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주인공에 몽땅 놓아야 합니다

 

▲ 그림 최주현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다 그렇듯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 그 과정이 쉴 사이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헤어졌다 또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음과 마음, 말과 말, 뜻과 뜻으로 이어져서 쉴 사이 없이 끊임없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여러분은 자기 몸뚱이와 사는 가정, 요 범위 내에서만 생각하시겠지만 마음공부를 하려면 좀 마음을 넓혀서 지혜롭게 엮어 가도록 노력을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스님은 만날 주인공에 놓으라고만 하신다.” 이렇게 말들을 하시겠죠.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니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리가 있죠. 이 지구가 돌아갈 때도 쉴 사이 없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입니다, 거꾸로 섰다 바로 섰다 하고 돌아갑니다. 거꾸로 돼도 바로요 바로 돼도 거꾸로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가 “거꾸로가 바로냐, 바로가 거꾸로냐?” 하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발로 딛고 서서 다니는 것이 바로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동적으로 머리가 땅으로, 또 발이 위로 이렇게 쉴 사이 없이 돌아가곤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발이 땅에 붙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붙기 때문에 여전히 쉴 사이 없이 돌아갈 수 있겠죠.

그런데 거꾸로도 아니고 바로도 아닌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거꾸로라고도 할 수 있고 바로라고도 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르든지 옳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 자체는 자유스럽고 걸리는 데가 없는데 생각하기에 따라서 걸릴 수도 있고 걸리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쓰는 데 있어서 어떻게 생각을 하든지, 어떻게 생각을 했든지, 어떻게 생각을 해서 말을 했든지, 어떻게 생각을 해서 행동을 했든지 걸림이 없이 돌아가야 하겠죠.
또 한 가지는, 또 비교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차를 타고 다니시죠? 만약에 내가 시발점에서 버스를 탄다면 타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탈 때 내리는 사람도 있고 내가 내릴 때 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동시에 내리고 타고 하는데 말입니다. 동시에 내리고 타고 하는데 항상 내리는 게 걸리지 않으면 타는 게 걸리고, 타는 게 걸리지 않으면 내리는 게 걸립니다. 그런데 자동적이지 않습니까? 자동적으로 내리고 타는 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상대성의 원리라고도 하구요. 정맥 동맥이 없으면 이어서 돌아갈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럼 자동적으로 내리고 타고 하는데 그 가운데에 누가 내리고 타고 할 수 있게끔 마음을 가졌느냐는 얘깁니다. 그 마음은 어디까지나 자유스럽습니다. 여러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했고, 자유롭게 행하고 삶을 살 수 있게끔 돼서 사람이라 그런 겁니다. 사람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 체가 없는 마음을 맘대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유스러운 자기 마음들을 가지고도 자유스럽게 못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습에 매달리고 안된다는 데 매달리고 된다는 데 매달리고…. 얼른 쉽게 말해서 차를 타는 데도 매달리고 내리는 데도 그냥 저절로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왜 끄달립니까? 내가 갈 데 있으면 묵묵히 타는 거고 또 내려야 할 때 묵묵히 내리면 되고 이러는 거지 밖에 참섭 안에 참섭, 이거 내리는 거 저거 내리는 거, 남이 내리는 거 오르는 거 다 참섭하면서 온통 걸리고 돌아가니 마음을 자유스럽게 쓸 수 있겠습니까? 내 육체를 여래의 집으로 삼고 그 한마음의 심봉은 자유스러운 겁니다. 자유스러운 건데도 여러분은 생각하는 대로 여기 매달리고 저기 매달리고 끄달립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끄달리는 겁니다. 그런데 되는 것만 귀중하고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안되는 것은 ‘이게 또 안되는구나!’ 이렇게 걸리는 겁니다.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유스런 자기 마음을 가지고도
자유스럽게 못 쓰고 있습니다.
내가 갈 데 있으면 묵묵히 타는 거고
또 내려야 할 때 묵묵히 내리면 되고 이러는 거지
밖에 참섭 안에 참섭,
남이 내리는 거 오르는 거 다 참섭하면서 온통 걸리고 돌아가니
마음을 자유스럽게 쓸 수 있겠습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어저께 밤에 주무시고 오셨죠? 오늘 낮에 하루 일을 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하루 살기 위해서 밤에 잘 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모두들 잤습니다. 그런데 밤과 낮이 어디 마음으로 볼 때는 둘이겠습니까? 묘한 점은 낮에 여러분이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한 것이 그대로 반영되고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밤에 잘 때는 육신을, 집을 팽개치고 그 의식들이 나가서 온통 자기가 생각하고 행하고 말한 대로 움죽거리고 돌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을 안 저지르게 생각을 했다면 안 저지르게 행동을 하는 것이고, 저지르게 생각을 했다면 저지르게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또한 잘 때는 육신을 내버리고 하니까 제한도 되지 않습니다. 낮에 입력이 된 대로 털구멍을 통해 나가서 활약을 하는 거죠. 나쁘게 생각했다면 나쁘게 모든 걸 이어서 가져오게 만들고, 좋게 생각을 했다면 좋게 인연을 맺어서 가져오게 만들고, 화가 나지 않게 모든 걸 거기 놓고 갔다면 밤에 잘 적에도 바로 화가 나지 않게 수습을 하고, 이렇게 항상 내가 하는 대로 원숭이처럼 쫓아간단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말하고 내가 행동하는 대로 입력이 돼서 원숭이처럼 그냥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밤이 따로 있고 낮이 따로 있다고 하겠습니까? 또 정신이 따로 있고 육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수년을 두고 항상 이 말씀을 드려 왔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공부를 왜 하라고 그러느냐? 마음공부를 안 하면 무명을 벗어나지 못해서 악의 무명 속에서 허덕거리고 있다가 그 차원에 의해서 또 모습을 형성시켜서 가지고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근데 그 모습이 사람의 육신만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여러 모습을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가지고 나오게 돼 있으니 이 공부를 안 하고 되겠습니까?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여래천에 들게 되면, 여래천이란 무엇인가? 일체제불의 마음이 한마음으로 구성된 국토다 이겁니다. 한마음으로 이어져서 모두가 일체 심봉으로서 뭉쳐진, 둘이 아닌 까닭에 여래라고 한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여러분 내면에, 육체 속에 많은 생명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한 몸이 여래의 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그 여래국에 모든 마음이 가설이 되고 직결이 돼서 돌아간다면, 얼른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아파서 ‘모든 거는 주인공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거기 놨을 때 한 찰나에 일체제불의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을 통해서 약사가 돼 주는 겁니다. 통신이 될 때에 두뇌로 인해서, 즉 누진으로 인해서 대뇌를 거쳐서 소뇌를 거쳐서 중뇌에서 결정을 내려서 사대로 통신을 합니다. 사대로 통신을 하면 사대의 모든 생명들이 작업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심오한 겁니다. 그리고 이 몸을 벗는다 하더라도 한 찰나에 부처님 국토에 한마음으로서 구성되면서 이 세상에 다시 출현을 할 때는 지금 시쳇말로 아주 유능한 사람으로서, 손꼽히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될 수 있고요.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으로서 등장을 하죠.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은 한마음 부처님 여래천에 모두가 직결이 돼 있기 때문에 살아나가는 데도 군더더기 붙지 않고 여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재력과 능력과 창조력을 가지고 나오는 거죠.

천차만별의 생명들이고 천차만별의 모습들이고 천차만별의 마음 씀씀이를 가지고 차원대로 가고 있는데 왜 스님은 별나게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놓으라고 하느냐 그러겠죠? 어디 길을 지나가다 분수를 보셨습니까? 분수요. 분수에서 물이 나오는데 말입니다, 묵은 물이 겉으로 나오고 겉의 물이 묵은 물이 되고 이렇게 한군데로 나와서 한군데에서 흩어지면 흩어지는 대로 또 모여서 거길 통해서 또 나오죠? 통하는 데는 한군데밖에 없어요. 들어가고 나오는 구멍이 한군데밖에는 없어요. 거기를 거치지 않으면 일체 모두가 이어지지 않아요. 안 그렇습니까? 그래도 아리송합니까? 허허허.
팔만대장경이란 어떤 것인가? 우주 천하, 세상천지에 천차만별의 만물만생이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팔만대장경이에요. 그러니 지금 팔만대장경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좋은 말씀을 해 놓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때의 그 시절에 맞는 용어를 썼기 때문에 지금 살아가는 분들이 이 시점에서는 그 용어를 알 수가 없고 감지가 되지 않아요. 시대가 변경되고 모두가 발전이 되기 때문에, 변해 가기 때문에 변하는 대로 용어는 바뀌게 돼 있죠. 뜻은 다 똑같은데 용어는 바뀌게 돼 있죠.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세요. 옛날에는 박으로 바가지를 만들어서 써야 했었는데 지금은 플라스틱 바가지를 만들어서 쓰고 있고요. 일체가 다 개선이 되고 변화가 되고 용어가 바뀌고 이랬습니다. 그러니 그 뜻은 그대로 하되 그 용어는 바꾸고 개선해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될 일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때로는 경에 있는 말씀은 안 하고 부처님 말씀은 안 하고 만날 이런 말만 한다고 그러실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이 따로 있나요? 부처님께서도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내 몸같이 생각하고 바로 내 자리처럼 둘로 보지 않으시면서 여러분 모두를 이끌어 가고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말도 서슴지 않고 방편을 쓰셨죠. 그러니 나를 말 잘하는 앵무새로 만들지 마시고, 될 수 있으면 말이 말로 떨어져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말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마음으로 새겨서 받아들이셔서 현 생활에 적합하고 이익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쓸 수 있는 그런 금덩어리가 되십시오. 금덩어리도 잘 만들어서 자꾸 생산을 해내야 빛이 나지요. 금덩어리 그대로 두면 빛이 나질 않아요. 그러니까 항상 분수처럼 그렇게 올라왔다 내려갔다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고 돌아가듯 말입니다.

아까 얘기했죠. 잘되는 것도 주인공에다 놓고 안되는 것도 주인공에다 놓으라고요. 시발점 종점으로만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타는 시발점에서도 내리는 사람이 있고 내가 내리는 종점에서도 또 시발점으로서 타는 사람이 있고, 동시에 타고 내리는데 어떠한 것을 안된다 된다 이런 말로 소홀히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안되는 것도 되는 것도 다 법입니다. 그러니까 안되는 것은 나의 뜻을 보기 위해서 안되는 것이니까 나를 아주 튼튼하게 반석처럼 가르치기 위한 테스트라고 생각하고 그걸 재료로 생각하신다면 너무나 감사하고 또 믿고 거기다 놓을 수 있습니다. 또 되는 거는 되는 거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우리가 타는 것만 법이고 내리는 것은 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여러분 생명을 유지하고 나갑니까.
일체가 다 그러하니 여러분의 체가 없는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안되는 건 안된다고 야단입니다. 내릴 때는 내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부득부득 타고만 간다면 그건 또 잘못되는 일이죠. 그러니 타는 것도 내리는 것도 둘이 아니니 그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내 마음이로구나. 그 마음이란 놈이 얼마나 묘하고 광대무변한지 모릅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바로 마음을 마음대로 할 때에 비로소 만물의 영장이면서 바로 자유인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죠. 여래라고 하는 것도 여래불이라고 하는 것도 이름일 뿐이에요. 모두가 한데 이어져서 돌아가는 둘 아닌 도리를 깨친 분이 바로 여래니까요. 한마디만 더 하고 여러분의 애고를 좀 들어 봅시다.

아까 얘기했죠? 내 자성불, 즉 내 주처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 놓으라고요. 이것이 자가발전소입니다. 내 주처에다가 놓으면 바로 통신이 돼 가지고 일체제불의 국토에서 여기 내 마음을 통해서 한 찰나에 바로 한마음이 돼 준다 이겁니다. 그래서 아프면 약사가 돼 주고, 어려우면 관세음이 돼 주고, 좋은 데로 못 가면 지장이 돼 주고, 명이 짧으면 칠성이 돼 주고, 물에 들어가서 어려우면 용신이 돼 주고, 길을 걸을 땐 지신이 돼 줍니다. 여러분이 아프거나 애고가 있거나 어떠한 문제가 있든지 다 그렇게 응해 줍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하나지 둘이 아니죠. 근데 그 부처님이라는 이름조차도 공해서 바로 ‘무(無)’ 했단 말입니다. 그 많은 분들의 마음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 바로 하나로 이어져서 돌아갑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러하죠. 마음을 넓혀서 보면 부모도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자식도 내 자식 아닌 게 없습니다. 물론 육신을 빌려서 내가 형성됐다면 우선권은 있겠죠. 그러니까 내 몸을 내가 거두지 못하는데 어떻게 육의 부모의 몸을 거두며, 육의 부모의 몸을 거두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회의 모든 것을 거둘 수 있겠습니까? 내 가정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화목을 도모하지도 못한다면 그냥 아들 딸 자식 부모 형제 모두 화목을 도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돌아가는 거기에 하나로 돼서 돌아가야, 마음을 붙들어야 육체를 붙들고 육체를 붙들어야 또 화목을 도모하고 화목을 도모해야 모든 게 공덕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내 말이 거짓말이라면 여러분이 한번 말씀해 보세요.

여러분이 태어나서 한 생을 살아가면서 이 모습 옷이 헐기 전에 이 도리를 알아야 다시 새 옷을 입고 나오는 것도 자유스럽게, 내가 입으려면 입고 말려면 말 수도 있고 어떤 옷이든 내가 선택해서 입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데도 그렇지 못하고 자기가 한 대로 자동적으로 무명에 갇혀서, 고기가 됐으면 어쩔 수 없이 고기 대접밖엔 못 받고 뭐 그렇지 않습니까. 개가 됐으면 개 대접밖엔 못 받을 거고 사람이면 사람 대접 받을 테죠. 그리고 사람도 행동 말 또는 뜻을 넓히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게 하면 사람 대접도 못 받죠. 그러니 모든 부처님, 깨달은 부처님들께서 여러분한테, 사람이 태어나면 이러이러하다고, 또 일체 만물만생이 살아나가는 게 동등하다고, 일체 생명이 둘이 아니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걸 모른 채 무슨 귀신이나 다루며 목탁이나 치고 머리 깎고 염불이나 하는 것이 스님인 줄 안다면 정말 어리석은 생각들일 겁니다.

오늘부터는 이렇게 간단하게 먼저 말씀드리고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할 분은 질문하시고 애고가 있는 분들은 애고를 말씀하시고 또 감사한 일이 있으면 감사한 내용을 말씀하시고요. 이렇게 항상 세 가지로 나누어서 그 자리를 지킬 겁니다. 그러니 말씀하실 때는 용건만 간단하게 얘기하십시오.
감사함을 말씀하시라는 거는 여러분이 자기 마음을 가지고도 자기 주처를 믿지 못하고…, 저 나무로 예를 든다면 나무가 자기 뿌리에다가 마음을 기대야 할 텐데 딴 뿌리에다가 기대고 있어요. 저 나무가 딴 나무에다 기대고 있으니 그게 생전 공덕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익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내 나무는 내 뿌리에서 모든 에너지를 흡수해서 나무 위로 올려보내야 나무가 푸르르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나무들이 모두 남의 나무만 쳐다보고 남의 나무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줄 알고 거기서 잘되게 해 달라 못되게 해 달라 온통 야단법석들을 하니 언제 자기는 발견하고, 언제 부처님 국토에 한마음으로 자리를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깊이깊이 생각하십시오. 천만 냥을 주고 만만 냥을 주고 이 세상을 다 떠 온대도 바꿀 수 없는 마음공부니까요.

내가 여러분한테 돈이나 받아서 잘살고 잘 입고 잘 먹고 그러려고, 이름이나 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 몸뚱이도 다 버렸습니다. 우리 다 그렇죠. 몸뚱이도 버릴지언대 가져갈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나 여러분이나 만약에 악업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업식이 다, 악업 선업이 자기 영혼에 부착이 돼서 그냥 그림자처럼 쫓아다닐 겁니다. 이 세상에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또 그 속에서 허덕이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발목이 붙들어매질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이 도리가 엄청난 도리라고 생각하시고 열심히 하세요. 이 공부를 못하면 아예 세세생생에 발을 빼지 못할 이런 문제들이 지금 압도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잘 생각하셔서 악업 업식 무명 속에서 벗어나서 세세생생에 자유인이 돼서 사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남): 큰스님, 감사합니다. 저는 심의회 회원으로서 현재 대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제가 질문드리려고 하는 내용을 이미 다 설해 주셨습니다만 다시 한 번 여쭤 보겠습니다.
죄업과 인과가 있다면 확실한 지금의 내 안에 있는 것으로써, 내 안에 선업과 악업이 잔뜩 실려 있으니 지금 크게 한생각을 일으켜서 진실로 놓아 버린다면 업의 테이프는 공테이프가 될 것이라고 『한마음 요전』에서 설하셨습니다. 이는 선업도 악업도 모두 쉬고 주인공에 믿고 맡겨 놓는 것이 재입력하는 작업이니 재입력하는 수행만 하라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가르침 바랍니다.
큰스님: 아까도 얘기했듯이 시발점에서 차를 탔으면 탔을 뿐이고 종점에서 내렸으면 내릴 뿐입니다. 마음의 주인이 육신을 끌고 타고 내리고 그랬을 뿐인데 그것을 집착해서 잔뜩 마음으로 껴안고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에 바로 업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거 한마디만 방편으로 했다 해서 그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사람 사는 것이 모두 다 그렇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여기 올라오실 때 발자국 짊어지고 오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틀림없이 오긴 왔는데 짊어지진 않았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러니까 일생살이를 다 그렇게 사십시오.
(다음 호에 계속)

[910호 10월 17일]

※위 법문은 1993년 10월 17일 국내지원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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