와 나눈 중요한 사연을 일일이 기록해 별첩에 보관해두는 것이 사대부들의 정서였다는 점에서 추사 또한 초의의 편지를 함부로 방치하지는 않았을 터. 추사와 주고받던 초의의 편지는 어디에 비장되어 있는 것일까.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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