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섭 교수의 삼국유사 인문학 유행 <4>

삼국유사 일연 문화제 장면
고조선에는 독자적인 ‘문자’가 있었을까?

고조선에서는 기록 전담 관직 운용

신지선인은 종교 소임까지 병행해

고조선의 역사관 남달랐던 일연

기자 사대사상에 반감 갖고 서술

단군조선 자긍심 높이기 위해 위만조선 조목 추가한 일연 스님

1. 고조선의 기록 문화2000여 년 역사를 지녔던 고조선 사람들에게는 과연 독자적인 문자가 있었을까? 그 시대에도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하고 살았다면 설사 문자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기록문화는 있지 않았을까? 1988년 경남 의창군 다호리(茶戶里) 고분에서 기원전 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청동기와 철제 농구 및 제기와 칠기 등과 함께 출토된 ‘다섯 자루 붓’은 중국 한나라 시대에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문자의 필사용 필기구였다. 때문에 이들 붓은 두 나라 사이의 교역에 필요한 서류를 만드는 것으로 짐작된다. 또 내몽고 자치구 옹우특기 석책산 유적, 요녕성 여대시의 윤가촌 유적 및 비자와 고려채 유적, 함경북도 나진시 초도 유적, 평양시 남경 유적 등에서 출토된 질그릇에는 부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해서 이들 부호들이 발전해 문자로 정착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들 몇몇 고고학 자료들과 유적들은 고조선 말기에 필묵을 사용한 기록문화가 지방 곳곳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고조선은 기록을 전담하는 신지(神誌)라는 관직을 두었다. 당시 사람들은 기록을 담당하는 이를 ‘신지선인’(神誌仙人)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신지가 시적(詩的)으로 기록한 저술을 〈신지비사(神誌秘詞)〉라고 했다. 선인은 고조선에서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호칭이었다. 때문에 신지선인은 기록관일 뿐만 아니라 종교 소임도 맡았던 인물로 이해된다. 문자를 다루는 사람은 고대사회에서 대개 영향력을 지닌 지식인이자 종교지도자였다. 조선 선조 (1583) 때에 평양의 법수교(法首橋) 밑에서 세 조각 난 비석이 발굴된 적이 있었다. 이 비석에 새겨진 문자는 중국과 인도의 문자와 다른 것이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 문자를 단군 때 쓰던 신지문(神誌文)으로 보는 이도 있다고 〈평양지(平壤誌)〉는 적고 있다. 현재 단군의 가르침을 적은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도 고조선의 신지가 단군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일연은 〈삼국유사〉 권3의 흥법편 ‘보장봉로 보덕이암’ 조목에서 고구려의 개소문(盖蘇文)에 대해 “〈신지비사〉의 서문에서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과 함께 주석했다’고 했으며, 소문은 관직명이니 문헌으로 증명된다”고 했다. 또 〈고려사〉 김위제열전(金謂列傳)에도 김위제가 (평양) 천도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숙종(肅宗)에게 올리면서 〈신지비사〉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해야 한다[弘益人間]의 이념뿐만 아니라 “저울(대·추·꼬리)처럼 머리(極器)와 꼬리의 자리가 균평(均平)해야 나라가 흥하고 태평이 보장된다”는 ‘풍수지리’의 ‘균평의 이념’까지 역설하고 있다. 나아가 조선 전기의 용비어천가(제16장)에서조차도 이 기록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저술은 조선시대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조선의 기록관이 남긴 〈신지비사〉에는 고조선의 다양한 기록문화와 정제된 철학사상과 그를 바탕으로 한 풍수지리의 이념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가사로 알려진 유일한 글은 당시의 가사 공후인(??引, 또는 公無渡河歌)이다. 이것은 〈고려사〉 권122 열전 35에 인용된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님은 결국 물을 건너시다[公竟渡河]/ 물에 빠져 죽으시니[墮河而死]/ 장차 님아 이를 어찌할꼬[將奈公何]”라는 4행시이다. 이 가사는 기원전 4, 3세기에 흰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에 술병을 들고 세차게 흐르는 물을 건너려는 노인[白首狂夫]이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물 속에 뛰어들었다. 그의 아내가 공후(??)라는 악기를 타며 지아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노래를 마친 뒤 그녀도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장면을 본 낙랑군 조선현의 진졸(津卒) 곽리자고(?里子高)가 아내인 여옥(麗玉)에게 이야기하자 그녀가 공후를 타며 노래를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고금주(古今注)〉의 편찬자인 중국 진(晉)나라 혜제(惠帝; 291~307) 때의 최표(崔杓)는 이 ‘공후인’을 고조선의 가사라고 했다. 가사의 구성이나 내용으로 보아 고조선인들은 빼어난 감성과 숭고한 미학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조선’과 ‘마한’ 사이의 ‘위만조선’〈삼국유사〉 기이편 서두의 ‘고조선’과 ‘마한’ 사이에는 ‘위만조선’ 조목이 자리하고 있다. 일연은 서두를 ‘고조선’ 조목을 설정함으로써 고조선은 단군조선만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위만조선’ 조목을 설정해 한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어려움을 주었다. 위만(기원전 194~?)은 본디 연나라 사람이었다. 이때에 노관(盧?)은 연(燕)왕으로 옛 연(燕)나라 땅을 다스리게 됐다. 하지만 얼마 뒤에 한(漢)이 주위의 제후들을 시기해 제거에 나서자 연왕 노관은 미연에 화를 면하려고 한(漢)나라에 반항해 흉노 쪽으로 도망을 했다. 때문에 연나라는 한나라 군대에 점령당하면서 일시에 혼란에 빠져버렸다. 이 틈을 타서 위만은 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망명해 패수(浿水)를 건너서 기자조선의 왕인 기준(箕準)을 달래어 옛 빈터[故空地]의 수비를 하겠다고 했다. 기준왕은 위만을 믿고 박사(博士)를 삼아 서쪽 가장자리 백리[西邊百里]의 땅을 봉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망명의 무리들을 통솔하고 그들과 결탁해 세력을 확장했다. 하루는 위만이 기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나라 병사들이 십도(十道)로 쳐들어오니 자신이 성으로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했다. 성에 들어간 그는 갑자기 군사를 몰아 기준왕을 쳐서 나라를 빼앗고 스스로 조선왕이라고 했다. 위만은 ‘신조선’(위만조선)을 세우고 왕검성을 도읍으로 삼고 사방을 정복해 영토를 넓혔다. 한편 기준왕은 남쪽의 진국(辰國)으로 망명해 한왕(韓王)이 됐다. 그렇다면 위만조선을 세운 위만을 동이족의 범주 속에 넣어 우리의 역사 속에 편입시켜야 하는가? 과연 일연은 ‘고조선’ 이후에서 ‘마한’까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삼국유사〉 조목 속에 ‘위만조선’을 설정한 것일까? 아니면 ‘위만조선’을 고조선을 계승한 신조선이자 동이족의 일부로 본 것일까?그런데 두계 이병도는 위만에 대해 그가 망명해 올 때 1)상투를 짜고 조선옷을 입었고 2)요동방면에는 한인(漢人) 계통뿐만 아니라 동호(東胡)·조선인 계통의 사람이 지리적으로 보아 많이 살았을 것이며, 혼란한 틈을 타서 조선계 사람들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집단적으로 모국(母國)에 들어왔을 것이고, 3)준왕의 신임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순수한 외족(外族)이 아니었을 것이며, 4)위만조선 말기의 관직명이 조선적(朝鮮的)이었고 응소(應)가 위만조선을 융적시(戎狄視)했다는 것 등에 근거해 위만은 패수 이북의 요동지방에 토착했던 조선인계의 연인(燕人)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이홍직은 “위만이 처음에 망명해 올 때에 상투를 짜고 조선옷을 입고 왔다는 것은 그가 연인(燕人)이기 때문에 조선땅에 들어와서 정권을 잡기 위해 조선인 행세를 했을 것이라고 봄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고 했다. 위만은 고조선의 거수국인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거수국인 위만조선을 세운 연나라 사람이다. 때문에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연의 ‘위만조선’ 조목 설정은 역사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일부 국사학자들은 위만조선을 한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일연은 왜 이 ‘위만조선’ 조목을 설정했을까? 알려진 것처럼 그는 고조선의 회복을 통해 몽골 치하에서 신음하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연은 서두의 ‘고조선’ 조목에 뒤이어 ‘위만조선’ 조목을 덧붙이고 있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일연의 의식 속에서 ‘위만조선’은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로 이해됐을까? 국내의 국사학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합의를 이끌어 내오지 못하고 있다. 반면 고려 중기와 조선 초기의 학자들은 오히려 단군을 부정하고 기자를 한민족의 후예로 선양했다. 그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3. 일연의 조목 설정 이유일연의 ‘위만조선’ 조목 설정과 달리 조선초기의 일부 유학자들은 오히려 ‘기자’를 고조선을 이어 조선왕이 된 것으로 보았다. 과연 기자조선을 고조선을 이은 왕조로 볼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상서대전(尙書大典)〉에 의하면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석방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후(候)로 봉했다”고 했다.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방문해 안민(安民)의 도를 묻고 그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다. 〈한서지리지〉에는 “은나라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악(禮樂)을 가르쳐 범금팔조(犯禁八條)를 행했다”고 적고 있다. 대부분의 국사학자들은 이들 문헌 기록들을 연구 비판하고 다른 사료들과 비료해 기자동래설을 부정하고 있다. 반면 이병도는 한씨조선(韓氏朝鮮)설을 주장한다. 그는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는 ‘주나라 선(宣)왕 때 한후(韓候)가 있었는데 연(燕)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 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에게 망해 해중(海中)으로 옮겨갔다’고 기록돼 있다며, 여기서 위만에게 망한 것은 준(準)왕이니,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의 성이 한(韓)씨임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성은 기씨(箕氏)가 아니라 한씨(韓氏)이며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 것이다. 후대에 가자를 한씨의 먼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성인(聖人)을 자기의 조상으로 함으로써 가문(家門)을 빛내기 위함이었으며, 특히 기자릉(箕子陵)이 생기고 기자묘(箕子廟)가 건립된 것은 고려 때부터의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유래된 것이다”고 했다. 아마도 고려 중엽에 와서 평양에 기자묘(箕子墓)를 찾아 묘사(廟祠)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즈음부터 기자에 대한 숭배사상이 심해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도 평양시 기림리(箕林里)에는 기자릉과 묘사(丁字閣)와 비석(重修記蹟碑) 등의 유적이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고려와 조선 때 세워진 것이다. 기자묘는 고려 숙종 7년(1102)에 무덤 형태[墳形]를 찾아 제사하고 성종과 고종 때 증축한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 내려와 봉묘(封墓)한 이 묘가 과연 단군조선을 이어 조선왕이 됐다는 이른바 기자(箕子)의 묘인지에 대한 정확한 근거도 없다. 기자의 후손 우평(友平)은 기(奇)씨의 조상이 됐고, 우직(友直)은 한씨(韓氏)의 조상이 됐으며, 우량(友諒)은 선우(鮮于)씨의 조상이 됐다고 한다. 고려 중기 이후 생겨난 기자에 대한 사대사상에 대해 일연은 반감하고 고조선 역사의 정립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단군조선만을 고조선이라고 했던 일연은 왜 ‘고조선’ 뒤에 ‘위만조선’ 조목을 설정했을까?당시 일연은 일부 유자들에 의해 원(元)나라에 의해 무너진 송(宋)나라의 조상인 기자가 선양되고 신봉되는 현실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에 그는 원으로 대표되는 중원의 나라들과 대등했던 단군 조선을 복원시킴으로써 한민족의 자존심과 확보하고 자긍심을 확립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일연은 한족(漢族)의 조상이 세운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등장한 위만조선에 대해 새롭게 발견했을 것이다. 더욱이 위만은 연나라 출신으로 고조선의 고토를 지배하면서 한족(漢族)과 맞서 싸우면서 한(韓)민족과 깊은 유대감을 확보했을 것이다. 일연은 바로 이 대목을 주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일연은 기자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원나라로 대표되는 중원세력에 맞선 연나라의 후예인 위만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위만의 손자인 우거(右渠)왕은 중원세력으로 대표되는 한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때문에 만리장성 바깥으로부터 시작되는 난하(河) 이동지역에 뿌리를 둔 고조선을 복원하고 그 이후의 공백을 메워 준 주체로서 위만조선을 아우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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