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원 한국제다 회장 부부
부처끼리는 서로 알아본다는데. 벙긋 웃는 길상화김판인 보살(77), 백제서산마애삼존불을 쏙 빼 닮았다. 백제의 미소를 닮아 별호가 백제보살이라는 길상화 보살이 해주는 밥을 먹지 못한 사람은 차인(茶人)이 아니라는 말이 돌만큼 둘레 사람들에게 많은 공양을 해드렸다. “제가 밥을 많이 했어요. 요 앞길이 원래 저희 땅이었어요. 그때는 마당이 굉장히 넓어서 ‘차의 날’ 행사나 광주에서 하는 행사를 여러 차례 치렀습니다. 스님이 광주에 오시면 제가 꼭 공양을 해드렸어요. 처음에 잘해드리려고 뭘 좀 차려드렸더니 ‘차려주셨으니 먹기는 먹는데 다음에는 국수를 해주시오.’ 그러세요. ‘국수를 어떻게 해요?’ 여쭸더니 잣을 조금 넣고 콩국수를 해달라고 그러셨어요.”
차 만드는 이 찾아 나선 법정 스님
다들 베일 것 같은 느낌 받는다는데,
백제보살에겐 정다운 스님으로 보여
공양해 드리면 “다음엔 콩국수를…”
콩국수 말고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셨을까? “다 잘 드시는데 김치에 마늘을 조금만 넣어도 귀신 같이 아시더만요. 오신다고 그러면 김치도 미리 담가놓곤 했어요. 팥죽을 아주 잘 잡수시는데 조금 덜 달면 더 달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달면 달다고 그러시고 식성이 조금 까다로우세요. 몇 번 겪다보니까 스님 식성을 알아가지고 길상화 보살이 해주는 음식은 잔소리할 것이 없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한 번은 화순 사평에 있는 ‘데사리(다슬기) 수제비를 먹으러 갈까?’ 그러시기에 제가 해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는 사평에 가서 고동 삶은 것을 사다가 원체 차를 좋아하시는 분이니까, 말차를 넣어서 반죽을 해서 푸른색을 내고, 홍차를 조금 넣어서 붉은색을 내고, 하얀색하고 삼색수제비를 했더니 ‘하, 재주가 좋다고’ 그러면서 맛있게 드셨어요.”
광주에서 베토벤음악감상실을 하는 이정옥 사장을 따라 불일암에 처음 갔다는 백제보살. “불일암에도 여러 번 가서 자고 스님 따라서 꽃구경을 많이 다녔습니다. 연꽃도 맞으러 가고, 매화가 필 때 다니고, 다회도 하고, 미황사도 저희가 가자고 말씀드려서 여러 차례 갔습니다. 스님이 강원도 가신 뒤로 좀 드문드문해졌지만 꽃을 보러 스님과 광양으로 해남으로 정채봉 선생하고 많이 다녔습니다. 차를 좋아하는 장익 주교님과도 여러 번 다니고, 류시화씨하고도 몇 번 같이 다녔고.”
서산마애불 빼어 닮은 부인 ‘백제보살’
햇차 보내드리면 꼭 편지로 인사
“맛있다…조금 덜 볶았으면” 품평도
서양원 회장 차 만들때 스님의견 유념
무남독녀인 백제보살은 지난해 94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오래 모셨다. 가끔 절에 다니던 분이 천주교에 가면 장례를 잘 치러준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는 성당에 다녔다.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가서 교리 공부를 여섯 달을 하고나서 영세를 받기 전날, 아무래도 절에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여기서 무등산으로 쭉 올라가다보면 문빈정사가 있고 더 올라가면 증심사,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약사암이라는 암자가 있어요. 인연이라는 것이 있는가 보드만요. 아래 두 절에 들려 마당도 둘러보고 법당에도 가보곤 했는데도 스님을 만나지 못했어요. 그런데 약사암에 가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니까 얼른 봐도 불자가 아닌 줄 알았는지 스님이 이리 와서 쉬었다 가라면서 절에 다니지 않는 보살이냐고 물어요. 그렇다고 그랬더니 ‘그러면 절에 다녀보시오. 보살님은 꼭 보살상이라 절허고 잘 맞겄습니다.’ 종일 스님이라고 주지스님이었어요. 그 말이 좋았던가, 그 절을 다니게 됐어요.” 그때가 1986년. 그곳에 어린티를 갓 벗은 고운 스님이 있었는데 지금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이다. “해인사에서 왔다는 곱고 예쁜 스님인데 목소리가 창창한 스님이 입시기도를 한다고 그래요. 딸이 다섯이나 되지만 입시기도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데, 마침 아들이 고 3이어서 입시기도를 부쳤어요. 우리 아들이 동국대학교 무역학과를 꼭 가고 싶어 하는데 담임선생님이 성적이 안 된다면서 원서를 써주지 않아요. 기어이 써달라니까 담임선생이 재수를 해야 할 거라며 마지못해 써주었어요. 열아홉 명이 입시기도를 올렸는데, 스님이 어찌나 지성으로 기도를 했던지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모두 저희들이 가고 싶어 하던 대학을 가게 되었어요.” 그 인연으로 세월이 오래 지난 지금도 금강 스님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좋아한다. 이 말씀 끝에 전설 같은 미황사 기우제가 떠올랐다. 금강 스님이 지게 스님이라 불리며 절을 다듬던 1992년. 가뭄이 들자 우르르 미황사로 몰려온 마을사람들은 30년 전 가뭄이 심했을 때 괘불부처님을 모시고 기우제를 지내고 나서 장대비를 퍼부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금강 스님에게 “스님! 기우제 좀 지내주십시오.”하고 매달렸다. 그러나 30년 전 미처 장대비를 피하지 못해 배접이 떨어져나가 모시밖에 남지 않은 괘불탱화를 괘불대에 걸 수 없어 대웅전 앞마당에 펼쳤다. 그때는 미황사 중창 불사가 막 시작될 때라 지금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마당에 높이 12m 폭 5m나 되는 괘불탱화를 가슴까지 펴니 마당 반이 차버려 어쩔 수 없이 그만큼만 펴놓고 기우제를 올리고 두 시간쯤 지났을까?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나흘 동안이나 줄기차게.
법정 스님은 1997년 6월 7일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 광주모임 탄생 법문 끝자락에 세계에 내로라하는 차와 견줬을 때 한국제다 감로차가 으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향藝鄕인 빛고을 광주는 수식어가 발달한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운치를 누릴 줄 아는 멋이 있는 고장이에요. 기를 쓰고 벌려고 들지 않고 어지간하면 즐기고, 인정이 넘치는 곳이에요. 우리 한국사람 특성인데, 그동안 좋은 점이 가려져있었다니까요. 게다가 세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좋은 차가 광주에서 나니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우리나라 녹차뿐 아니라 중국·일본차를 두루 마셔봤지만, 한국제다 감로차 맛을 느낄 수 없어요. 차 맛을 잘 아는 일본, 중국 사람들이 공감하는 바에요. 한국제다 감로차는 세계적이에요. 이 좋은 차가 이 고장에서 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해요. 그 까닭은 이곳 사람들 혀 감각이 섬세해서 맛을 알기 때문이에요. 감로를 많이 마시면 장수해요. 본의 아니게 차 선전을 하는데, 감로甘露라는 말은 불교에서 나오는 말인데 암리타amrita, 영생불사永生不死라는 뜻이에요. 가까이 차가 있으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삶에 고마움을 느끼고 누려야 합니다. 광주는 한갓 이름에 지나지 않아요. 그 안에 사는 한 사람 한 사람 삶이 바로 실체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광주는 이름 그대로 빛고을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도시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광주가 진정한 예향을 이루려면 삶이 맑고 향기로워져야 해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인연으로 광주가 이름 그대로 영원히 빛나는 고을이 되기를 빌면서 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차를 향한 한국제다 내외분 정성이 얼마나 미더웠으면 많은 대중이 모인 법석에서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셨을까.
법정 스님 49재는 송광사뿐 아니라 해남 미황사에서도 치렀다. 병상에서 스님을 모셨던 분들이 넌지시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송광사로 가려고 차비를 하는데 하루 전날 미황사에서도 스님 재를 지낸다는 연락이 와서 갔어요. 스님이 좋아하셨다는 화과자하고, 능이버섯국과 아보카도라고 시커멓게 생긴 과일을 한 바구니 올렸어요. 저도 스님이 좋아하시던 차를 올려서 조촐했어요.”
말씀이 무르익을 무렵 몸이 좋지 않아 못나온다던 한국제다 서양원 회장이 들어왔다. 인사라도 하려고 들렸다면서. “우리나라 불교와 차 교류에 큰 획을 그은 거목이 돌아가셔서 충격이 크죠. 법정 스님은 특히 글을 쓰다가 정신이 흐려질 때도 저희 감로차를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든다는 말씀을 하실 만큼 저희 차를 좋아하셨어요. 차 선물이 많이 들어와도 다 누구 줘버리고 아무리 비싸도 소용없어요. 깨끗하고 정갈한 차만 드셨어요. 법정 스님처럼 차를 아끼는 글을 많이 남긴 분은 별로 보지 못했어요. 단순하고 담백한 성격 그대로 글도 쓰시고 차 산업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양반에게 제다 방법이나 차 유통구조를 많이 배웠습니다.”
1951년 한국전쟁 한 가운데서 차를 만들기 시작한 한국제다 서양원 회장은 젊어서 지금 한전 전신 가운데 하나인 남선합동전기회사에 다녔다. 그때 거래처 가운데 우리가 흔히 양은냄비, 양은주전자라고 부르는 노란 양은그릇을 만드는 알루마이트 공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릇에 물을 들이는데 홍차를 쓰는 것을 보고는 ‘사업이 되겠구나!’ 싶었다. 고향 광양에 작설차 나무가 있어서 인이 박히게 먹었기 때문에 찻잎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기에. “홍차를 공업용으로 쓰는 방법을 터득해 6년 동안 납품을 했습니다. 홍차는 세계 3대 기호음료에 들어갈 만큼 많이 마시는 음료입니다. 그러나 식음료로 처음 만들 때는 차를 만들어도 팔 데가 없어서 공짜로 퍼주면서 시장을 만들었어요.”
차근차근 성장가도를 달리던 70년 대 초. 전남 보성군에서 차를 보성농특산물로 정하고 차농사를 독려하다 차 수요가 줄어 판로가 막히자 서양원 회장에게 매달렸다. 서 회장은 10년 동안 보성 농가 차를 사주기로 약속한다. “보성농가 57세대와 전량 수매 계약을 했습니다. 그때 돈으로 450만원을 전도금으로 줬어요. 부동산을 잡고 공증을 하고 어음을 받았어요. 73년부터 84년 계약이 끝날 때까지 빌려준 돈인데 계약기간이 끝난 지 몇 십 년이 지나도록 돌려줄 생각도 하지 않아요. 그 홍차를 5년 동안은 동서식품에서 모두 사줬습니다.”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우리 차 문화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고사 상태에 놓였다. 그러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 신비한 영약이라며 선풍을 일으켰던 ‘홍차버섯’ 덕분에 소비가 늘자 몇몇 제다업자들이 고구마 잎이나 동백나무 잎에 색소를 넣은 가짜 홍차를 만들어 팔았다. 언론은 ‘당신은 가짜 홍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시중 홍차 거의 가짜’라고 크게 써댔고, 홍차시장은 무너져 내렸다. “동서식품 초대회장 김재명씨가 내 말을 듣고 홍차를 5년 남짓하다가 가짜 홍차 파동을 겪으면서 아이고 못하겠다며 손을 들고 말았어요.” 동서식품이 빠지자 서양원 회장은 태평양화학 서성환 회장을 설득했다. 기꺼이 차를 사준 서성환 회장이 너무 고마워 서양원 회장은 아끼던 브랜드 ‘설록차’를 기쁜 마음으로 태평양화학에 넘긴다. “일가 어른이라 참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어요.” 이렇게 우리나라 차문화가 발달한 배경에 서양원 회장 땀과 정성이 서려있다. 한국제다 차밭은 장성과 영암, 해남 세 곳에 있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은 최소 50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난 차를 섞어야 차 맛이 한결같기 때문이란다. 차 맛이 한결같은 데는 비결이 더 있다. 구수하고 넉넉한 백제보살 품 때문일까? 군대 제대하고 스물세 살에 와서 일흔이 넘은 공장장을 비롯해 공장에 20년이 넘는 근속자가 네 사람이나 있다. 올해 마흔아홉 살로 사무실 살림을 하는 관리책임자도 처녀 때부터 근무하다가 결혼하고 삼 년 쉬다가 다시 나와 이제까지 함께한다. 차밭뿐 아니라 사람들마저 붙박이니 차 맛이 한결같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