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재(石齋) 서병오를 회상하며

석재, 스님들에게 교육 받으며

명필 ‘팔능 거사’로 성장

사찰교육의 중요성 일깨워

 

 

서병오의 사군자

한반도 유사 이래로 최고의 예술가를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물론 조각에선 석굴암의 세존상을 만든 이를 따라가긴 힘들 것이다. 금속공예로는 다뉴세문경보다 정교한 거울을 만들기도 힘들 것이다.

회화로는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安堅)이나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謙齋) 정선을 꼽거나 가장 화려한 색채와 정교한 도안과 완벽한 구도를 자랑하는 고려불화를 그린 이름 없는 화공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납(本納)은 개인적으로 조선말에 대구에서 태어난 석재 서병오 선행을 최고의 예술가로 선택하고 싶다. 詩(시) 書(서) 畵(화) 文(문) 琴(금) 基(기, 바둑) 博(박, 장기) 醫(의)의 여덟 가지에 능해 팔능거사(八能居士)라는 별명을 지닌 석재는 1892년 9월에 태어난다.

한민족의 격랑기(激浪期)였던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살며, 호방하고 활달한 예술혼을 맘껏 펼친 서병오는 독립운동에도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있건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평가받지는 못하고 있다.

문예 분야에서 사대부의 삶을 지향하여 시서화에 두각을 나타낸 대표적인 인물이자 영남화단의 중심에 우뚝 서있던 인물이 석재다. 석재는 숙부인 서상혜(徐相蕙)에게 양자로 입적하여 생가만석(生家萬石)과 양가만석(養家萬石)의 2만석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석재의 의 8가지 재주를 합하여, 10만석꾼이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서동(徐童)이라 불렸던 석재는 영리한 개구쟁이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이런 석재도 아버지의 엄한 훈육에는 꼼짝없이 따라야 했다.

당시 석재의 집안은 누대로 대구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에 시주하던 신도였기에 석재의 부친은 석재를 동화사에 보내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경치를 벗삼아 호연지기를 키우도록 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매일 아침 하인이 대구 읍내에서 새벽에 떠나 동화사에 점심때쯤 도달하면 그 때까지 전지 8장을 앞뒤로 빼곡하게 글을 써서 하인에게 보내어 부친이 검사하곤 하였다 한다. 동화사 스님들의 가르침과 부친의 엄한 훈육으로 석재는 안진경, 구양순(歐陽詢), 왕희지(王羲之), 동기창(董其昌), 등의 중국명가들과 우리나라 추사(秋史)의 글씨를 비슷하게 흉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홍안의 석재는 대가들의 글씨 못지않은 명필이 되었다.

본납이 제일 부러워 하던 부분은 석재가 어린 시절에 동화사에 와서 스님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부분이다. 본납이 2년여 동안 머무르던 스리랑카에는 일요일 만 되면, 초·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절에 모여서 스님들로부터 불교교리를 배우곤 하는 것을 보곤 했다.

스리랑카의 국교로서의 불교와 85% 이상의 국민들이 독실한 불자로서 450년간의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들의 종교 탄압를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실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불교교육을 시켜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요일만 되면 스리랑카의 사찰들에는 학생들이 불교를 공부하고 시험을 봐서 그 점수를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제출하여야 졸업이 가능하다. 참으로 부러운 교육제도가 아닐 수 없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각 사찰에도 어린 학생들의 불경 읽는 소리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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