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학·죽음 탐구 맹난자 수필가

맹난자 선생은 …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나 숙명여자 중 고등학교를 나와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국대학교 불교철학과를 수료했다. 1996년 〈에세이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1969년부터 10년 동안 〈신행불교〉 편집장을 지냈고, 지하철 게시판 ‘풍경소리’ 편집장, 〈에세이문학〉 발행인 겸 주간,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등을 지냈다. 제19회 현대수필문학상, 남촌 문학상, 정경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빈 배에 가득한 달빛〉 〈사유의 뜰〉 〈라데팡스의 불빛〉 선집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에 대하여〉 〈만목의 가을〉이 있으며 역사 속으로 떠나는 죽음 기행 〈남산이 북산을 보고 웃네〉와 개정판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기억하라〉, 작가 묘지기행 〈인생은 아름다원라〉와 〈그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가 있다.
정각사 김동화 박사 ‘금강경’강의 들으며
‘有求면 有苦, 無求면 無苦’에 전율

죽음을 불교적 사유와 문학으로 승화
세계작가 52명 묘지 기행은 화두풀기
〈그들 앞에서면…〉은 대중공양이며 회향

‘색이냐 공이냐’ 숭산 스님 내밀던 사과
“이제는 맛있게 받아 먹을 수 있어”

세종회관 별관서 운허 스님 특강 진행
〈신행불교〉편집 10년…“무의식 중 발원”
인생 그리고 여행, 그 관계풀기
인생은 여행일까? 그렇다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여행인가? 여행이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사치스러운 냄새를 풍긴다. 항상 즐겁기만 할 수 없는 인생, 그 고난의 날들은 어떤 이름의 여행이란 말인가? 차라리,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단정해 버리자.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장맛비에 젖은 전철을 타고 인사동으로 가는 동안 인생과 여행이라는 단어를 두고 망상에 빠졌다. 입안에 알사탕을 굴리듯 이 생각 저 생각을 굴린다. 하지만 단물은 조금도 넘어 오지 않는다. 그래도 자꾸만 생각한다. 인생은 여행일까?
아, 그런데 나는 왜 이 하릴없는 망상에 붙잡혀 있는 거지? 복잡한 인사동 길에서 그 이유가 떠올랐고 그간의 망상이 싹둑 끊어져 버렸다.
“아, 맹난자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구나!”

불교, 문학 그리고 죽음
묘한 일이었다. 국수집에서 만난 맹난자(71, 수필가) 선생님은 내 입속의 알사탕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많은 일들로 꾸며져 있는 겁니까? 내 살아 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간이역을 지나쳐 왔어요. 그 역마다 아로 새겨진 일들이 사건이라면 사건이고 역사라면 역사겠지만, 그걸 다 스쳐 지나서 최후의 종착역으로 가는 여행이잖아요.”
본론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결론이 먼저 나와 버렸다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아직도 알사탕이나 굴리고 있는 못난 착각! 맹 선생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무수한 간이역에는 또 무수한 윤회가 있고 연기가 있고 인과가 있어요. 그 연기적 질서가 향하는 끝점을 누가 알겠어요? 우리가 인지하는 범위 안에서 죽음이라 하는 것일 뿐이지. 죽음, 그것이 니르바나[涅槃]가 되지 못할 바에야 진짜 종착역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나는 여태껏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이루지 못했어요. 나이가 들면서 어지간한 욕심은 제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언제나 즐거운 경지로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나는 여전히 추구하고 있어요. 상락아정을. 그 종착의 니르바나를.”
거듭 되는 니르바나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착각의 수렁에서 정신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 많은 간이역을 지나오면서 일관되게 지니고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게 저의 서원이고 발원이겠죠? 간단히 말하면 서원은 ‘불교로 문학하기’ 그리고 발원은 ‘문학으로 불교 알리기’죠. 그 속에 흐르는 것이 ‘죽음에 대한 탐구’이고요.”
너무 간단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불교, 문학, 죽음 이 세단어가 맹 선생님이 거쳐 온 수많은 간이역에 줄기차게 걸려 있다. 열차의 통과를 허락하는 신호등처럼. 맹 선생님이 거쳐 온 간이역에는 50년을 부여안고 온 화두도 있고 28년을 탐구해 온 숙제도 있었다.
물론 아직도 그 화두와 숙제는 아무에게도 점검 받지 않았고, 스스로 무릎을 치며 기뻐할 시간이 올 것이란 희망도 버리지 않았다. 불교도 문학도 죽음도 아직 뜨겁기만 하다. 종착역까지 끄떡없다.

번개처럼 몸을 관통하던 한 마디
50년을 끌어안고 온 화두는 ‘무구(無求)면 무고(無苦)’라는 단어. 구하는 것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는 이 단어가 촌철살인의 비수로 맹 선생님의 몸을 관통했다고 한다. 그때 나이는 21세. 전쟁 직후, 자유당 시절로 대변되는 1950년대 중 후반기에 서울에서 숙명여중고를 나왔고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면 요즘말로 ‘로열패밀리 그룹’이다. 그런 복된 날들에 찬바람이 불었다.
“대학 3학년 때인데 집안이 더 갈 곳 없이 무너졌어요. 부모 몰래 휴학을 하고 서울시청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그 휴학은 하던 공부만 끊은 것이 아니라, 교우관계는 물론 그토록 정열을 바쳤던 연극 활동(연출을 했음)도 접어야 했어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모든 것이 고통이었어요. 그런 가운데 정각사에서 진행 중인 김동화 박사님의 〈금강경〉 강의는 빠지지 않고 찾아 갔습니다.
내가 한참 생각이 많고 고통스러워 할 무렵의 어느 날, 김동화 박사님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흑판에 ‘유구(有求)면 유고(有苦), 무구(無求)면 무고(無苦)’라고 쓰시는데 나는 온 몸에 천둥번개가 뚫고 지나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아, 내가 구하는 것이 많아 그렇게 고통을 짊어지고 살고 있구나! 하는 깨우침이 나를 소스라치게 했던 겁니다.
내가 느끼는 고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번개처럼 다가 온 그 한마디, 아마 그런 상황을 ‘줄탁동시’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그때 나는 그 단어를 온 몸에 새겨 넣었던 것인지 그 뒤로는 신기하게도 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구하는 것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무소유로 가는 길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 또한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마크 트웨인, 릴케, 예이츠, 도연명, 소동파, 임어당, 몽테뉴 등등 현자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도 결국 공의 자리에서 결론을 내렸으니 구함도 고통도 다 근원은 공(空)의 자리였던 것이지요.”
언제나 뒤에 있는 간이역의 풍경들
‘유골은 화장처리 되어 평장으로 안치했다. 본관과 이름, 그리고 생몰년월일이 적힌 조그마한 이름표(묘석)를 그 아래 세웠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가족이 오롯이 한자리에 모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열(列)을 따라 펼쳐진 11개의 이름표는 마치 조선 왕가의 가계도를 방불케 했다.
시아버님 밑에는 시동생이 한줌 흙으로 누었고 그 줄 왼쪽의 빈 터가 남편의 자리쯤인 것 같다. 그 옆자리를 눈으로 짚어본다. 흙에 눕는다고 생각하니 흙의 체온이 느껴진다.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결국 한줌 흙이다.’
맹 선생님이 최근에 쓴 수필 ‘한 줌 흙’의 한 대목이다. 아직 발표되지 않은 이 수필은 지난 봄 선영을 파묘해 수목장을 지내는 동안의 느낌을 담고 있다. 가족들이 ‘누운 자리’ 그리고 자신이 ‘누울 자리’를 바라보는 눈이 따뜻하다. 그 따듯함은 결국 한 줌 흙이라는 결론을 거부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맹 선생님이 문학의 화두로 죽음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내 곁의 죽음들과 내 안의 죽음 때문입니다. 전쟁 통에 죽은 여동생의 시신을 지키던 외딴 산골짜기 집에서의 기억, 누구보다 좋아했던 남동생의 죽음과 묘지마저 지키지 못한 괴로운 기억, 실성한 어머니의 허망한 죽음들이 내 젊은 날의 간이역에 진열된 고통입니다. 그 고통에 나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더해지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죽음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시부모님이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사고로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두 어른을 봉양했어요. 어머님은 3년 만에 돌아가시고 아버님은 더 긴 시간 고통으로 계셨는데, 나는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해 가는 아버님을 간호하며 ‘백골관’ 수행을 한 것이라 여깁니다. 그때부터 죽음의 실체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죽음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글을 쓸 때는 모든 주제가 죽음이었어요.”
죽음을 알면 죽음을 즐길 수도 있다는 생각, 그것은 결코 치기(稚氣)가 아니다. 숭고한 수행임에 틀림없다. 시아버지의 사위어 가는 육신을 마주하며 본격적으로 탐구한 죽음에 대한 공부는 28년 동안 4권의 책을 내면서 일단락 지었다.
특히 동서양의 유명 작가 52명의 묘지를 기행하며 그들의 생사관을 천착한 작업을 통해 죽음이라는 화두를 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는 바로 그 화두풀기를 대중과 공유하려는 공양이며 회향이었다.
그런데 왜 52인일까? 맹 선생님이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다니듯 했다”고 말할 때 이 의심이 폭발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질문하지는 않았다. 맹 선생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53번째의 선지식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은 꿰뚫어 보면 속은 텅 비어 있다. 그렇지만 빈 나무속에서 봄이 되면 꽃이 새롭게 피어난다. 공즉시색이다. 조건만 맞으면 연기(緣起) 상황으로 존재하다가 조건이 다 하면 돌아간다. 우리의 생사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맹 선생님의 또 다른 근작 수필의 한 대목이다. 오래 전 화계사에서 숭산 스님과의 일화를 통해 공(空)의 실상을 느끼는 과정이다.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을 역임했던 월파 이후락 거사의 부인 정보현행보살(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이 회장이었던 무문회의 총무직을 맡았던 맹난자 작자(사진 왼쪽 끝). 그는 운허 스님 초청<능엄경> 특강,파주나환자촌 돕기 등공부하며 자비를 실천하는데 주력했다. 당시 운허 스님의 세종문화회관 별관 법회는 '서울의 중심부에서 목탁소리가 울린다"며 화제가 됐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서울 화계사에서 숭산 스님을 뵌 것은 20대 중반이었습니다. 스님은 사과를 내 오셨어요. 그런데 스님은 사과 한 알을 불쑥 내미시더니 ‘색이냐? 공이냐?’ 하고 물으시는 겁니다. 나는 답을 못했어요. 다만 그 몇 년 전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몇 년 전의 일이란, 통도사 극락암에 계시는 경봉 스님을 뵈러 갔을 때의 기억입니다. 극락암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거기 철웅 스님도 계셨어요. 철웅 스님과 방에 마주 앉았는데, ‘반야심경을 외어 보라’고 했어요. 나는 거두절미 ‘색즉시공 공즉시색’만 외고 입을 닫았지요. 그랬더니 ‘옳다’ 하시더군요. 그리고 회초리를 탁탁 치면서 ‘색이냐? 공이냐?’ 하고 호통 치듯 물으셨어요. 그때 나는 야부의 ‘금강경 송’ 한 토막을 읊었던 것 같은데, 그걸 듣고 철웅 스님은 박장대소를 하시지 뭡니까? 얼굴이 화끈거린 그런 순간이었지요.”
-지금 숭산 스님이 사과를 내미시면 뭐라 답하실 것 같습니까?
“그냥 공손하게 받아서 맛있게 먹겠지요.”

기도, 서원 혹은 절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을 지낸 이후락씨의 부인과 함께 신행활동을 하셨는데 그게 ‘무문회’였죠?
“무문회는 봉선사 운허 스님을 후원하는 불자들이 결성한 모임인데 봉선사 신도회 격이었어요. 운허 스님은 경학이 밝기로 당대를 호령하셨고 역경 사업의 주역이시잖아요. 무문회는 지금의 서울시의회 회관(당시 세종문화회관 별관) 자리에서 운허 스님을 초청해 〈능엄경〉 특강을 들었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어요. 나는 총무를 맡아 여러 일을 챙겼어요. 이후락씨나 부인 정보현행 보살님이 많이 도와주었고 주양자 박사님과 국회의원 구임회 씨가 부회장이었어요.”
-그 초청법회를 할 때 불행한 일도 당하셨다고….
“열 살짜리 딸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지요. 그런데 그 사고도 우연은 아니었던 것 같았어요.
그 아이는 좀 일찍 세상에 나와서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 했고, 퇴원해 집에 왔을 때도 좋은 상태가 아니었어요. 그 아이를 안고 나는 간절히 기도 했어요.
‘부처님 이 아이를 살려주시면 앞으로 10년 동안 부처님 일을 하겠습니다. 뭐든지 부처님의 종노릇을 하겠습니다’라고요.
그렇게 기도하고 난 뒷날 가까이 사시던 광우 스님께서 아이를 보러 오셨어요. 그리고 스님은 〈신행불교〉(당시의 제호는 ‘신행회보’) 편집을 맡으라고 하셨어요. 나는 그게 부처님의 명령이라 믿고 10년 동안 그 일을 했는데, 아이의 사고가 10년이 지난 때에 난 것이니 어찌 우연이라고 하겠어요? 아무튼 나는 〈신행불교〉로 10년을 보내며 불교 공부와 글쓰기의 토대를 다질 수 있었어요.
당대의 원로 불교학자와 문인들에게 원고를 받으러 다니며 내 속의 문학성이 눈을 떴다고나 할까요? 아픈 아이를 안고 절규하듯 내뱉은 ‘10년의 종노릇’이라는 무의식중의 서원이 내 삶을 얼마나 바뀌었는지 몰라요.”

니르바나, 마지막 탐구대상
삶은 바뀌는 것이다. 한 구비가 바뀔 때마다 하나의 간이역을 통과한다. 간이역 마다 고락의 풍경화들이 남아 있겠지만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으니, 인생의 뒤안길은 쓸쓸할 뿐이다. 그 쓸쓸함의 극치는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무덤이다.
세계의 유명작가들의 죽음을 들여다보며, 거기 깊이 스미어 있는 불교적 사유로 죽음의 문제를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런 맹 선생님은 이제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직 니르바나를 해결하지 못했잖아요. 이제 본격적으로 그것을 탐구하려 합니다. 결국 그것이 마지막 탐구의 대상이지요.”

국수집을 나오니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른쪽과 왼쪽, 각자 가는 길이 반대였다. 인사를 하고 오른쪽으로 몇 발을 내딛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젖은 길 위에 우산을 쓰고 가는 ‘53번째 선지식’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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