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다 마음의 조작이니 거기에 속지 마세요 [912호 10월 31일]

▲ 그림 최주현
 

왜 우리는 쉽게 놓고 가지 못할까요?

문)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감에 있어 일체가 공한 그 자리에 모두 놓고 가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행이 잘 안됩니다.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순간 놓지 못하고 한참을 그 맘에 붙들리고 있단 말입니다. 왜 우리는 쉽게 놓고 가지 못할까요?

답) 이 세상에 우리는 잠시 잠깐 캠핑 와서 놀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잠깐 놀다 가는 길에 그저 당장 쓸 거, 당장 먹을 거, 요것만 있으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거 먹고 떨어지는 법이 없어요. 더 낑겨 놓으려고 짊어지고 다니니까 무거워서 끽 소리 못하고 어떤 땐 어깨가 축 늘어지고 그냥, 뭐 부산을 향해야 할 텐데 짐이 무거워 갈 수가 없어서 그냥 찌부러져 죽거든요. 그러니 어떡합니까? 가다 말고 그냥 그것도 다 못 가져 가곤 그냥 죽거든요. 여러분이 그런 분들이 허다 많습니다. 세상에 아니, 100원 짊어지고 가려고 벌다가 단 50원도 못 벌고 그냥 부모가 죽어 버리거든요. 그 왜 그럽니까? 이 세상 게 전부 여러분 건데 왜 일부러 짊어지고 다녀요?

그래서 점점 우리는 이 마음의 계발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다 그 보배가 주어져 있습니다. 근데 그 보배를 자기가 쓰지 못해서 걱정이죠. 왜 그것을 쓰지 못하느냐 하면, 우리가 지금 그냥 놓고 버리고 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하나 버리고 나투면서 고정되지 않는 그러한 관념 속에서 그냥 관념 없이 무심으로 돌아가는데, 놓고 돌아가는데도, 자기네들이 그렇게 하면서도 여러분의 욕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를 납득을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납득을 못하니까 자기가 한다고, ‘어저께는 이렇게 이렇게 했고, 오늘은 이렇게 이렇게 하고, 내일은 이렇게 이렇게 할 거라고….’ 그러고 또 ‘내가 했다’고 하고. 모든 것을 ‘나, 나, 나, 나’ 하는데 말입니다, 나는 달팽이 껍질과 같은 겁니다. 내가 한 게 아니에요. 알고 보면 내가 한 게 아니라 달팽이 껍질 속에 달팽이, 달팽이 그 속에 참마음이 있어요. 그 마음이, 자기가 찰나찰나 나투며 화해서 돌아가는 그 이치를 우리가 안다면 공했다는 겁니다.

공해서 돌아가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하루에 아침에 일어나서 눈 뜨고 감은 것도 내내 고정되게 있는 것도 아니고 뜬 것도 고정되게 있는 것도 아니고, 앉아 있는 것도 고정되게 있는 것도 아니고 서 있는 것도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듣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전부 고정되지 않고 한 찰나예요, 한 찰나! 우리 살아나가는 게.

한 찰나인데도 불구하고 그저 몇십 년도, 몇 년도 이걸 거론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때는 앞으로, 미래로 성큼 넘어서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뒤로 자꾸 밀려나는 겁니다. ‘과거에는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살았는데, 과거에는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하고 말입니다. 무슨 그게 뭐 말라빠져 죽은 겁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잠재의식 속에 자기가 살던 그 습이 거기에 그냥 똘똘 뭉쳐 있고 뭉쳐 있고, 그래서 그게 업이 되는 줄 모르고, 그것이 지끄럭지가 돼서 자기를 자꾸 막아 가는 줄은 모르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니 한 발 한 발 딛고 여러분이 방 안으로 들어설 때 신발을 벗어 놓는데 벗어 놓는다는 생각도 없이 신발을 그냥 무심으로 벗어 놓지 않습니까. 그게 금이라면, 그게 보석이라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벗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신발은 그냥 그다지 뭐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무심으로 벗어 놓는 겁니다. 만약에 금을 끼고 왔다면, 금을 신고 왔다면, 금신이라면 어이구, 그걸 끼고 들어오지 저기다가 벗어 놓고 들어올 리가 없죠. 그런데 그게 하치않기 때문에 그렇게 벗어 놓는 겁니다. 그거 하나 잃어버리면 집안이 망한다 이런 지경이라면 그거 안 벗어 놓을 겁니다. 그와 같이 그렇게 무심코 벗어 놓을 수 있는 것이 그냥 우리 지금 살림이며 참선이며 생활입니다.

그리고 방 문지방을 뛰어넘을 때 뛰어넘는다는 생각 있이 뛰어넘습니까, 문지방을? 방 안이 만약에 이승이고 밖이 저승이라면 생각 있이 뛰어넘습니까? 좀 무심코 그렇게 뛰어넘어야 할 텐데 벌써 저승이라는 게 있고 이승이라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그렇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겁니다. 이 마음 놀음인데. 다 마음의 조작이에요, 이게. 근데 그 마음의 조작에 속는 거예요, 여러분은. 항상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그러니 백네 날 금강경을 달달달달 외우면 뭘 하며, 염불을 달달달달 외우면 뭐 하며 목탁을 백네 날 쳐 봤던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우리가 “얘, 너 이거 먹어라.” “너 이렇게 이렇게 해라.” 이게 바로 설법입니다. 그리고 또 손 하나 움죽거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이거 맛있다. 너 먹어라.” 이게 행이에요, 행! 이게 그대로 설법이자 행이고, 행이자 법이라 이겁니다. 그대로 참선이에요.

그런데도 여러분은 그렇게 가깝게 턱밑에다가 놓고도, 그렇게 모두 여러분이 무심으로 한 발 떼어 놓으면서 뒷발자국은 없어지고 앞발자국은 떼어 놓지 않았으니 없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뭐가 그렇게 말이 많고 불법이 그렇게 가지 이파리, 이파리 수효대로 당체, 이게 같이 상봉을 할 수 없이 이파리 하나하나가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니 이거 불법이 어떻게 된 겁니까? 부처님께서 49년을 설해 놨어도, 그렇게 행으로 보여 줬어도, 나는 한마디도 안 했노라고 했어도 그 뜻을 모르니, 여러분이 어떻게 불제자라고 할 수 있으며 대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고등 동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스스로서, 무심으로 그렇게 문지방을 넘어서야겠다 하는 생각 없이 넘어서고, 똥을 눠야겠다 하는 생각 없이 똥마려우면 그냥 뛰어가서 누고 그러듯이, 또 걸레를 빨아서 누가 집어가려니 생각조차도 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심으로 갖다 놓듯이 금도 그렇게 무심으로 갖다 놓을 수 있으리만큼은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가고 싶습니다
문)
그동안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답) 어느 마음공부 하는 분이 그믐밤에 어디를 지나다가 고만 구덩이에 빠졌더랍니다. 덫에 걸린 거죠. 사람들이 짐승을 잡기 위해서 덫을 놨는데 고만 덫에 빠진 거예요. 덫에 빠졌는데 도대체 앞뒤가 막혀서 나올 수가 없어요, 하늘만 보이지. 그러니 거기를 어떻게 나와야 되겠습니까? 거기서 부처님을 찾아서, 그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찾아서 나를 건질 수 있겠습니까? 거기서 어떻게 해야만이 그 육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육의 구원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라는 게, 우리가 그것을 홀랑 발겨서 얘기할 수 없으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시고, 사람이 누구나가 다 어느 가정이든지 남편은 대들보고 여자는 그 서까래라고 봅시다. 그런데 모든 게 대들보다 서까래다 할 게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한 식구가 모여서 사는데 우리가 살면은 이 모습을 가지고 얼마나 살겠느냐? 그러니 우리가 재밌게 살고 할 말만 하고 살아도 다 못하고 사는데, 그래 할 말 안 할 말 다 악을 악을 쓰고 이 세상의 모두가 제가끔들 그냥 이것이 옳다고 주장을 하고 싸운다면 복이 들어오다가도 딱 나가버립니다. ‘이놈의 집에 들어갔다가는 내 맘이 상해서 못 살겠어.’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있는 이상에는 돈도 생명이 있는 거고 마음이 있어요, 내가 있는 반면에. 내가 없다면 그 돈도 아무것도 없는 거지만. 그러니까 돈도 그렇지만 사람도 마음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영향력과 지혜력, 판단력이 그렇게 부실한 사람들은 역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이겁니다. 돈의 구원도 못 받을 것이요, 돈도 나갈 것이요, 복이 다 나간다 이겁니다. 그런데 오는 것은 무엇이냐. 액이나, 즉 말하자면 인과응보나 유전성이나 또는 업보가 거기에 매달려서 끊어지질 않아요, 우환이. 그 마음에 따라서 그렇다 이겁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은 여러분 가정에 진짜로 우리가 이익이 될 수 있고 진짜로 우리가 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합니다. “저분은 만날 시시한 얘기만 해.” 그러지 마시고, 더러운 연못에서, 질척질척한 데서 연꽃이 핀다는 거, 그 말이 바로 그런 데서 있는 겁니다. 우리 가정에서 있는 것이지, 가정에서 조끄마한 내 한 티끌 같은 불에서 우주를 밝힐 수도 있고, 내 마음 하나에서 한 가정을 화목하게 만들 수도 있고, 복을 들어오게 할 수도 있고, 우환을 끊을 수도 있고, 세계를 조절할 수도 있고, 거기에서 교양, 지혜, 모든 판단이 나오는 겁니다, 한마음에서.

그러니 모두가 그 마음에 가설이 돼 가지고 저 태양이나 혹성이나 별성이나 모든, 이 물에나 해안이나 이 지상에나 산에서나, 이러한 데도 다 연결이 돼 있어요. 가설이 돼 있단 말입니다, 법망이. 그래서 우리 마음이 그렇게 가설이 돼 있는 대로 다 퍼지게 돼 있습니다. 잘해도 퍼지고 못해도 퍼지게 돼 있어요. 내가 아는 것을 부처가 아는 거니까. 내가 아는 것을 법망에서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애들한테도 모진 욕을 해서도 아니 되고, 불안을 일으켜도 아니 되고, 또는 모진 생각을 해서도 아니 되고, 미운 생각을 해서도 아니 되고, 증오라는 생각을 해서도 아니 되고, 모든 생각을 잘해야만이, 우리가 만약에 애를 낳는다 하더라도 기품이 있고 유유하고 이 세상에서 누구하고 바꿀 수 없는 그런 자식을 바로 낳을 수 있는 겁니다. 옛날에도 어린애를 배면은 “가운데 토막으로 먹어라.” “교도소에 가지 마라.” 뭐, 이렇게 저렇게 모든 걸 가렸습니다. 그것이 옛날 노인네들이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현실적이고 과학적이기도 하면서 너무나 지혜가 컸다고 봅니다. 이 마음이 그렇게 묘하게 돌아갈 수 있는 그런 근본 원리를 가졌기 때문에, 한생각이 그렇게 무섭고 한 증오가 그렇게 무섭고, 그 업보는 뭐 뭘로도 끊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지은 거는 마음으로 끊어야 한다 이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 겁을 거쳐 오면서 살던 그 습에 의해서 속지 마시고, 환상을 보고 속지 마시고, 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속지 마시고, 꿈이 나빠서 안되느니 되느니 이렇게 속지 마시고, 또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어떠한 문제든지 조용히 좋은 말로, 하다가도 안되면 딱 멈춰서, 말하지 말고 주인공에다 맡겨 놓는 그러한 사람이 되신다면 큰 소리가 영 없고 화목이 깃들어 오르고 복이 들어오고 공덕이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악쓰고 상 찌그리고 온통 욕하고 그러는 게 제일 싫거든요. 저는 그것이 참 사무칩니다. 옛날에 저는 어디 어디 다니면서 그런 걸 너무 많이 봐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참, 사람이 고등 동물이라면서 어찌 저렇게 마구….’ 하고 생각이 드는데 보면 그러다가도 또 살아요. 아, 이 생각을 하면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나 같으면 그냥 은 금이 쏟아진대도 저거 할 텐데 아, 그래도 그냥 칼로 물 베기다 이겁니다. 그러면은 칼로 물 베기는 좋은데, 그것을 다 놔버리고 칼로 물 베기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거는 잠재해 있습니다. 그게 잠재해 있으면서 차이고 차이고 잠기고 잠겼다가 나중엔 폭발이 됩니다, 또. 그러니 두고두고 있다가 또 폭발이 되고 두고두고 있다 더 모아 가지고 폭발을 시키고 그럽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아지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으니 여여하게 우리 생활 속에서 어떠한 문제가 속을 썩인다 하더라도, 속을 썩인들 얼마나 썩이겠습니까? 이 모습이 얼마나 간다고요. 예? 참 편안하게들 사십시오. 나는 그것을 원합니다. 한 생 이렇게 알뜰하게 관하고 정진하고 살아서, 세세생생을 우리가 보람 있게 참, 부처님의 자리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면서도 그 모습들이 다 나 아님이 없이 될 수 있다면, 당당하게 내가 지금 태어나려면 태어나고 죽으려면 죽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자유권을 가질 때 그 보람은 정말이지 눈부실 것입니다.

사과 깎아놓고 배 깎아놨으면
하나 뚝 찍어먹어버리면 그만이에요.
또 먹고 싶으면 또 먹고, 없으면 고만 두고.
그렇듯이 생활에 의해서 나한테 닥치는 대로
주인공에 몰락 넣어버리세요.
몰락, 그냥!
뛰어넘으란 말입니다.
뛰어넘으면 되는 거예요.

삼재라는 게 정말 있는 건지요
문)
어디에도 걸림 없이 살고 싶은데 그래도 막상 일이 잘 안 풀리면 이런저런 탓을 하게 됩니다. 요즘은 제가 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가 않아 아는 이에게 물어보니 삼재가 들어서 그렇다는데 삼재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요?

답) 여러분이 한 발 한 발 걷고 돌아가면서 생활을 할 때에 몇 가지 생각이나 하십니까? 생각도 많고 가지가지 일도 많고 참, 사람의 살림살이는 말도 많고 탈도 많지요. 저 별이 수효가 없듯이 인간의 살림살인 그렇게 갖가지로 고정됨이 없이 많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이게 마음은 체가 없는 겁니다. 삼재 들었으면 그걸 내놓으신다면 내가 톡톡 다 털어드리겠어요. 업보가 많으시다면 가져오세요, 내 털어드릴게. 병고 액난이 많다면 가져오세요, 털어드릴게. 구랑신이 들었다면 털어드릴게요. 그거 다섯 가지만 비유한대도 우리가 한마음이라는 거는 체가 없어서 한번 훌떡 넘어간다면 일초도 걸리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 삼재라든가 구랑신이나 업보라든가 병고 액난이 고렇게 고정되게 나에게만 딱 박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박혀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예 그 병고 액난을 다 겪어야 합니다. 팔자 운명을 다 겪어야 돼요. 삼재 팔난을 다 겪어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말입니다,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고정된 게 아닌 것이 공했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집에 걸어가실 때 고정되게 딱 서서 있었습니까, 구랑신이 들었다고? 또 병고 액난이 들었다고 거기 꼭 고대로 서서 있었습니까? 그냥 걸어갑니다. 그렇듯이 한 발짝 떼 놓으면 구랑신 그 한 구절이 훌떡 떼어 넘어집니다. 이게 바로 한생각에 그 구랑신이 그냥 떼 넘어진다는 겁니다. 은산철벽이라 그러는 것도 그 한생각에 달렸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한 발 떼어 놓을 때 그건 벌써 고정되지 않으니까 거기 닿지도 않아요. 구랑신이라는 이름조차도 없을 정도로 휘딱 뛰어넘었다. 또 한 발자국 뛰어넘었다. 그러니 벌써 한 발짝 뛰어넘었으니깐 뒤도 없지, 앞은 가지 않았으니 없지. 이거는 그저 발밑에 그냥 후딱후딱 후딱후딱 뛰어넘었으니 거기 무슨 팔자가 거기 붙으며, 삼재팔난이 거기 붙으며, 또는 구랑신이 거기 붙으며, 삼재가 붙겠습니까? 모두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린 겁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접시에다 갖은 과일을 다 깎아 놓고 포크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할 때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 포크냐, 이 과일이냐?” 하니까 “포크도 아니고 이 과일도 아니다.” 이렇게 됐습니다. 그러면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 데서 내가 먹고 싶을 때 탁 꽂아서 먹을 때, 내가 먹고 싶은 것 꽂을 겁니다, 아마. 여러 가지가 있다면. 그래 먹고 싶을 때에 먹었으면 됐지 않습니까? 바로 말로 형용할 수 없고 내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먹는 걸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냥 먹고 싶은 거, 이렇게 환경에 따라서 내 앞에 병고가 닥치면은 닥친 대로 그냥 그저 몰락 넣어 버리고, 태워버리고 마는 겁니다. 몰락 넣어 버리세요! 몰락, 그냥! 뛰어넘으란 말입니다. 뛰어넘으면 되는 거예요.

사과 깎아 놓고 배 깎아 놨으면 하나 뚝 찍어서 먹어 버리면 그만이에요. 그리고 또 배 먹고 싶으면 배 찍어 또 먹고. 그래서 또 과일이 없으면 고만 두고. 그렇듯이 생활에 의해서 나한테 닥치는 대로 놔 버려라 이겁니다. 용광로에 넣어 버리듯이 넣어 버리면, 놔 버리면은 그것이 바로 공부가 참 진실하게 돼서 앞으로의 참나에게 그 무궁무진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렇게 참 어려운 여건에 닥쳤을 때에 아까 얘기했듯이, 내 앞에 과일이 닥쳤으니깐 먹어야지 어쩝니까. 그렇지 않아요? 또 내 앞에 우환이 닥쳤으니 우환을 없애야죠? 내 앞에 어떠한 고난이 생겼으면 그걸 해결해야죠. 여러분이 이 마음 도리를 깨달았다 깨닫지 못했다 이걸 떠나서 진실히 자기를 믿고 자기한테다가 모든 걸 맡겨서 ‘모든 거를 여기서 할 수가 있으니까.’ 하고 믿고 놓기만 한다면 그거는 뭐든지 실험을 통해서 여러분이 체험을 해 볼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조그만 거 큰 거 따지지 말고 체험을 자꾸자꾸 실험을 통해서 해 보세요. 그럼 앞으로도 어떠한 문제들도 다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낚시를 하고는 도로 놔줬는데…

문) 저는 취미 생활이 낚시하는 거예요. 고요히 앉아 있으면 명상도 잘되는 것 같거든요. 근데 얼마 전부터 낚시를 하고는 미안해서 도로 놔줬답니다. 그게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사람은 어디까지나 그때의 용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주어지는 대로 자기 그 지혜로운 마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합니다. 차라리 놔 주려면 낚시질을 곧은 낚시를 넣어요. 그러지 아니, 왜 꼬부라진 걸 넣어 가지고선 그렇게 애를 씁니까? 사람이 명상을 하려면은 곧은 낚시를 넣고 명상을 하지, 왜 자기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가지고 그러냐 이겁니다.

또 한 가지는 그 고기가 만약에 몸을 벗고 갈 때가 되지 못했을 때 여러분이 잡아다가 몸을 죽인다면, 바로 그 몸 벗을 때까지의 기간이 있을 때 그 원성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또 만약에 스스로서 이것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될 때, 이랬을 때는 때가 됐는지 안됐는지 몰라도 그대로 그것은 둘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여러분이 이 자기 심성을 쥐고, 공부를 안 하는 사람 같으면 별 문젠데 하고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살은 내 살이 되고 그 마음은 내 마음이 되기 때문에 그대로 그냥 요리가 되는 거죠. 자기가 된 겁니다. 금방 그 자리에서 자기를 만들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문제는 일부러 잡아서 일부러 놔 준 것이 되기 때문에 그건 어폐가 있죠.

그러나 일부러 잡은 게 아닌, 어쩔 수없이 부모를 보양하기 위해서 그 잉어를 잡았다거나 고았다거나 이런 문제가 있을 때, 또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약으로 쓴다거나 이래서 죽였을 때, 이런 때는 그냥 제창 자기로 둘이 아니게끔 요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마음 도리를 바르게 아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