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대구 동화사(桐華寺)

운부암에서 지은 오도송
방부 거절한 금당에서 읊어
시봉도 알지 못한 29세 오도송
말년에 쪽지 한 장에 적어줘

황하서류곤륜정(黃河西流崑崙頂)
일월무광대지침(日月無光大地沈)
거연일소회수립(遽然一笑回首立)
청산의구백운중(靑山依舊白雲中)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으로 오르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린다. 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오도(悟道). 가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순간. 스스로의 증명이 전부인 세계. 스무 살 때, <증도가>에 무릎을 치고 ‘생사(生死)’에 뛰어든 ‘성철’이란 이름이 스물아홉에 스스로를 증명한 28자의 문자. 오도송이다. 스님은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이 오도송을 읽었다. 9월 22일 성철 큰스님 수행도량 순례단은 이른 아침 대구 동화사로 향했다.

성철 스님을 시봉했던 원택 스님이 금당선원 앞에서 스님의 오도송과 금당선원을 순례단에게 소개하고 있다.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493) 극달 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부르다가 흥덕왕 7년(832) 심지대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가 겨울에 상서롭게 꽃을 피웠다하여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 또 하나는 진표율사로부터 영심대사에게 전해진 팔간자를 심지대사가 받은 뒤 팔공산에 와서 이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으니 이곳이 바로 동화사 첨당 북쪽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창건설 가운데 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 대사가 중창한 시기를 사실상 창건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동화사는 창건 뒤 현재의 대가람으로 정비되기까지 여러 차례 중창과 개축이 있었다. 신라말인 934년 영조 선사, 고려 명종 20년(1190) 지눌 보조 국사, 고려 충렬왕 24년(1298) 홍진 국사에 의해 중창 중건되었다. 또 고려 말기에는 홍진 국사가 대규모 중창을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는 선조 39년(1606) 유정 사명대사, 숙종 3년(1677) 상숭 대사, 영조 8년(1732) 관허, 운구, 낙빈, 청월 대사 등이 중창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부암에서 깨달음을 얻은 성철 스님은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오도송을 읊었다. 금당선원 전경
담장 밑으로 코스모스가 피었다. 금당선원. 점심 공양을 마친 300여 명의 순례단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선원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원택 스님도 선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님이 이곳에서 오도송을 읊으셨습니다.” 선원 현판 앞에 선 원택 스님이 금당선원을 소개했다. 원택 스님이 쓴 성철 스님의 행장에서 가져다 쓴다. “은해사 운부암에서 하안거를 지냈다. 세존응화 2966년 7월 15일자로 발행된 안거증에는 종주가 하용봉, 즉 동산 스님으로 밝혀져 있다. 4월 1일 용성 스님이 입적하였다.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오도송을 읊었다. 스님의 친필 이력에는 동화사 금당이 아닌 운부암에서 안거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친필 오도송에는 ‘29세 금당에서’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이미 괴각이라고 소문이 나서 금당선원의 방부가 거절되었다고 한다. 오도 이후 장좌불와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안거를 은해사 운부암에서 났다. 운부암에서 단식 정진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평생의 선우인 향곡 스님을 운부암에서 처음 만났다.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읊고 나니 깨달음의 점검을 위해 제방에서 정진한다.” 순례단은 선원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스님의 흔적을 더듬었다.

성철 스님이 80세 때 원택 스님에게 적어준 오도송
통일대전에서 법회가 시작됐다. 원택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성철 스님이 여든이 되셨을 때였다. 원택 스님은 연로해진 성철 스님의 모습에 문득 걱정이 들어 조심스럽게 여쭈었다고 한다. “스님, 이제 서서히 가실 준비를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 “이놈! 가긴 어딜 가!” 그 때까지 원택 스님은 큰스님의 오도송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스님, 스님의 오도송을 도반이셨던 향곡 스님이 좋아하셨다는 말씀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정작 스님의 오도송을 알지 못하니 스님의 오도송을 정리해 주십시오.” 시봉의 간곡한 물음과 애절한 성화에 스님은 오도송을 정리한다. 노장은 앉은 자리에서 작은 수첩 한 장을 찢어 스물아홉에 지은 오도송을 적는다. ‘…동화사 금당, 29세.’ 원택 스님이 스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눈부신 한지에 빳빳한 붓글씨가 아니었다. 찢어낸 수첩 한 장. 한국불교 1600년 연보에서 근대에 가장 주목받으며, ‘깨달음’을 불러일으킨 스님의 오도송은 그렇게 전해졌다. 원택 스님이 말을 이었다. “스물아홉에 쓴 원본엔 운부암에서 쓰신 것으로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원본은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앞서 말한 행장대로다. 운부암에서 깨달음을 얻은 성철스님이 대중에게 오도송을 알린 곳은 동화사 금당이다.
원택 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순례단은 성철 스님의 법문을 독송하며 스물아홉의 스님과 만났다. “참다운 불공. 집집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부모님입니다. 내 집안에 계시는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 참 불공(佛供)입니다. 거리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잘 받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발밑에 기는 벌레가 부처님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벌레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성철 스님은 공부를 늦추지 않았다. 점검을 위해 각지의 제방과 선지식을 찾아 나선다. 스님은 먼저 조계산으로 향했다. 다음 순례는 10월 13일 조계산 송광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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