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이끌어가는 근본 종자를 믿어보세요

▲ 삽화 최주현

때로는 어떤 분들이 말씀하시기를 날더러 “스님께서는 왜 용(用)만 가르칩니까?” 하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용이라는 것은 용이라는 이름이 있기 이전에, 우리가 발전을 하든 발전을 안 하든 우주와 더불어 같이 우리 세상이 그대로 시공을 초월해서 그대로 움죽거리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움죽거리고 하는 자체가 바로 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움죽거리고 살고 있는 그것 빼놓고 뭐가 있습니까? 그러하니 내 마음으로써 다스리고 해나가는 그런 것이 모두가 발전이요, 보고 듣고 발전을 시키는 것도 발전이요, 모두가 용이 아니라면 발전이 없습니다. 목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뭘 배우느냐 하면은, 이 움죽거림이 없이 움죽거린다 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이런 게 있죠, 고정됨이 없다는 거. ‘색(色)이 공(空)이고 공이 색인데 그 가운데 움죽거림이 없다, 고정됨이 없어서.’ 이랬죠. 여러분은 지금 한시도, 일분 일초도 쉬지 않고 움죽거립니다. 눈을 깜박거리십니다. 눈 하나 깜박거리는 것도 용입니다. 우리가 생명이 살아있지 않다면 눈도 깜박거릴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살아있는 자체가 그대로 용입니다. 그래서 용신(龍神)은 모습이 용으로 생겨서 용신이 아니라, 우리가 움죽거리고 찰나에 바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까닭에 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일일이 따지려고 든다면 이 공부는 천하없어도 못합니다. 모두 우주와 더불어 인간의 근본 이 생명, 생명이 없으면은 아니 되는 까닭에 생명의 근본이 있습니다, 또. 근본은 불성(佛性)이라고도 하죠. 불성의 에너지는 이 우주를 덮고도 남습니다. 이거는 혼자의 에너지가 아닙니다. 불성이라는 것은 바로 우주와 더불어 직결이 돼 있기 때문에 우주의 에너지와도 직결이 돼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하고도 모두 가설이 돼 있는 거와 같아서…, 왜 이런 게 있죠? 내가 그 소리를 가끔 하죠. 전력 하나를 가지고 수만 개로 화(化)해서 나투면서 돌아간다. 진화되고 바뀌고 말입니다. 또는 그 불성이라는 에너지 때문에 공기력으로 수많은 것을 발전해낸다 이겁니다. 비도 눈도 바람도 모든 절차를 거기에서 다 발전을 해냅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해야만이 내가 자유스럽게 발전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마음에서 이 공부를 우리가 서로 도반으로서 같이 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도 당시에 그렇게 가르치셨죠? 어떠한 걸 따지고 이렇게 하려면, 일일이 따지다보면은 하나도 건질 게 없다. 그런데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또는 『천수경』이나, 뭐 또 다른 경들이 다 합쳐진 것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반야심경』 내기 이전에 낸 것이 『금강경』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가 그걸 일일이, 한마음에서 일일이 생활이 나오는 거를 요거는 요렇고 저거는 저렇고, 아버지 노릇 할 때는 어떻고 남편 노릇 할 때는 어떻고 형제 노릇 할 때는 어떻고, 요걸 일일이 따진다면은 이 마음법은 언제 배웁니까? 한마음에서 모두가 찰나찰나 바뀌면서 돌아가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로 구성돼서 부처라고 내놓은 것이 마음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그 마음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부처인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볼 수 있기 때문에 부처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듣기 때문에 부처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응신(應身)이 돼서 나투기 때문에 부처인 것입니다. 수없이 진화되는 그 나툼이 얼마나 찬란하고 얼마나 묘한가. 여러분이 연기법(緣起法) 연기법 하지만 진짜로 실천을 해보지 못한 분들은 연기법이라는 이름만 들었지 한 번도 관여해서 실천해보지 못한다면 도무지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면은 우리가 본래 그렇게 할 수 있게끔 돼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못 믿기 때문이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무시하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즉 말하자면 콩싹이 콩씨를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콩싹은 머지 않아서 싹이 없어질 텐데도 불구하고 콩씨를 무시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콩씨라는 것은 아주 영원한 것입니다. 콩씨라고 했다고 해서 또 콩씨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인간의 근본 종자를 말하는 것이니깐요. 그것을 콩씨로 비교한 건데 콩씨 하나 가지고 이 세상만사를 다, 일체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콩씨 하나가 되남더라 이런 말입니다. 어때요? 틀립니까? 심어서 먹이고, 다 먹고 나면 또 심어서 또 먹이고 영원토록 그 콩씨는 남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불성의 에너지는 영원한 것이지 늘고 줄지도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다 죽는다 하더라도 그 불성의 에너지는 그대로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생명만, 즉 말하자면 하천세계의 모든 중생들의 생명만 생명이 아니라 이 전체가 생명입니다. 바람도 생명이요 비도 생명이요 물도 생명이요 눈도 생명이요. 이 공기력이 어디로부터 이렇게 광대하게 나오며 어디로부터 이렇게 광대하게 생명들을 살리며, 어디로부터 광대하게 이렇게 천차만별로 화해서 바꾸어지면서 찬란하게 꿈을 키우느냐 이겁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면은 ‘나는 무기력하고, 나는 죄가 많고, 나는 업보가 많고, 뭐가 많고 뭐가 많아서, 나는 빌어야만 되고, 기도해야만 되고, 백팔배 해야만 되고, 삼천배 해야만 되고.’ 이런 것 때문에 막아지는 겁니다. 다 막아지죠. 자기 마음이 자기를 막아놓고 자기가 뛰려고 그러면 뛰어집니까?

우리가 이 공부는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공부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거를 알라 했습니다. 그 도리를 알라. 인간이 그런 도리를 모른다면 하(下)의 동물하고 고등 동물하고 무엇이 다를 게 있습니까? 또 한 가지 이차적으로요, 우리가 이것을 믿고 행해야 된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어떻게 해야 건강하고 또 어떻게 해야 발전을 시키면서, 어떻게 해야 내가 움죽거리는 것 하나하나까지도 빛이 되게 할 수 있느냐.

내가 가끔 이런 말을 해요. 네 집이 비어서 주인이 없다면, 이 마음이 부처인데 내 심안에 진짜 주처를 두지 않고 바깥으로 끄달리고 이렇게 돌아간다면 그런 사람에 한해서는 집이 빈 거라고 말입니다. 집이 빈 거와 같은데 만약에 댁이 사는 집들을 싹 비워놓아 보세요. 집 없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치우지도 않고 건사하지도 않아서 그냥 거미줄도 슬고, 뭐 벌레도 생기고 좀도 슬고 뭐, 이만저만 야단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집은 썩어서 허물어지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렇듯이 내 주처에, 내면세계에, 이것도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내면세계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면세계! 여기도 발전을 하면은 무지하게 발전이 되고 집을 비워놔서 막 녹이 슬게 하고 그렇게 된다면, 뭇생명들이, 악종의 생명들이 알을 까서 수만 개로 만들어서 그 집은 없어지고, 그 집 모습을 악종의 집으로 만든단 말입니다. 거짓말로 알지 마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에 잣대를 대려고 하지 마시고
남의 마음에 잣대를 재서 항상 둥글고 자비스럽게,
몰라도 깔보지 말고 알아도 높이 보지 말고
항상 둥글게 해나가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씀씀이대로 이 안의 의식들은 따라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생각 하기가 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서 현실에 나오는 것을 내가 되놓으라고 그러는 것은, 예전에도 얘기했듯이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된 것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있는 거다. 그건 다스리는 선장이 있는 거다. 그래서 몸속에 있는 모든 의식들을 다스리는 주인이 있어서 나의 의식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억제하고 또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모든 상황을 봐서 ‘이럭하면 안 되지.’ 한다면 그것이 바로 다스리는 겁니다. 강력하게 다스리는 그런 주인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주인이 없다면 애들만 있는 집에 애들이 친구들이라고 막 끌어들여서 집을 수라장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왜 이런 게 있죠. 두꺼비가 말입니다, 큰 구렁이한테 가서 너불너불 약을 올립니다. 약을 올리면은 안 먹으려고 애를 쓰다가, 자꾸 그냥 입을 치고 쫓아다니며 약을 올리고 그러니까 부아가 나서 나중에는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덥석 물어서 삼킵니다. 그러면 자기가 구렁이라는 위치를 그냥 망각하고 다 버리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은 그 뼈 마디마디마다 두꺼비로 나오니깐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거 한 건에 대해서만 얘기하면 다 알아들으시겠죠? 내 집 속에 세균이라든가 모든 악종의 세균이 자꾸 바깥에서 끌어들이기도 하고, 안에서 일어나게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먹히는 척해가지고 그쪽에다가 자기 거를 부화를 시킨단 말입니다. 이거 아무렇게나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나쁜 거를 잡아먹고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군사들한테 가서 집적거려서는 그 군사한테 먹힙니다. 예를 들어 말을 하자니깐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어서 이럽니다. 먹혀가지고 거기서 자기 알로 부화를 크게 해가지고 그게 커지면은 백혈병이니 뭐니, 병원에서도 참 어려운 그런 문제들이 형성되는 거죠. 이게 좀처럼 해서 되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서운 도립니다, 이게. 악성으로 돼 있으니까, 벌써 그게 생기려면 발끝과 손끝에서부터 생깁니다. 피를 빨아먹기 위해서, 그게 성장하기 위해서. 그것이 좋지 않다는 거는 내가 말로 하면 또 그렇게만 알아들으실까봐 말은 못하겠지만, 그게 좋을 법한 일입니까? 자기 분신을 싹 쳐 싸그리 그냥 없애버리는 망종한 일들인데. 그러니까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극히 어려우니라.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진짜 사람 되기가 극히 어려우니라. 진짜 사람이 됐다면 부처 되기가 그렇게 또 극히 어려우니라, 이런 겁니다.

우리는 ‘시대가 이렇게 지금 신세대로서 발전이 되고 그랬는데 그까짓 게 다 뭐야.’ 하면은 자기가, 자기 몸뚱이가 자기 근본 종자를 무시하는 것밖에는 안 되죠. 아까 얘기했듯이 콩싹이 콩씨 무시하는 것밖에 더 됩니까? 내가 나의 고깃덩어리를 믿으라고 그랬습니까? 부처님의 형상을 믿으라고 그랬습니까, 이름을 믿으라고 그랬습니까? 허공을 믿으라고 그랬습니까? 자기를 이끌어가는 자부처 불성(佛性)을, 진짜 종자를 믿으라고 그런 것 아닙니까? 그것을 믿다보면은 이 부처님의 형상이 달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움죽거리고 보고 듣고 이렇게 무쌍하게 발전하는 거기에 있고 여러분이 그 역할을, ‘앉아서도 천리 만리를 다 뛰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부터, 내 종자부터 내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종자를 심어서 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정자 난자를 빌려서 나게 해야 되지 않느냐, 종자가 있다면. 이건 밭이니까. 그래서 그 콩씨를 하나 심으려면 흙과 수분이 필요하죠. 수분 없는 흙에서는 나오지 않으니깐요. 또 수분만 있고 흙이 없어도 아니 되니깐요. 그래서 싹이 나왔는데 여러분은 과거로 돌아가서 콩 종자를 찾으려고 애를 쓰니 어디 가서 찾습니까? 콩 종자는 벌써 화(化)해서 자기 싹으로 화했는데. 그거 아십니까?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깐 없다.' 하는 뜻이 그런 뜻에서 있는 겁니다. 콩이 콩싹으로 화해서 네가 됐으니 현재에 있는 거지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다 이런 겁니다.

여러분은 저보다도 더 잘 배우시고, 여러분은 저보다도 더 넉넉하시고, 또 지혜롭고 여러 가지로 볼 때에 정말이지 숭배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왜? 나는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배우질 못했으니깐요. 여러분뿐만 아니라 돌 하나 풀 한 포기도 내 스승 아닌 게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는 이만하면은, 아이그, 내가 그까짓 불법, 부처님 법이라면 내가 위로 꿰고 옆으로 꿰고 가로 꿰고 해도 다 알어.’ 이렇게 하지 마세요. 하나하나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내가 나왔기 때문에 하나를 보고 느끼고, 하나를 보고 잘못된 거를 알고, 하나를 보고 잘된 거를 알고, 내가 이럭하면 안 되지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럭하면 되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상대성 원리가 나로 인해서 생긴 거지 어떻게,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데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여러 가지 방편을 써서 여러분한테 말씀을 해드리려고 해도 난 그렇게 배운 게 유창하지 못해서, 말하자면 지금 현실의 용어를 적당하게 둘러댈 줄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떡합니까? 그저 이걸로 끌어대고 저걸로 끌어대고 이렇게 해서 근근히 해갑니다. 그러나 방편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건 진실한 문제입니다.

아까 여러분한테 내 몸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바깥에서 들어오는 문제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면서, 어떻게 대치해나가면서, 어떻게 굴리면서 어떻게 발전을 해나가느냐는 얘기를 했죠? 생각하면은 아주 겁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한 번도 그런 데 대해선 생각해본 일도 없이 가는 분들도 많은 반면에, 나는 될 수 있으면 어떡하든지 이것을 알게 해서, 자기가 대치해나갈 수 있게끔 만들려고 무지 애쓰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어떤 땐 눈시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뜨거울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잣대를 대려고 하지 말고, 남의 마음에 잣대를 대서 둥글게 항상 자비스럽게, 몰라도 깔보지 말고 알아도 높이 보지 말고, 항상 둥글게 해나가십시오. 우리가 내 한마음을 쓰는 대로 이 안의 의식들은 따라갑니다. 여러분의 마음 씀씀이대로 따라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생각 하기가 극히 그렇게 어렵죠.

많은 분들이 그러죠. ‘스님, 내가 여기서 다닐 때는 그걸 몰랐는데 외국에 나와서 외롭다 보니깐 스님을 자주 찾게 되고 아, 그냥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아주 간절하게 하게 됩니다. 학교 칠판에 써놓은 걸, 말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고 그럴 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스님을 부르고, 이거는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간절히 그렇게 하고 가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게 남보다 떨어지지 않고 그냥 대처해 나가겠더라.’ 이러는 겁니다.

어느 때는 자기가 방을 얻어가지고 있는데 그 안집에 도둑이 들어서 자기 방에까지 왔다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가긍한 시 한 수를 책상 위에다 써놨는데 그거를 봤나보더래요. 펴진 대로 그냥 있더래요. 그 시 한 수 읊어 놓은 걸 보고는 거기다가 돈을 천 불을 놓고 갔더랍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자기의 그 마음속에 있는 걸, 눈물어린 그걸 시로 그냥 읊었는데 그걸 보고 천 불을 그냥 책상 위에다 놓고 갔더랍니다. 이런 예가 있다는 것을 편지로 해서 나한테 전달하면서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하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너무 불 밑에 있으면은 불빛이 어떤지 몰라도 불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은 그 밝은 줄을 압니다.

그렇듯이 자기와 자기 콩씨가, 콩씨하고 콩싹하고 너무 가깝게 붙어있기 때문에 도대체 자기 콩씨를 모르는 거예요, 너무도 가깝게 있기 때문에 너무도 좋은데, 시시각각으로. 그래서 이 공부가 웬만큼 돼서 감응이 되면, 어떤 사람은 바깥에서 단전을 하고 그냥 귀로 뭐가 들리고, 그냥 머리로 나오고, 온통 야단법석이 난다는데 이렇게 관(觀)하고 들어가는 사람들한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귀로 들리거나 그런 법도 없어요. 마음으로 발전이 돼서 자꾸자꾸 스스로 알아지고 스스로 느껴지고, 스스로 봐지고 스스로 해지고 그러는 거지. 또 삼차적으로 한마디 하겠어요.

이 공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여러분은 아마 생각조차도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라든가 또는 우주 전체, 행성이라든가 혹성이라든가 별성, 그 모든 자체가 그대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수명이 짧지만 또 우리 인생보다도 더 짧은 생명들이 많죠? 우린 그거보다도 수명이 좀 긴데, 수명이 아주 긴 별성들도 그렇고, 혹성들도 다 하나하나의 세계가 있고, 하나하나의 작용이 있고, 하나하나의 수명이 있단 얘깁니다. 우리가 우주와 직결이 돼 있다는 것은 그 에너지가 즉, 불성과 불성끼리 하나로 돌아가는 에너지가 너무 광대하다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공부에 정말이지 마음을 기울여야 될 이치가 있는 것은, 가만히 보니깐 전 세계를 다 돌아다녀봐도 즉각적으로 이렇게 내 콩싹이 콩씨를 찾는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적어요. 없어요. 전부 기도하고, 전부 상대를 믿고 기도하고 모두 달라는 거지, 직접 자기 콩싹이 콩씨를 근중하게 생각하고 내면세계를 발전시키고, 내면세계에서 발전해서 그 중심에서 중용으로써 가차없이 대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하는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생각할 땐 여러분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리가…, 공부라는 건 이름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상대가 알아듣게끔 하기 위해서 이름을 부르는 거지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태양이라든가 그 옆에 수성이라든가 금성이라든가, 이 우주라든가 또는 은하계라든가 이런 문제가 다 결부돼 있거든요. 결부돼 있는데, 만약에 어느 것이 수명이 다 돼서 타버린다든가 팽창된다든가 이런다면은 우리 이 지구에 붙어서 사는 생명체들은 물론이거니와 모두가 같이 전멸하게 되는 이치가 또 있다 이 소립니다. 또 이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가 다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뿐만 아니라 불성의 세계 모든 데서 자동적으로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면서 이게 벌어졌다 오므라졌다 작용하는 그 이치가 있기 때문에 이 지구도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 지구에서, 아니 한국이라고 합시다. 일본도 그렇고 영국이나 뭐 다 있지마는, 우리 한국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하면은 조그마한 일이라면 모르겠지마는 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딴 데서는 물에 가라앉기도 하고 물에 없어지기도 하고, 불쑥하게 솟았던 것이 가라앉기도 하고 또 가라앉았던 게 불쑥 솟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기울어지기도 하고, 벌어지기도 하고 붙기도 하고, 붙을 데 또 그냥 가서 붙는 게 아니라 잘못 어긋나게 붙기도 하고, 화산이 일어나고 온통 때때마다 그렇게 우리가 지금 움죽거리는 것처럼 그렇게 그 자체도 움죽거리고 있는 겁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5년 7월 16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892호 6월 13일자 게재)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