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7호 5월 9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학승이 말했다. “아무개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함원전 속, 금곡원 가운데로다.”

問 如何是佛法大意 師云 ?名什? 云某甲 師云 含元殿裡金谷園中

함원전은 장안(서울)에 있는 당나라 궁전 중의 하나인데 그 건축 작품이 빼어났고, 금곡원은 낙양(洛陽) 가까이에 있었던 진(晉)의 석숭(石崇)이 만든 진귀한 명원(名園)을 말한다. 당시 함원전과 금곡원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학승이 자기 이름을 말하자, 조주 선사는 이 두 작품을 하나로 보태어 함원전 속에 있는 금곡원이라고 평한 것이다. 매우 훌륭하고 시원하다는 평이다. 도대체 조주 선사는 학승의 무엇을 보았기에 당대에 유명한 두 작품과 같다고 평한 것일까? 조주 선사의 뜻을 아는 납자가 있는가? 만일 나에게 조주 선사의 뜻을 묻는다면, “조주 선사는 앞으로 7걸음 나갔는데, 그것은 뒤로 7걸음 나간 것이다”라고 말하겠다.
학승이 물었다. “7불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려고 생각하면 잠을 자고, 일어나려고 하면 곧 일어나는 자이다.”

問 如何是七佛師 師云 要眠卽眠 要起卽起

7불은 석가모니불을 포함하여 과거에 성불한 일곱 부처를 말한다. 과거만 아니라, 현재 부처의 스승이며, 미래 부처의 스승이며, 모든 부처의 스승이 누구인지 그것을 물어보는 것이다. 이것 중요한 질문이다. 누가 성인의 진정한 스승인가?
조주 선사처럼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고 확실하게 답을 내려주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도 깨닫는 사람은 적으니 어찌된 연고인가? 납자의 구도열이 예전과 같지 않아서 그렇다. 열망이 깊으면 한 마디에 깨어나는 법이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좌선 생활을 청산하라. 지금 즉시 선사를 찾아가서 생사대사를 결판을 내고 바로 붓다의 수행을 하라. 그대의 눈은 이미 붓다의 눈임을 명심하라.

학승이 물었다.
“‘도는 사물 바깥에 있지 않다. 혹은 사물 바깥에 도가 있지 않다’ 라고 합니다만 어떤 것이 사물 바깥에 있는 도입니까?”
조주 스님이 곧 때렸다.
학승이 말했다.
“화상께서는 저를 때리지 마세요. 이후로 잘못하면 사람을 때리게 될 것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용과 뱀은 구별하기 쉬우나 납자를 속이는 일은 어렵구나.”

問 道非物外 物外非道 如何是物外道 師便打 云和尙莫打某甲 巳後錯打人去在 師云 龍蛇易辨衲子難瞞

원래 견공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흙덩이를 쫓아가지만 사자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던지는 자의 눈빛을 본다. 조주 스님은 도가 안·바깥에 있다느니 하는 허망한 말을 쳐내었고, 학승은 사악한 것은 일제히 쓸어내 버렸다.
도는 사물 바깥에도 없고 사물 안에도 없다. 도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작용한다. 조주 선사는 한 대 때렸고, 학승은 조주 선사의 뜻을 알아채고 그렇게 때리다가는 사람을 때리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경종을 울렸다. 이 어찌 용과 범이 한 판 벌리는 결투의 자리가 아니겠는가? 조주 스님은 낚싯줄을 내렸고 학승은 낚싯줄을 거두어들였으니 진정한 조실과 대중의 자리이다.
선원에 앉아있는 참 납자는 조실과 한판 승부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 입실하여 조실의 첫 법문에 즉시 깨닫고 바로 삼천대천세계를 짓밟아버린다. 그후 대중방에서 조용히 부처의 행을 수행할 뿐이다. 조실과 선방의 구분만 다를 뿐 누가 조실이고 누가 대중인가? 용과 뱀은 구별하기 쉬워도 이것은 구별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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