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섭 교수의 삼국유사 인문학 유행 <2>

마니산 첨성대
‘고조선’의 주체를 어떻게 비정할 것인가?

고조선의 주체, 학자들도 합의 못봐

中·日, 단군조선을 신화로 치부해

고조선의 건국과 해체한(韓)민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 이름은 무엇일까?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고조선’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고조선’의 주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고조선의 구성에서 단군조선을 배제하고 기자조선 혹은 위만조선부터 한사군(漢四郡)까지 포함하고 있다. 또 몇몇 학자들은 일본 학자들의 비판을 의식해 기자조선을 제외한 뒤 그 시기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개아지’조선(奇氏朝鮮 혹은 解氏朝鮮)이나 ‘한조선’(韓朝鮮) 또는 ‘예맥조선’(濊貊朝鮮)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해 왔다. 뿐만 아니라 기자(箕子)와 그의 40여 세대 후손으로 알려지는 준왕(準王)은 ‘후손’ 관계가 아닐 것이며, 이것은 중국인들이 ‘이민족동화술’(異民族同化述)로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보았다. 종래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 또한 믿을 수 없는 ‘전설’ 혹은 ‘신화’로 치부해 말살해 왔다. 그들은 또 기자가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까지 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부인했다. 나아가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중국의 문헌기록들은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의해 조작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고대부터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한 주체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는 논리를 세워 그들의 한반도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만든 것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해방 이후가 지나서도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결과 토착인들이 세운 단군조선은 어느 정도 복원시켰지만 일본 식민사관의 강력한 영향 아래 기자조선을 배제하고 위만조선과 한사군으로 전개됐다는 주장을 통설로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출현시킨 첫 고대국가이다. 고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는 아니었지만 많은 거수국(渠帥國, 諸侯國)을 거느린 지방분권 국가였다. 그러나 고조선은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古列加) 시대에 통치력을 잃었고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한 등의 거수국들은 독립을 꾀했다. 이 과정에서 고조선의 단군과 그 일족의 후손들은 통치권을 잃어 버렸지만 일정한 지역에 머물면서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이란 국호는 단군 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의 국명으로 사용했고, 고조선 내에 있었던 역대 단군들의 직할국만을 부르는 명칭으로도 지칭됐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주변의 국가들로부터 보호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거수국들 역시 고조선의 변천과 더불어 새롭게 성장해 갔다.일연은 우리 역사서에서 처음으로 ‘고조선’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삼국유사〉5권 9편 138조목의 서두를 ‘고조선’ 조목으로 내세웠다. 일연은 ‘고조선’을 ‘위만조선’과 분리해 독립된 조목으로 사용함으로써 단군조선만이 고조선임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도 단군조선의 실체에 대한 논란 속에 있다. 그러나 고조선의 주체는 단군조선일 뿐 거기에 기자조선과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포함되지 않는다. 고조선은 오로지 단군조선만을 가리킬 뿐이다. 이미 일연이 고려 말에 이 점을 분명하게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학자들은 고조선의 주체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해 그들은 〈삼국유사〉의 ‘고조선’ 조목에 의거해 단군조선을 연구함에도 불구하고 단군조선의 실체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2. 고조선과 신조선의 변별일연은 ‘고조선’ 조목에서 “주나라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주나라가 조선후(朝鮮候)로 봉(封)한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해 온 결과 단군이 고조선을 장당경으로 옮기게 됐던 연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고조선은 기자조선이 아니라 단군조선을 가리킨다. 일연이 종래의 사서를 통해 ‘고조선’ 조목과 ‘위만조선’ 조목을 분명히 구분했듯이 그의 인식 속에서 ‘고조선’과 ‘기자조선’은 분명히 다른 나라였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난하(?河) 바깥으로부터 시작되는 만주전역과 한반도를 ‘조선’(朝鮮)으로 일컫었다. 때문에 조선은 중국과 변별되는 동북아 지역의 총체적 명칭이었다. 단군조선과 기자 및 위만의 조선을 갈라본 일연의 안목은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한 것을 근거로 그를 고조선의 통치자로 보았던 유학자들과 또렷이 구분된다. 일연은 불자이자 선사였다. 때문에 유교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주공(周公)과 같은 성인의 권위에서 자유로웠다. 해서 일연은 중화주의나 사대주의에 구애받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다. 그 결과 ‘고조선’은 우리 역사 속에서 정당하게 자리매김 될 수 있었다. ‘옛 조선’이란 의미의 고조선은 본디 난하 동쪽과 요하(遼河) 및 대릉하(大凌河) 서쪽을 무대로 존재했던 한민족의 첫 나라였다. 고조선은 그곳 만주에서 터를 잡고 한반도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담아내었다. 기원전 12세기경에 주(周)나라의 신했던 기자(箕子)가 난하(?河)를 넘어 고조선으로 망명했다. 주나라 무왕(武王)은 기자를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해 주었다. 뒷날 유학자들은 중화주의적 사관에 입각해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통치자로 봉했다고 기술했다. 주나라를 떠나온 기자는 단군조선의 서쪽 변경인 난하 유역에 머물며 기자조선을 세웠다.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변경인 그곳에서 수 백 년 동안 존재했다. 이후 기자의 40여 세대의 후손이었던 부(否)왕에 이어 재위에 오른 그의 아들 준(準)왕은 천 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온 위만(衛滿)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위만은 단군조선의 제후국(거수국)이었던 기자조선의 정권을 빼앗고 그곳에다 위만조선을 세웠다. 그리고 위만은 서한의 외신(外臣)이 돼 단군조선을 침략함으로써 고조선(단군조선)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본디 위만조선은 중국 서한의 망명세력에 의해 건립된 정권이었다. 그러나 뒷날 위만의 손자인 우거(右渠)왕이 서한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이에 무제는 위만조선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서한의 행정구역인 한사군을 설치했다. 단군조선 이후 신조선으로 자리했던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아니었다. 본디 기자(箕子)는 중국 상(商) 왕실의 후예로서 기국(箕國)에 봉해졌던 제후였다. 그는 상나라가 주족(周族)에게 멸망이 되자 단군조선의 변경이었던 지금의 난하(?河) 유역으로 망명해 단군조선의 거수(제후)가 됐다. 이 거수국을 훗날 ‘기자가 다스리는 조선’이라는 뜻에서 ‘기자조선’이라고 불렀다. 그 뒤 서한(西漢, 前漢)의 외신(外臣)이 된 위만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의 후손인 준왕(準王)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았다. 그리해 위만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기자국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세웠다. 해서 단군조선의 새로운 거수인 ‘위만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에서 ‘위만조선’이라고 불렀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모두 ‘고조선’인 단군조선과 변별되는 ‘신조선’이었다. 3. 신조선과 한사군의 영토 비정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용어’(개념)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 개념이 고유명사인가 일반명사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에 속하는 특정한 한 개 만의 이름을 나타내어 다른 것과 구별하는 명사”인 고유명사는 인명과 지명 등에서 그 독자성을 지닌다. 한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신조선’과 별별되는 고유명사이다. 그런데 ‘신조선’과 변별되는 ‘옛 조선’이라고 할 때, 이것은 고유명사이기보다는 “여러 가지 사물의 공통된 특성을 나타내는 명사”인 일반명사적 성격일 수밖에 없게 된다. 때문에 신조선에 대응하는 고조선은 이후에 건국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뿐만 아니라 이성계가 건국한 이씨 조선과 김일성이 건국한 김씨 조선과의 변별 문제가 생긴다. 일부 국사학자들이 이씨(이성계)가 세운 이씨 조선을 왕씨(왕검)가 세운 ‘고조선’과 변별해 ‘신조선’이라고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옛 문헌 기록들에 의하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자리해 있었다. 중국의 상(商)·주(周) 교체기인 기원전 12세기 말에 기자 일족이 고조선(단군조선)의 변방인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 유역으로 망명해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됐다. 그 뒤 기원전 195년에는 서한에서 망명한 위만은 기자의 40여 세 후손인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했다. 위만은 서한의 외신이 된 뒤 단군조선 지역을 침략해 난하에서 대릉하 유역에 이르는 영토를 확장했다. 기원전 108년에 서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낙랑·임둔·진번의 세 군을 설치했다. 다시 단군조선을 침략해 기원전 107년에는 현토군을 설치했다. 먼저 설치한 낙랑과 임둔과 진번은 난하에서 대릉하에 이르는 유역에 걸쳐 있었고, 뒤이은 현토는 대릉하와 요하 사이에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기자 일족의 망명지이자 위만조선의 건국지였던 난하 하류 동부 유역은 이후 한사군의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이 됐다.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고조선이 무너진 뒤 한반도와 만주에 있었던 한(三韓)·부여·비류·신라·고구려·남옥저·북옥저·예·맥 등은 단군의 후손이라고 했다. 이들 거수국(諸侯國 혹은 封國)들은 고조선의 통치자였던 단군의 후손이었다. 여기서 ‘후손’이라는 표현은 이들 나라의 통치자(渠帥)들이 혈연적으로 단군의 후손이라는 의미이자 동시에 이들 나라는 고조선에서 분리돼 나왔음을 암시해 준다. 동시에 이들 나라들이 모두 고조선의 후계세력이라는 집단귀속의식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한중 문헌기록은 부여(夫餘)·고죽(孤竹)·고구려(高句麗)·추(追)·진번·낙랑·임둔·현토·숙신(肅愼)·청구(靑丘)·양이(良夷)·양주(楊州)·발유(發)·유(兪)·옥저(沃沮)·기자조선·비류(沸流)·행인(荇人)·해두(海頭)·개마(蓋馬)·구다(句茶)·조나(藻那)·주나(朱那)·진(辰)·한(韓) 및 예(濊)와 맥(貊)이 고조선의 거수국들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현재는 이들 거수국들의 위치를 정확히 비교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요서지역에 자리했던 고조선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단군조선이 해체되고 난 뒤 그 유민들은 주로 주변의 거수국들에 흡수됐다. 특히 다수의 유민들은 부여와 고구려 및 진(辰)과 한(韓) 등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나라는 단군조선의 무대였던 요서지역에다 한사군을 설치했다. 요서에 설치된 한사군 바깥으로는 부여와 고구려 및 예와 맥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나라의 군제인 한사군은 분명 요서지역에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중국의 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과 한반도 내에 비정함으로써 새로운 ‘동북공정’에 착수했다. 남북한의 국사학자와 일본의 학자들 역시 이렇게 마련된 역사기록에 표를 던져 줌으로써 고대 중국의 동북공정에 ‘동참’했다. 그 결과 한민족의 첫 국가였던 단군조선이 부정되고 거수국이었던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및 한사군까지 ‘고조선’의 주체로 자리하게 됐다. 일연 역시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를 피할 수 없었고 그 또한 고대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참고문헌

최남선, 〈육당최남선전집2〉(현암사, 1973)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박영사, 1981)

윤내현, 〈고조선연구〉(일지사, 1994; 2004)

박선희, 〈한국고대복식연구: 그 원형과 정체〉(지식산업사, 200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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