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식 불화장

“길상화 보살님에게도 절하라”
제게 ‘군더더기 없어 좋다’ 하셨으나
스님이 엄한 할아버지 같았다

금어·불모가 뭐냐? 물으신 뜻은
그뜻 되새겨 주시려는 방편 법문
길상사 극락전·지장전 탱화 조성

스님 책을 읽거나 법문 들은 적 없어
1993년 전승공예부문 대통령상 수상
불모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아
 

절집과 관계없는 이들도 절하면 고즈넉한 산사(山寺), 목탁소리, 풍경소리 그리고 범종소리를 떠올린다. 불자라 해도 법당 안에 들어서면 불상에 참배 할 뿐, 후불탱화나 신중탱화, 감로탱화는 무심히 스친다. 그러나 불상은 경배대상이지만, 이야기 주머니를 조곤조곤 풀어내는 탱화는 안도현 시인이 쓴 동화 〈연어〉에 나오는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를 떠올리게 한다.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는 일이다. // 별을 더욱 빛나게 하는 / 까만 하늘처럼 // 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 무딘 땅처럼” 물이 논에 들어 벼를 빛내고 산에 들어 나무를 빛내듯이 고려시대에는 귀족, 조선시대에는 민중을 빛냈다는 탱화. 요즘에는 어떤 빛을 품고 있을까. 불화장(佛畵匠) 김의식(54)선생을 만났다.

“조계사에서 불화 강의를 하고 있는데 청학 스님이 찾아와서 제 그림을 한 번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한테 처음 오신 게 아니라 몇 군데를 다녀오셨더라고요. 저희는 재주를 가지고 얘기하는데, 스님들은 다른 시선으로 봅니다. 청학 스님은 처음엔 불사를 할 절이 길상사란 얘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청학 스님은 누가 길상사하고 인연이 될 수 있을까를 이모저모 짚어보고 나서 김의식 선생에게 인연을 맺자고 하면서도 법정 스님 허락을 얻어야 한다면서, 법정 스님과 길상화 보살님이 큰마음을 내신 절이니. 사사로운 욕심은 뒤로 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넌지시 비쳤다.
선생이 길상사 극락전 탱화를 모시기로 결정을 하고 나서 법정 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길상화 보살도 함께 뵈었다. “법정 스님이 길상화 보살님한테도 절을 하라고 그러셔서 절을 올렸더니 보살님이 ‘아이고, 내가 살다가 불모(佛母)님 절을 다 받아보네.’ 그러셨어요. 어찌나 민망하던지. 덕조 스님이 자기는 스님하고 긴 얘기를 나눈 적은 별로 없다면서 저한테 스님하고 무슨 얘길 나누긴 하시나보죠? 그랬는데 별 얘기 없었어요. 스님께서 ‘어떻게 지내요?’ 하고 물으시면 저는 ‘덕분에 잘 지냅니다.’ 이런 정도. 제가 지은 죄가 많아 그런지 그 어른이 편하기보다는 엄한 할아버지 같았어요. 그랬어요. 엄한 할아버지가 손자 앉혀 놓고 ‘너, 탱화는 제대로 하고 있냐?’ 그런 느낌, 눈매가 날카롭고 무서웠어요. 별 말씀 없으셨지만 가슴에 가장 남는 말씀은, 바쁘게 살지 말고 쉬엄 쉬엄하라는 말씀이셨어요. 요즘도 그 뜻을 되짚어보곤 해요. 그런 말씀도 하셨어요. 사람이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다고. 제가 불교미술을 하면서 느낀 감정이나 불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아쉬움을 숨김없이 털어놓다보니까. 말을 돌려서 하거나 꾸미지 않는 사람으로는 보셨나봅니다.”
길상사 초기, 선생이 개설한 불화반 수업 때 법정 스님이 가끔 다녀가셨다. “조심스런 말씀이지만 주지 스님이나 다른 스님들은 고개도 넘석하지 않는데 법정 스님은 종종 들여다보셨어요. 그렇다고 티 나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살짝 다녀가시곤 했어요.” 어느 날 법정 스님이 선생에게 불교미술 하는 사람을 왜 금어(金魚)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태초에 인류가 생기기에 앞서, 물고기로 연원해 사람이 되었듯이, 우리 안에 불성을 일깨워 준 부처님 미소를 잘 드러내라는 뜻에서 금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라며 무척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그런가요?’ 그러셨는데 다음에 또 물어보세요. 불모가 뭐냐고. 그래서 옛날에는 탱화나, 단청, 불상조성까지 다 하는 분들을 불모라 했습니다만, 요즘은 세분화되어 불교미술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씀이라고 알고 있는데, 온 힘을 다 쏟아 부처님이야기를 잘 드러내라는 뜻을 담아 그리 부르지 않나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감히 그렇게 불리다니 늘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스님이 금어나 불모가 지닌 뜻을 몰랐다기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고고학자 김병모는 1961년 여름, 대학생 때 시조인 수로왕릉을 방문했다가 왕릉 대문에 그려진 물고기 한 쌍을 보고 강한 호기심을 느껴, 뿌리를 찾다가 가야·가락국 을 가리키는 가락(karak)은 고대인도 토착어인 구(舊) 드라비다 말로 물고기를 뜻하고, 가야(kaya)는 신(新) 드라비다 말로 물고기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거듭 짚어나가 쌍어신앙이 신석기시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싹터, 사람들 삶을 보호하는 신앙으로 발전 바빌로니아 시대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지중해로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로 퍼져나가는 한편 흑해를 근거지로 일어난 기마민족인 스키타이를 통해 중앙아시아 전역과 알타이 산악지대 유목민들에게 퍼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쌍어신앙은 지역 토착 신앙과 섞여 힌두교와 불교에도 스며들어 절집에서는 물고기가 석가모니를 보호하고, 몽골 사람들은 물고기가 사람들이 잘 사는지 또는 위험에 처했는지 살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호한다고 여겼다.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질병을 고치는 약을 생산하는 커다란 나무뿌리를 지키는 물고기 두 마리가 인류를 모든 질병에서 구해준다는 믿음을 가졌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쌍어는 왕릉과 부처님을 지키고, 절집 처마에 매달린 풍경으로, 목어(木魚)와 목탁(木鐸)으로 이어져 부처님을 외호하고 사부대중을 보듬는다. 그런 까닭으로 불교미술 조각과 탱화, 단청을 삼절이라 하고, 이를 모두 조성하는 장인을 금어나 불모라 하여 존중했으리라. 불교인을 불자라 하는데, 금어나 불모는 듣는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호칭이다. 그래서 선생은 금어나 불모라 불리기보다 그저 불화장으로 불리기 바란다.
“법정 스님께서는 당신이 늘 탱화를 봐 오셨던 바로는 채색은 혼란스러운 감이 있으니 좀 담백하고 깔끔하게 조성할 수 없느냐고 하셨어요. 그 어른 성품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먹 바탕에 금니로 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하자고 그러셔서 극락전 후불탱은 먹 바탕에 금니로 조성했습니다.” 길상사 불사를 총괄했던 최완수 선생은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 조성 당시를 이렇게 돌아본다. “후불탱은 채색이 원칙이죠. 화려하게 보이니까. 그런데 법정 스님은 홍탱(紅幀)이 단순하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나도 싫어하지만 법정 스님도 싫어하셨는데 사실 가장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거지요. 그래서 길상사 부처님도 도면에서 복잡한 걸 다 덜어내고 조각할 때 의식선이 복잡해 보이면 또 줄이고 줄여서 아주 단순하게 했어요. 요점정리를 해서 단순화시키는 게 우리 민족성이에요. 극락전 후불탱이 지금 검정색으로 되어 있지요? 법정 스님이 홍탱을 주문하셨는데 나중에 보니까 흑탱(黑幀)이야. 이상하게 법정 스님은 홍탱에 대한 애착이 있으셨어요. 지장전에서 기어이 홍탱을 했잖아요.” 이 말씀으로 보아 법정 스님은 붉은 바탕에 금니 탱화를 생각했으나, 장인 의견을 받아들여 검정 바탕에 금니로 조성한 듯하다. “먹 바탕에 금니로 조성하는 탱은 흔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금니로 하면 정갈하고 힘이 있지요. 청학스님이나 법정 스님도 제 선이 참 좋다고 그러셨어요. 그러니까 금니로 하라고 하셨을 겁니다. 법정 스님은 지장전, 지장시왕탱(地藏十王幀)을 조성할 때는 먹탱도 좋지만 이번에는 홍바탕에 금니로 해보자고 말씀하셨어요. 탱화를 하는데 이 절 다르고 저 절이 다르겠습니까마는 길상사는 두고두고 고맙지요. 뜻 깊은 도량에 솜씨를 남기다니 고맙기 그지없어요.” 꾸밈이 없다.
“눈 오는 날이었어요. 지장전 불사 때문에 연락 받고 길상사에 갔어요. 길상화 보살님 공덕비에 절이라도 올리려고 눈을 치우는데 웬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요. ‘절을 했느냐’고. 깜짝 놀라 뒤 돌아보니 법정 스님이 서 계셨어요. 스님을 뵈면 어려웠기에 얘기를 마치고 가야지 하고 꽁무니 뺄 생각밖에는 없었어요. 저는 법정 스님 법문을 들으러 간 적도 없습니다. 책도 읽지 않고. 여기 화실에도 스님 책이 더러 있습니다만 스님 책을 읽고 안 읽고는 스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과는 별개 같더라고요. 스님이 입적하셨을 때 뉴스를 듣고 길상사에 갔습니다. 행지실에 누워 계신 스님을 뵙고 내려와서 길상화 보살님 공덕비 앞에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었어요.” 선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스님 책이 여러 권 있지만 읽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래서 스님이 군더더기가 없어 좋다고 하셨을까?
길상사 지장전은 다른 절 지장전이나 명부전에서 느끼는 어둡고 칙칙한 구석이 없다. 지장보살상 뒤로 돌아가면 위패를 모시는 금바탕에 연록색이 어우러지는 연꽃으로 조성된 부처님 세계가 있다. 은근하고 맑은 연화장 세계. “순금 바탕은 처음이었어요. 영가를 모시는 곳이어서 너무 밝고 화사해도 부담스러울 테니 은은하면서도 화사하게 회화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습니다. 법정 스님께서도 처음에는 의구심을 가지셨어요. 순금을 바탕에 깐다는데 부담도 가지시고. 그래서 살짝 펴서 가뿐히 바르면 그다지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 된 다음에 스님이 편안하고 색다른 맛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칙칙한 느낌이 들거나 무서워서는 안 된다는 한 생각만 가지고 그렸지요.”
어릴 적 만화를 그리면서 화가를 꿈꾸던 소년 김의식.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이 힘들다고 여겼다. 중학교 졸업 무렵 ‘종교미술’을 배워 볼 의향이 없냐는 친구 편지를 받고 선뜻 서울행열차에 몸을 싣는다. 1975년. 광명 조인행 선생 제자로 들어가 종교미술을 만난다. 무속화를 세 해 남짓 하면서 마음 한켠에는 늘 미진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1978년 불교미술대전에 태성불교사가 출품한 탱화를 보고 가슴 벅차올랐던 의식은 단걸음에 태성불교사 박용심 사장을 찾았다. “참 인연이 묘하더라고요. 박용심 사장님을 찾아가서 ‘그림을 배우러왔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세상에도 탱화를 배우고 싶어 하는 별 희한한 놈도 다 있네. 그러면서 그림을 그린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며 박동수 선생에게 보냈어요. 박용심 사장님은 제게 늘 ‘촌놈, 촌놈!’ 그러셨어요. 박동수 선생 밑에서 밑그림 공부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박동수 선생은 불화가 예배 대상인 성보라는 점을 일깨워주셨어요.” 2년 동안 도제 수업을 받은 의식은 군 입대로 잠시 붓을 놓는다. 1983년 제대를 하고 나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불화 그리기를 놓지 않다가 동강 김익홍 선생을 만난다. “동강 선생은 불화 조성의 기초와 이론은 중시하셨는데, 오늘 이 시대 전통불교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이끌어주셨습니다.”
선생은 1990년 제13회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전에서 ‘천수천안관세음보살’로 대상을, 1993년 제18회 대한민국 전승공예 부문에서 대통령상을 받는다. 1995년 3월 ‘제1회 김의식 불교미술전’을 열어 불화장 세계를 펼치며 세상을 향해 성큼 나아간다. 그리고 2005년 〈그림으로 만나는 부처의 세계 탱화〉를 출간,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후학들 이정표가 된다.
탱화는 작가의 창작품이기에 앞서 예배대상에 출초와 채색 끝내림에서 서로 재주는 다르지만 여럿이 마음 모아 마치 한 사람이 작업한 듯이 한결같은 흐름을 보여야 하는 종합예술이다. 이를 이끄는 불모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화음을 이뤄야 한다. 중국 성지순례를 하던 선생은 베이징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석경산구 취미산 남록에 있는 법해사(法海寺)에 들렸을 때 대웅보전 안에 동, 서, 북쪽 벽을 가득 메운 돈황벽화와 쌍벽을 이룬다는 커다란 명대벽화를 보고 대뜸 “여럿이 했는데도 조화가 잘 맞았다”고 했다. 같이 간 일행 가운데 불화를 하는 동국대 교수가 “어떻게 여럿이 한 걸 아느냐?”고 되물었다. 선생은 “세필 다루는 사람들은 이렇게 큰 붓 못 다룹니다. 마음으로는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사람 능력은 그렇게 안 됩니다. 이 무늬는 솜씨가 조금 뒤집니다. 그리고 이를 세필한 사람은 이 새를 절대 치지 못합니다. 게다가 강한 철선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연꽃을 이렇게 못합니다. 딱딱해지기 때문에”라고 했다. 나중에 안내원에게 물으니 과연 1443년 황제 명을 받아 궁정화가인 왕복청, 왕서를 비롯한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화사(畵師) 열 다섯 사람이 모여 여섯 달이나 손발 맞춘 뒤에 3년 가까이 걸려 이룬 대작이라고 했다. 불화 가르치는 교수도 놓칠 만큼 호흡이 맞았다는 얘기인데, 수십 년 탱화를 해온 매서운 장인 눈매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서른 중반까지도 어디 가서 탱화 한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죄짓는 것 같아서. 제 아이한테도 평생하고 싶은 일,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이렇게 죄짓는 기분인지 모르겠다고 그랬어요. 탱화가 그렇게 만들더라고요. 사람을.” 그리워서 그림이라 했던가? 조심스럽게 존경하는 부처님과 보살을 그려내려는 사려 깊음, 내가 어떻게 ‘감히’라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리라. 이 말씀 끝에 불국토를 일구는 마음으로 불국사 축대를 쌓으면서 90미터나 되는 인공석을 자연석에 얹으려고 곡선 따라 낱낱이 정으로 쪼아 정성껏 다듬어 낸 신라 장인을 떠올렸다.
쉼 없이 달려온 40년 가까운 세월, 외길을 걸으며 굽이굽이 우여곡절은 얼마나 많았을까. “제자들에게 그림이 싫어지면 하지마라. 웬만큼 하려거든 하지마라. 그럽니다. 저희처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을 때는 밥 먹기 위해서 그림을 했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지금처럼 모든 것이 넉넉한 세상에 왜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해야 합니까? 제가 우리아이들한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말씀인데 ‘삶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저는 한창 때 무슨 영예를 누리겠다고, 그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둘레 사람들에게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탱화가 앞이 보이지 않는 직업이었지요. 저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길게 보자, 길게!’ 제자들은 탱화를 할 때 제가 무섭다는 말을 가끔 하는데요. 탱화는 정말 한 번 삐끗하면 그만입니다. 아까 카메라를 들이댈 때도 긴장을 했습니다마는 젖은 양말로 그림을 밟기만 해도 끝장입니다. 긴장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고를 칩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불화를 조성합니다.” 과연 불모(佛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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