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과 만난 사람들-최완수 선생

“법정 스님하고 인연은 굉장히 깊어요. 1971년도 10월, 처음 전시를 시작할 때부터 오셨어요. 제가 추사 연구를 할 때 번역한 추사집을 보내드리면 스님도 책 보내오시고, 늘 편지 왕래를 하고 서로 찾았지요. 봉은사에 계실 때 두어 번 가 뵙고, 불일암에는 여름·겨울 방학 때, 한 해에 두 번은 꼭 제자들 데리고 가뵈었어요.” 간송선생 동상 앞, 옛 서책 향이 감도는 담백한 연구실에서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최완수 선생(71)과 마주 앉았다. 한복을 입고, 컴퓨터도 핸드폰도 사용하지 않는 선생은 ‘나는 조선시대 생활 그대로 산다’고 말씀한다. 하얀 모시동옷 차림에 속이 다 들여다보일 만큼 해말간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자 같다. ‘세상에 이런 어른도 계시구나.’ 생각하는데 느닷없이 동저고리 바람으로 손을 맞을 수 없다면서, 두루마기를 입고 오겠다고 하는 선생을 그러면 셔츠 바람으로 찾아온 제가 민망하지 않겠느냐면서 막아섰다.

“나는 조선시대 그대로 산다”는 최완수 선생. 법정 스님과 현호 스님 부탁으로 송광사와 길상사 극락전 불상조성 등 큰 불사를 논의하며 뜻을 같이 했다.

                        1971년부터 편지 왕래하며 교분
                        불일암 찾아 갖은 농담으로 묵언 깨
                        송광사와 길상사 불사 맡아 동참

                        불상조성 과정 낱낱이 적바림 복장
                       길상사 중심전각을 극락전으로
                       달 같은 극락전부처, 해 같은 설법전부처

                      왜 하필 지장전이누? 대웅전 지어야지
                      ‘명부전을 지장전으로’ 송광사가 처음
                      스님이 바람이면, 선생은 뿌리 깊은 나무


방학 때면 제자들과 어김없이 불일암을 찾았다는 말씀에, 송광사 수련회에 동참 한 적이 있느냐고 여쭸더니 당신은 불교를 믿어도 계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며 절집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못 지킬 계를 어떻게 받아요? 안 받고 안 지키는 게 낫지. 받고 안 지키면 약속위반이지요. 그러려면 아예 출가하지 이러고 있겠어요. 계에 묶여서 괜히 불편할 일을. 법정 스님을 비롯해 저를 좋아하는 스님들은 그래서 더 좋아하지.”

어느 해 겨울, 선생이 불일암을 찾으니 법정 스님이 삼동결제를 하면서 묵언패 내걸었다. “묵언수행을 한다고 앉아 계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갖은 농담 다 해가지고 실컷 웃기고 묵언을 다 깨뜨려놓고 왔지요. 하하. 그때는 법정 스님이 제자를 받지 않을 땐데 내가 제자를 여럿 거느리고 가서 ‘상좌 두세요. 상좌를 빨리 두셔야 노후가 편안하실 테니까.’ 그랬는데 그 뒤에 보니까 상좌 두셨더라고. 그러니까 상좌들이 어리지. 그때 그랬는걸. 상좌 하나가 지옥 한 덩어리이라고.” 선생에게 속세 인연은 짓지 않아 자식은 없더라도, 자식이나 진배없는 제자들이 30여 명이나 된다. 법정 스님 지옥은 일곱 칸이지만 선생 몫은 서른 칸이 넘는다고 농을 건넸더니 “그래도 지옥을 짊어지고 가야지. 지옥고를 받아야 극락도 오는 거니까.”라면서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 말씀 끝에 “지옥, 내가 먼저 들어 갈 거야.” 했다던 조주 스님이 떠올랐다.

“법정 스님하고 상당히 친했는데 강원도로 떠나시고 난 뒤에는 굳이 어디 계시는지 알려고 들지 않았지요. 꼭꼭 숨었다는데 뭐 하러 찾아요. 그래도 봄·가을 열리는 전시회 때는 꼭 오시고, 서로 부탁할 일이 있을 땐 반드시 찾았지요. 85년 8차 송광사 중창불사 때 법정 스님이 현호 스님을 데리고 이리 오셔서 부탁했어요. 그러니 어찌 각별한 인연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 뒤로 송광사나 길상사 불사는 제가 맡았지요.”

길상사는 1997년 2월 14일 등록하면서 청학 스님이 초대 주지를 맡았다. 그때 법정 스님은 최완수 선생이 불사를 맡아달라고 했다. 청학 스님은 선생에게 산만한 구조물들 가운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선생은 ‘중심 건물이 어디냐?’고 물어 지금 극락전 자리를 중심 법당으로 정했다. “신라 이래로 개인 집을 절로 만들 때, 대체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극락전으로 해왔다. 극락왕생을 발원하려는 마음에서 생긴 전통이니 그대로 따르는 것이 어떠냐?”고 의견을 내어 중심 전각이 대웅전이 아닌 극락전이 되었다. “우리 고유특색 같은데, 고려 중반기 무신난 이후로 아미타불 좌우보처를 경전 가르침대로 관음·세지를 모시지 않고 관음·지장을 모셨어요. 과거·현재·미래를 다 통섭해버린 거지요. 우리겨레는 종합해서 함축하기를 좋아해요. 요점정리를 해서 단순화시키지요. 그 전통을 따라 길상사 극락전에 아미타 삼존불 모셨어요.”

우리 정서로 보아 시작이 반이라고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바로 되는 줄 아니까. 선생은 그렇게는 못한다. 서두르겠지만 내 마음에 들어야 일을 끝내겠다고 확실히 못을 박았다. “결국은 내가 한 것이 될 텐데 잘못되고 나서, 일을 서둘러 마쳐서 잘못됐다고 해봤자 얘기가 안 되니까.” 선생은 부처님 모실 공간을 먼저 만들어야 불상 크기가 나올 테니까, 먼저 건물 개조부터 해야 한다면서 닫집을 조각하고 불단을 조성할 사람, 후불탱화 그릴 사람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아퀴를 지었다.

우리 선조들이 불상을 모실 때 불상을 어떻게 조성했는지 하나하나 적어서 복장에 넣어놨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런 기록이 거의 없어서 불상연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최완수 선생. 송광사 불사하면서부터 복장 연기문에 불상 조성 과정이 얽힌 사연을 낱낱이 적바림해서 넣었다. “불사를 하면서는 그 내용을 동판에 부식시켜서 넣었어요. 그런데 길상사는 시간이 촉박하기도 하고, 법정 스님이 그런데 매달리기 싫어하는 분이니까. 종이에 쓰겠다고 해서, 되도록 종이가 변하지 않아야 하니까. 제자들이 만든 종이하고 글을 드렸어요.”

극락전 아미타부처님이 달처럼 은근하고 푸근하다면, 설법전 석가모니부처님은 해처럼 씩씩한 기상이 조어장부답다. “극락전 부처님 원형은 보덕사부처님이에요. 제 머릿속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어떤 부처님이 어떻게 아름다운지 대강 담겨 있지요. 처음 송광사 대웅보전 부처님 조성 부탁을 받고 그 가운데 어느 부처님을 본본(本本)으로 할까? 고민고민하다가, 제가 열 살 때 처음 보았던 보덕사 부처님을 떠올렸어요. 그리 돌아가자! 마음먹고는 바로 현호 스님한테 전화를 해서 내가 태어나 가장 먼저 친견했던 부처님한테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다. 그리고는 한 겨울에 제자들과 현호 스님, 태성불교사장하고 같이 내려갔어요. 마음에 결정은 이미 내렸어요. ‘현호 스님 마음에 들면 더 좋지만, 마음에 안 들어도 내 마음대로 헌다.’ 법정 스님이야 이미 경지를 다 넘은 분이니까. 그렇다지만 현호 스님이 대단해요. 흔연히 그 자리에서 바로 답을 하더군요.”

충남 예산군 가야산(伽倻山) 보덕사(報德寺) 극락전에 독존(獨尊)으로 모셔져 있는 아미타여래불상은 높이가 117센티미터로 고려 명종(1171-1197) 때 조성하고, 조선 영조2년(1726)에 중수한 종이로 만들어진 불상이다. “길상사 극락전 불사 시작할 때도 현호 스님이랑 보덕사를 다시 갔어요. 가서 보니 어떻게 뭘 잘못 했는지 부처님 손가락 하나가 부러져 무엇으로 부쳐놨더라고요.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보완불사를 하려고 바로 제자들과 태성불교사 사람을 내려오게 했어요. 불사를 하면서 제자들이 직접 친견하고 만지면서 도면을 그리고, 조각을 할 때 감수도 했으니까. 송광사 부처님보다 길상사 부처님이 더 보덕사 부처님에게 가까울 수밖에요”

반세기동안 간송 미술관에 뿌리를 내리고 겨레 미술 연구에 온 정열을 쏟은 최완수 선생은 신수대장경 보려고 간송미술관에 갔다가 겸재를 만났다.
같은 해, 청학 스님이 긴 방이 있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강당으로 써야 하겠다고 했다. 선생은 무설전으로 할지 설법전으로 할지, 법정 스님과 의논하라고 했다. “법정 스님이 무설전은 싫으셨던 모양이야. 수 쓰는 거니까. 그냥 평범하게 설법전으로 하자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법을 설하는 곳이니까. 석가모니부처님 단독상을 모시자고 했어요.” 청학 스님은 마침 시주자가 나타났다면서 시줏돈에 맞춰 순금불상을 예술품으로 잘 만들어서 봉안을 하자고 했다. 선생은 그도 좋지만 너무 작으면 집어가기 쉬우니 사람 하나 도둑놈 만들기 딱 좋지 않겠느냐면서 널따란 방에 조그만 불상 하나 놓였을 때 구성미도 생각해보라고 했다. 천정이라도 높으면, 작은 불상이라도 높이 모실 수는 있지만, 평방이라 저 뒤에서는 일어서서도 겨우 보일까말까 하지 않겠느냐? 법정 스님하고 의논을 하라고 했다. “설득 당했지. 얼마 있다가 와서 선생님 뜻대로 하시래요. 그래서 이곳은 법을 설하는 설법전이니까 강인하고 장대한 느낌을 가진 부처님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지금 국립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황복사 삼층탑에서 나온 순금불을 원형으로 삼았어요.”

극락전 부처님은 태안반도 백제불상이 본본인데, 설법전 부처님은 신라불상을 본본으로 삼았으니 다를 수밖에 없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는 남북조 시대, 육조시대 불상양식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다가, 당나라 때로 오면서부터 불상양식이 확 바뀐다. 그런 까닭에 처음 당나라 양식을 받아들인 황복사 불상은 풍후하고 당당하다. “후불탱화 걸어봐야 멀리선 보이지도 않을 테니 단독상으로 모시고, 광배를 했어요. 단이 낮으니까. 뒤에서는 광배 끝이라도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2004년 지장전을 지을 때도 아무래도 선생님이 해주셔야 하겠다면서 선생을 찾은 당시 주지 덕조 스님에게 “법정 스님 뜻이라면 마땅히 내가 해드려야지.”하고 선뜻 대답을 했다. 어떤 규모로 짓는지, 향이 어떤지는 알아야 그에 맞는 불상을 조성할 수 있기에 현장 나들이를 여러 번 했다. 그때마다 법정 스님이 동석을 했다. 선생은 속으로 ‘왜 하필 지장전이누?’ 그 자리가 중심 자리인데 지으려면 대웅전을 짓든지 해야지. 그러다 ‘아! 금고가 필요하구나.’하는 생각에 입을 닫았다.
“하하 또 고민이 시작이지. 흔히 명부전이라고 해놓고 시왕상 중심이잖아요. 그런데 법정 스님이나 나나 모두 도깨비굴이라고 맞지 않아 하거든. 내가 법정 스님 의도를 알아차리고 ‘시왕상을 모실 거냐?’ 물었더니, 스님이 ‘그 도깨비굴 귀신들 다 끌어다가 뭐할 거냐’고 그러셔서 삼존상만 모시기로 결정하고는 지장보살 연구를 한참 했지. 우리나라 지장보살이 독특해요. 그냥 맨머리 승두상과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이 있는데, 우리는 고려시대 이래로 두건 쓴 피모지장(被冒地藏)이 주로 신앙 대상이 되어 불화로 그려지고 그랬어요. 그런데 조각상으로 남겨진 것은 없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고창 선운사 도솔암에 있더란 말이에요.”
하늘, 땅, 사람을 상징하는 천장(天藏), 지장(地藏), 인장(人藏) 삼장(三藏)인데, 이 지장보살 세 분을 빠짐없이 볼 수 있는 곳이 선운사다. 모두 두건을 쓴 선운사 지장보살 가운데 도솔암 지장보살상이 가장 좋은 줄 이미 알고 있었던 선생은 그 불상을 본본으로 하자고 마음을 먹고 일행과 함께 내려갔다.
“한 번 보면 흠결이 없어보여도 자세히 살피면 파탄된 게 많아요. 기본틀만 두고 모두 바로 잡았어요. 법고창신(法古創新)이에요. 창신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설 까닭이 뭐겠어요?” 그 뒤 법정 스님이 만나자는 기별이 와서 가보니 전각 이름을 정하는 자리였다. 당신이 먼저 뭐라고 입을 열면 생각을 접을 수도 있으니까 가만히 앉아 있는 선생에게 법정 스님이 명부전은 귀신이 사는 집 같으니 지장전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고 그랬지요. 지장전이란 명호를 일반화시킨 건 송광사부터에요. 그 전엔 모두 명부전이라고 했지. 가끔 지장전이라는데도 있었겠지만 유행하지는 않았어요. 지장보살을 모셨으니 지장전이라고 해야 한다고 내가 우겼죠.”

선생에겐 조선은 당파싸움만 하다 망한 형편없는 문화를 가졌다는 조선정체설이,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었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그걸 바로잡으려고 불상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대장경을 읽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최완수 선생. 신수대장경을 보려고 간송미술관을 찾았다가 그만, 발이 묶였다. “겸재를 만난 거죠. 아, 이거구나, 싶었어요. 그땐 조선사를 호감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미친놈 소릴 들었으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겸재로 조선 문화가 지닌 저력을 증명해보이겠다고 생각했어요. 조선 전기에는 소를 그려도 물소를 그리고, 사람들도 죄 중국옷을 입혔어요. 그러나 겸재는 우리 갓과 도포를 입은 선비, 우리 승복을 입은 승려, 우리 저고리를 입은 여인들을 그렸을 뿐 아니라, 중국 산하가 아닌 금강산과 인왕산을 그리지요. 겸재 이후 김홍도와 신윤복 조선풍속화가 출현합니다.” 1966년 일이다.

선생이 간송미술관에 뿌리를 내리고 이 겨레미술 연구에 온 힘을 쏟은 지도 어느덧 반세기. 이곳에 들어온 뒤로 한 번도 밖에 나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제가 좀 그런 데가 있어요. 뭐에 취하면 그것밖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거든. 예전 선사들도 절문에 한 번 들어서면 평생 문밖을 나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잖아요.” 출가! 늘 버리고 떠난 법정 스님이 선선한 바람이라면, 평생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선생은 뿌리 깊은 나무다. 전시회도 한 해 두 번밖에 열지 않으면서 연구한 바탕에 뭐가 있었을까? “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저 내가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이렇게 살라고 하면 아무도 못살지요.” 앞으로도 할 연구가 많을까? “그러믄요. 우리 역사 연구가 여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근대 사학이라는 게 식민사관에서 출발했으니까. 죄 바꿔야하는데 저는 바꾸기 시작하는 틀, 겨우 주춧돌만 하나 놓았을 뿐이지요. 이제 후학들이 사방에 주춧돌을 놓고 궁궐내부를 지어나가야 하죠. 내가 시의적절한 때 여기 와서 뿌리를 내렸던 거죠. 조선이 망가지는 시점에서 이런 일을 하려들었다면, 간송 같은 일밖에는 못하죠. 간송 선생이 해놓으신 일을 나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정리하기 시작한 거지요.” 선선히 웃는 선생 얼굴에서 서산 백제마애불이 보인다. 씨도둑은 못한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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