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기 있게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 삽화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이 여섯 번째, 부처님 법설입니다. 스님네들도 알아둬야 할 일이고 또 스님네들을 따라가는 분들도 알아둬야 될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때 당시의 용어를 방편으로 쓰시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것도 한문으로다가 다 해놨습니다. 그때 상황에는 그랬으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지금, 스님네들은 반드시 그것을 끌어내려서 잘 뜻으로써, 이 글자 풀이만 해서도 아니 되고 글자 풀이로만 해서 말만 해줘도 아니 된다 이겁니다. 또 한문으로도 남이 알아들을 수도 없고 감응도 되지 않게끔 그냥 읊고 내려가는 것도 아니 된다 이겁니다. 단, 있다면 뜻으로 풀어서 요리를 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해놓고 잘 맛있게 집어먹을 수 있도록 설을 해주는 것입니다. 정신계와 물질계를 쌍방을 둘로 보지 않는 설법을 그대로 누구나가, 어느 사찰에서나 어느 스님네든 관법(觀法)을 가르치면서 모든 것을 해나가야 됩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자기로부터지 누구로부텁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기부터 알아야 하고, 자기 몸뚱이 속의 자생중생들이 먼저 깨어나야, 즉 말하자면 자기가 전체가 깨어나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일곱번째, 각각 기도해주는 문제입니다. 허허허. 지금 각 사찰에, 그렇지 않은 절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정성을 들이러 오면 개개인의 독불공을 들여줍니다. 독불공을 들여달라고 하는 사람이나 독불공을 들여주는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지금. 아까도 얘기했듯이 초, 향, 물 떠놓고 밥 한 그릇 공양을 올리는데, 그래서 공양입니다. 공양을 올리는데 이 스님네들 사시마지 때에 공양 한 그릇 올리면 그 밑으로다 그저 늦게 왔든지 일찍 왔든지, 자기의 소원은 자기가 해야 돼요. 누구가 해주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님네들이 대신 밥 먹어줄 수 없어요. 여러분이 배가 고픈데 여러분이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른 거지 스님네들이 대신 먹어준다고 해서 여러분이 배가 부릅니까? 모두 이거는 중요한 문제여서 아주 침착하게 생각해봐야 할 점입니다. 그러니까 내 거는 내가 해야죠. 스님네들은 공양을 올려드리면서 사시마지 때 통신을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러이러한 사람이 왔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은 모든 사람은 자기의 소원대로 그 생각을 주인공에다 맡기면서 모든 걸 관하는 그 마음씨가 돼야 되겠죠? 그러면 바로 우주간 법계(宇宙間法界)의 일체제불에게 모두가 전달이 돼서 한 찰나에 나투어주신다 이겁니다. 나투어줘서 그렇게 밝게 살 수 있게끔 되는 과정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거를 모르고 스님네한테 독불공을 해달라, 뭘 해달라 하고 조른다면 그건 너무나 뒤떨어진 사람들의 의식이요, 어리석은 사람들의 마음이요, 이거는 지금 세상에 뒤떨어진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아까도 예금통장 얘길했지만, 여러분이 초나 향이나 또는 쌀이나 돈이나 가지고 올 때 여러분이 가져와서 그냥 재탕 여러분이 하고 간다면, 한 푼도 에누리가 없어요. 근데 스님네들더러 우정 해달라고 한다면, 목탁 두들기고 독불공을 해달라고 한다면 그 염불을 해주는 대가가 가야 되거든요. 대가가 가니깐 자기네한테 공덕이 갈 것이 그냥 없어지는 거죠, 자꾸. 그러니까 쌀 한 됫박 가져왔다 하면은 반 됫박은 스님네한테로 가야죠. 삯으로 말입니다. 하하하. 그러고 반밖에 안 남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생각을 깊이깊이 하셔서 스님네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 또 우리가 믿고 따르는 마음. 그러나 그 믿고 따르는 마음과 또 스님네가 내주는 조건 없는 사랑의 마음과 내 주인공의 모든 게 한마음으로 찰나찰나 쉴 사이 없이 돌아가니까,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니 어찌 더러운 물이 새 물로 안 되겠는가 하는 겁니다.

업이 본래부터 붙어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각의 생각 자체입니다. 그러고 ‘이사를 가면은 날짜를 봐서 가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잠재해 있을 뿐입니다. 남이 그렇게 했으니깐 그걸 보고 듣고 말입니다. 그리고 ‘손이 있는 날 가서 안 된다는데….’ 하고 또 즉 말하자면 ‘삼재가 들었으면 사람이 아프고 죽을 수도 있고 그런 애고가 닥친다는데….’ 하는 그 관습입니다, 인제 이게. 그게 바로 잠재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죠. 그게 모두 잠재해 있으니깐 이사를 가려도 걱정, 뭐 삼재가 든다고, 왜 보기는 또 보는지. 허허허.
보고선 그냥 걱정을 하고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하는 약한 데에 들어오는 거지, 싸우는 데 약한 사람이 지는 거지 강한 사람이 집니까, 예? 약한 사람에게 칼이 들어오지 강한 사람에게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약하게 생각하는 반면에, 이 속에 들어 있는 의식들도 다 약한 걸로 돼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그냥 한꺼번에 무너지는 거죠. 그러니깐 딴 데서 세균이 들어와도 되고, 영계성이 들어와도 되고, ‘이거는 내 판이야.’ 하곤 그냥 남의 집을 막 뺏는 거죠, 그냥. 이거 정말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지금 일곱째 얘기하다가 그냥 내내 얘기하는 거죠, 지금. 각각 독불공 말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그렇게 우리가 약하게 생각을 해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러니 약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내 밥은 내가 먹어야 배가 부르다. 내가 가다가 엎드러졌으면 내 발로 내가 짚고 일어나야 된다. 누구가 '저 사람 불쌍하니깐 대신 먹어준다.' 이럭해서 배부른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잘 침착하게 생각하셔서 그대로 실행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여덟째는, 부적이나 관상입니다. 이 부적은 예전엔 너무 사람들이 모르고 사람이 지금처럼 이렇게 많았던 게 아니라 한번 이렇게 마을이 있으면 한 십리 나가면 또 마을이 있고 이럴 때입니다. 이럴 때에 어느 스님이 지나다 보니 저 마을이 필연적으로 사태가 나서 마을이 다 죽게 되는 이런 이치가 보이거든요. 참, 그 산 부처님이죠. 그래서 이 스님이 그 사람들이 모르니깐 방편으로 종이에다가 써가지고선 "이거를 붙이고 어느 날 어느 시에 피신을 해라." 이렇게 일러줬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부적을 믿게 됐죠, 이제. 스님을 믿고 따르게끔 만들기 위해서 방편을 쓴 거죠. 스님의 말을 안 들으면, 즉 전깃줄과 전깃줄이 한데 합쳐지지 않으면 불이 안 들어오니까 전깃줄과 전깃줄이 한데, 마음과 마음을 한데 붙이기 위한 방편이죠. 그래서 그렇게 해놓고 방편을 쓴 것인데, 이제는 장사가 돼버렸죠. 얼마짜리 얼마짜리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야 이게 무슨 효득이 있겠습니까? 그냥 도깨비 장난이요, 귀신짓이요, 모두가 독불공 들여달라고 해서 들여주는 사람도 도깨비 장난입니다, 그게 다, 모두가.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주신 그 뜻과 가르침을 진정코 제대로 받아서 행하지 못하는 소행입니다.

그러고 관상이라 하는 것도 이렇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심상을 올바르게 가진다면 관상도 좋아질 거고, 하하하, 수상도 좋아질 거고 족상도 좋아진다 이겁니다, 심상 하나만 좋으면. 잘나고 못나고 이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심상 하나가 좋으면은 모두가 이 얼굴 자체도 전부 웃게끔 돼요. 그리고 심상을 잘못 쓰면은 손 장난도 나쁘게 나가죠. 걸음걸이도 나쁘게, 나쁜 일 하려니깐 막 돌아가죠? 그러니깐 족상이 나쁜 거고 수상도 나쁜 거고 관상도 나쁜 거죠. 그러니깐 심상 하나만 올바르게 생각을 잘 해낸다면 관상도 수상도 족상도 다 좋으니라. 이래서 공덕이 되느니라. 그러니 족상이니 수상이니 관상이니 볼 게 아니라 심상 하나만 진짜로 잘 보고 잘 쓴다면 이거는 세세생생에 공덕을 이룰 것이니라, 이런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생각해보면 허탕한 짓들을 하고 있다 이 소립니다. 보면 병이고 안 보면 약이에요. 때에 따라서는 모르걸랑 아예 보질 말아요, 허허허. 차라리 모르면은 편안하게 마음을 둠으로써 편안한 일이 닥칩니다. 그런데 이거를 ‘아이구, 올해는 뭐가 또 언짢지는 않을까?' 하고선 가서 온통 관상도 보고 부적도 사고, 뭐 또 점도 치고 이렇게 보죠. 그러면 좋은 거는 세 가지라면 언짢은 건 일곱 가지나 돼요. 하하하, 그러니 누가 언짢고 누가 언짢고 누가 좋고 이러니까 하여튼 그냥 나올 수는 없죠.

여러분 마음에는 지금까지 살아나온 관습들이 잠재해 있죠?
또 이 마음속에서 일어나죠?
또 바깥에서 보고 듣고 일어나죠?
그러나 그 일어나는 자체를 망상이다 업보다 이러지 마세요.
그건 바로 자기네들이 자기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자꾸 요런 생각도 저런 생각도 나와야
성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지
아니, 요런 조런 생각이 나오지 않는다면
목석이지 그게 사람입니까?

그런데다 그냥 나올 수 없어서 주고 나오는 건 또 좋아요. 와서까지도 이 뇌리에 아주 알쏭달쏭하게 잠재해 들어가죠. 그러면은 이걸 어떡합니까? 조금만 일이 안돼도 ‘아이구, 그걸 안 해서 그렇구나!’ ‘아이쿠, 이것이 이렇게 돼서 그렇구나!’ 아, 이렇게 인생을 살아나가기 복잡하지 않아요?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먹고 살기도, 아주 올바로 먹고 살기도 급급하고 참 고통스러운데, 하물며 왜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가지고 고통을 받느냐 이 소립니다.

애고나 질병이나 망상 같은 거, 업보 같은 거 이 모든 것이 애당초부터 붙어있던 게 아니죠. 아까 말했듯이 여러분에게 잠재해 있는 그 관습 때문에 아이구, 요런 건 요렇게 생각을 하고, 요런 건 요렇게 생각을 하고, 요거…. ‘아이구, 내가 무슨 죄가 이렇게 많기에 이래?’ ‘에이그, 죄를 그래도 많이 졌기에 그렇겠지.’ 하면서 이제 생각이 되는 겁니다. 급한 일이 생기거나 어떠한 애고가 생기면은 더 그런 마음이 일어나죠. 즉 그 일어나는 마음이 그 업보를 가져오는 겁니다.
항상 내가 이런 말을 하죠.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간다고. 시공이 없이 돌아간다고. 그렇게 빨리 돌아갑니다. 빨리 돌아가는데 업보 붙을 자리가 어딨고 아니, 우리들이 마음이 쉴 자리가 어딨고, 거기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딨습니까? 아니, 세상이 정맥 동맥이 막 똑딱 똑딱 똑딱 똑딱 그냥 막 뛰고 돌아가는 판국에 거기 어디에 붙을 자리가 있다느냐 이 소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음에는 살아나온 관습들이 잠재해 있죠? 또 이 마음속에서 일어나죠? 또 바깥에서 보고 듣고 일어나죠? 이러니까 일어나는 그 자체는, 그것이 망상이다 업보다 이러질 마시고요,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자유인이 될 수 있는 100%다 이런다면, 자꾸 생각이 나와야, 요것도 나오고 조것도 나오고, 요것도 보고 조것도 보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나올 수 있어야 목석이 아니지, 그리고 성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지, 아니 요런 생각 조런 생각이 나오지 않는다면 목석이지 그게 사람입니까? 하하하. 아, 그것더러 망상이라는 거예요.
바로 자기네들이 자기를 발전시키기 위한 이 자생중생의 업식들이, 업식들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자생중생들이 자기가 자꾸 생각을 나오게 하는 건데 그 나오게 하는 것을 업보니 무슨 망상이니 이러니까, 퇴박을 하니까 ‘에이, 망상이라 그러는데 망상 좀 실컷 해봐라.’ 이러곤 그냥 망상으로 밀어가는 거죠. 아, 생각해보세요. 회사엘 다니면서 극진히 정성스럽게 하는데 ‘너는 요놈아 도둑놈, 너는 요놈아, 만날 그래도 그런 것도 못해?’ 하면서 만날 지청구하고 그렇게 해보세요, 정말 도둑놈 됩니다. 네? 그와 같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여튼 여러 가지를 말씀해드렸는데, 불교라는 이 단어는 포괄적인 불교기 때문에 일체 생명 어느 거 하나 불(佛) 아닌 게 없으며 말로 전달, 뜻으로 전달, 통신으로 통신, 마음과 마음이 전달, 이렇게 해서 시공이 없이 돌아가는 이 자체가 바로 교(敎)입니다. 그러니까 이 불교라는 이 자체 단어가 너무나 실감이 나고 실천적이고 실행적이고 또는 진리적이고 아주 타당한 이름이죠, 이름만으로도. 예전에 이조 때에 탄압을 받아서 우리가 산속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부처님 한 분만 모셔놓고 하면은 그 앞에만 갖다놓으니까, 여기도 놓고 저기도 놓으라고 방편으로 그렇게 써먹었으면, 지금 이 시대에서는 개선을 해야죠. 그렇죠? 잘못된 거는 고쳐가면서 써야죠.
그런데 한마디만 더 하고요. 옛날에 부처님한테 어느 제자가 이렇게 물었답니다. “내가 맑고 깨끗한 하늘 눈으로 보니까 여인들은 지옥에 떨어지는 율이 너무 많으니 그건 무슨 까닭이며 또는 여인들에게는 계율을 많이 매기니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이며 또 여인들은 성불하기가 극히 어렵다 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지 그 세 가지가 너무 궁금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흘러가고 바람을 거슬러가진 못하는데 거슬러가는 향도 있습니까? 그게 참 궁금합니다.”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물론 부처님께서나 또 깨달은 분들께서 이렇게 대답을 했겠죠. “그래, 그것이 지금 현 시점의 마음으로 인해서 오는 것이니라. 지금은 남정네들이 열 처를 둔다 하더라도 말 한마디 못하고, 여자들이 함부로 바깥에 출입을 못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 탐욕과 집착과 미움과 증오 또는 애욕, 정욕, 질투 이런 것이 여인네들 마음속에 꽉 차있으니 어찌 성불하기가 쉽겠느냐? 그러니 잘 생각해서 계율을 줘야지 되지 않겠느냐? 또 지옥에 많이 떨어지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니라. 그런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섯 가지 마음의 계향(戒香)을 마친다면 자재천(自在天)에 들어 아주 자재로이 이 계율도 더했다 덜했다 이런 것도 없을 것이지마는 지옥에 떨어진다 안 떨어진다도 없을 것이니라. 성불을 한다 못한다도 없을 것이니라. 여자 남자도 없을 것이니라. 이 모두가 길고 짧음도 없을 것이고 어제 오늘 내일도 없을 것이니라. 그러니 그 까닭은 그 수행을 다 마쳐야, 끝마쳐야 되느니라.”

다섯 가지, 엊그저께 내가 오계향(五戒香)을 얘기했죠? 이 세상에 내가 났으면 바로 내 탓으로 일체 만법을 돌려라. 그런다면은 증오도 미움도 없을 것이다. 그러고 세상법에 누(累)가 되게 하지도 않을 것이며, 계율을 지킨다 안 지킨다도 없이 계율을 지키게 돼 있고, 바로 자기도 누가 되지 않게 할 수 있다. 둘째, 이 모든 것을 내가 난 탓으로 돌리니까, 모든 게 나로 인해서 생기고 들고 나고 하는 걸 알게 됐어. 그래서 모든 것을 ‘잘못되는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잘되게 나오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거기다가 놓고 잘 되는 거는 감사하게 놓는 그 마음이, 패기있게 물러서지 않는 그 마음이 들어야 된다. 그 마음이 듦으로써 지혜로운 마음이 생긴다 이거야. 그래서 내면세계와 물질세계를 둘로 보지 않는 관찰 그리고 체험, 그렇게 해가는 것이 셋째.
또 넷째, 그렇게 둘이 아니게 관찰을 하고 체험을 하고 가니까 그냥 자동적으로 내 자생중생의 무명, 수억겁을 거쳐나오면서 얽히고설킨 그 무명이 묶여있던 것이 스스로 풀어진다 이거야. 스스로 풀어지고 스스로 묶였던 게 풀어지니까 여여하게 다스리고 그냥 나갈 수 있다. 그러니까 바깥에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도 무명이 나에게 닿기만 하면 그 무명이 무너진다 이거야.

다섯째, 이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이 모든 삼라만상 만물만생, 그 만물만생을 느끼는 거. 느끼는 거는 마음으로 항상 느끼죠? 느끼고 보살핌이 항상 밝아. 여여하고 항상 밝고 걸림이 없어. 그래서 구족(具足)함을 해탈지견향! 거기까지 마쳐야만이 여자 남자도 없고, 더하고 덜함도 없고, 즉 말하자면은 성불을 한다 못한다도 없고, 지옥에 떨어진다 안 떨어진다도 없고, 계율을 더 준다 덜 준다도 없고, 모두 이런 것이 소멸되고 자재천(自在天)에 들어서 자유롭게 나툴 수가 있느니라.
그러나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고 바람을 거슬러가지 못하는데, 거슬러가는 향이 있습니까? 하고 아까 물었다고 그랬죠. 그랬는데 그것은 그 다섯 가지 향, 그 다섯 가지 계향을 마치고 난 뒤에도,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믿음이요. 둘째는 전체 놓는 거야, 우리들 지금 놓듯이. 다 어떤 거든지 다 놔서 다 버리는 거다 이거야. 다 놓는 거야. 다 놔서 다 얻는 것을 둘째라고 한다. 다 놔서 다 얻는 것! 다 놓게 되면은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문제가 나와요. 그러면은 다 놔서 다 얻은 거를 둘째.

셋째는 다 놔서 다 얻었다면은 모든 일체 중생들이 다 너 나 할 것 없이 보시를 달라고, 천차만별로 달라고 하더라도 다 조건 없이 줄 수 있는 그런 것이 완결돼야 바로, 그 바람을 거슬러가는 향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기만 할 수밖에 없다. 바람을 거슬러가는 향도 있는 것은 그 다섯 가지의 계율(戒律)을 다, 마음의 계향을 다 마치고 또는 세 가지 조건까지도 마치고 난 뒤에야 거슬러가는 향이 있느니라. 그러니 그때 가서는 거슬러간다 거슬러가지 않는다도 없느니라. 사방팔방에 모든 향음이 어느 법계에나 어느 일체 중생에도 닿지 않는 데가 없기에 그 종소리가, 종을 치면은 종소리가 났는데 그 종소리를 일체 만물이, 만물만생이 다 듣듯이….

그래서 그 모두가 우리가 마음의 문제요, 마음을 계발하고 또는 발전시키는 데 문제요, 발전시키려면 잘 이롭게 발전을 시켜야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렇게까지 마친 사람에 한해서는 사방이 툭 터졌을 것이요, 지붕도 없을 것이요, 땅도 따로 없을 것이요, 그러니 평등공법(平等空法)이면서 활궁공법(活宮空法)이면서 또는 수레공법이야. 우리가 가만히 있을 때는 평등한 공법(空法)이요, 우리 맷돌 얘기 가끔 하죠? 맷돌이 추가 움죽거리진 않아요. 뭐든지 갈아낼 때에 바로 이 추가 움죽거리는 게 아니라 능력만 배출시키죠. 그렇죠?

그런데 이 마음으로써 다스려서 거기 놓는다는 게 맷돌에 어느 물건이든지 다 거기다 맷돌에다 넣어서 갈아내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그 추는 주인공이다 하면은 그 주인공이라는 그 이름 자체가 바로 추는 움죽거리지 않는 불성을 말하고, 그 움죽거리고 돌아가서 갈아내는 거는 법을 말하고 또 이 갈아내게끔 할 수 있는 마음 자체의 다스림은 바로 갈아내는 거다 이걸 말하죠. 그래서 그걸 종합해서 주인공이라고 이름했다면, 진짜 여러분의 실상이면서 실체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여러분을 무시하지 마시고 ‘나는 몰라서, 업보가 많고 그렇다.’는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고, 자꾸 의식적으로 돌아가니깐 말입니다.

※위 법문은 1993년 5월 16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889호 5월 23일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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