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교사 포교의 대모 박정자 前 부산불교여교사 연합회장

나의 서원 나의 신행 〈10〉
 

박정자선생님은 … 1921년 경남 고성 무량리에서 출생했다. 부산 경남여고를 졸업하고 상리, 진주봉래, 부산초량,신선, 연제, 청룡 등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부산광역시 장학사를 지냈으며 1982년 청룡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 했다. 부산시정 자문위원, 민주평통 자문위원,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 부회장, 여교사 반야회 회장, 부산불교여교사연합회 회장, 부산불교어린이지도자회 고문, 동국불교전법대학 교수 등을 지냈다. 어린이 포교와 불자교사회 조직과 활성화에 헌신했다. 〈교단낙수〉 〈내 종교 내 인생〉 〈참 나를 찾아서〉 〈어린이의 꿈을 하늘 높이〉등 책을 통해 포교와 수행의 방법론과 현대 문명에 대한 종교적 성찰 등을 피력했다.

여교사 모임 반야회 조직 지도자 양성
교육현장 경험 살려 교안 만들어 법회

살던 집 어린이 포교 위해 ‘동련’에 기증
“어린이 법회 안하는 절 많아 큰 걱정”
평생 돈 모이면 포교 기금 보시
“다음 생에도 부처님 말씀 전할 터”

요즘도 매일 다라니 수백번 독송
포교 위해 〈교단낙수〉 등 네 권 출간


5월 15일 스승의 날을 맞아 (사)동련의 초대 이사장 지현 스님(앞줄 왼쪽서 두번째)과 반야회 회원 후배교사들이 박정자 선생님을 찾아 왔다.
1980년대 초반 부산 통불원에서 어린이 법회를 지도하는 박정자 선생님


나이 열일곱에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교단에 선 이상 앳된 소녀가 아니라 ‘교사’였다. 시대는 일제강점기.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가르쳤다. 보람 있는 날들이었다.
스물두 살에 결혼을 했다.
수줍은 신부는 ‘믿음직한 사람’과 함께 행복했다. 그러나 믿음직한 그 사람과 함께 한 행복은 3년이 채 못했다. 결혼 후 2년을 서울과 진주에서 각자 지내고 함께 살게 된 지 11개월 만에 배탈이 나서 급사(急死)한 남편. 그 기막힌 시간에 울음조차 토할 수 없었다. 바로 뒷날 아들이 태어났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을 때, 손을 잡아 준 것은 부처님이었다.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고 몸을 추슬러 다시 교단에 섰다. 그리고 열심히 절을 찾아 다녔다. 부산에 절이 많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물론 먼 곳으로도 다녔다. 부처님 계시는 도량이면 어디든 좋았다. 안정을 찾아가는 품속에서 잘 자라는 아들이 더 없이 귀하고 소중했다.
선지식들을 만났다.
통영 안정사 토굴로 성철 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통영 미래사에서는 효봉 스님과 구산 스님에게 귀의해 새벽 별빛을 한 아름 안았다. 구산 스님은 보리성(菩提性)이라는 법명을 지어 주셨다. 송광사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을 뵈었고, 통도사 경봉스님도 자상한 가르침으로 신심에 기름을 부어 주었다. 모든 것이 감사하고 모든 인연이 반가운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을 억누르던 고통의 짐을 덜게 되었다.
고성 문수암으로 달려가 청담 스님께 여쭈었다.
“부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이 세상 누구에게 매달려야 합니까?”
절박한 심정이었다. 청담 스님은 먼 산을 바라보시며 조용히 말했다.
“용심(用心)을 잘 해야지요. 한 생각에 짙은 업장을 씻을 수도 있고, 열반이라는 최상의 즐거움도 찾게 되지요.”
그 말씀 아래 마음이 밝아졌다. 결국 마음이로구나! 내 마음을 억누르던 그것도 내 마음이었구나! 빠졌던 물에서 나온 기분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산으로 돌아 왔다.

어느 때부터 함께 절에 가는 동행이 생겼다. 또 어느 때부터 동행의 숫자가 늘어났다. “선생님. 좋은 곳엔 같이 가야죠!” 하며 여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따라 나선 것. 이제 홀몸이 아니게 되고 보니, 이 또한 좋은 인연이 아닌가 싶었다.
“기왕이면 이름 하나 지읍시다.”누군가의 제안에 모두 동의 했다. 통도사로 달려갔다. 경봉 스님께 절 올리고 이름을 갖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보살님들, 직업이 모두 선생님이잖어? 가르치는 사람은 지혜가 있어야 해. 그래서 만상을 바로 보는 지혜를 가르쳐야 해. 그러니까 ‘반야회’라고 하면 좋겠네.”
1976년의 일이다. 반야회라는 이름 아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하고 기도하고 포교하는 여교사들. 회원이 늘어나고 모임도 활성화 되었다. 서로의 마음을 다잡는 의미에서 ‘발원문’을 지어 나누었다.

기름(育)에 자비 있고 가르침(敎)에 지혜 있어
예쁜 아기 미운 아기 가림 없이 곱게 보고
잘난 아기 못난 아기 너 나 없이 귀히 여겨
보리(菩提)의 싹 일깨워서 힘을 주어 북돋우고
어리석음 가려내어 따뜻하게 손질하며
뜻과 슬기 불어 넣어 큰 불자(佛子) 키워지고….

그렇게 안으로 불심을 기르면서 아이들에게 조금씩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는 교문에서 열심히 전도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더러는 함께 손잡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아!” 감탄사였을까?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의 여운이 오래 가시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 부산 통불원에서 어린이 법회를 지도하던 박정잔 선생님
서원을 세웠다.
포교였다. 그것도 어린이 포교에 진력하고자 서원했다. 이제 할 일이 확실하게 생겼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답을 찾았다. 교사로서 불자로서 마땅히 할 일을 그토록 힘겨운 시간 끝에 찾아낸 것이었다.

평생을 어린이 포교에 헌신 해 온 박정자(朴貞子 92) 선생님을 찾아가는 길은 가파른 언덕길이었다. 부산시 사하구 당리동 관음사. 박정자 선생님은 3년 전 살던 집을 (사)동련에 기증했다. 어린이 포교에 써달라는 당부와 함께. 그리고 송광사 부산포교원인 관음사에서 지내고 있다.
“박 선생님을 뵌 적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연세가 많으셔서 인터뷰가 잘 될지 걱정입니다.”
(사)동련의 최미선 사무국장은 엷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연등이 예쁘게 걸린 관음사 마당에 들어서니 몇 분의 노(老)보살님들이 서 있었다.
“아, 미선씨 왔어? 우리도 방금 도착했어.”
여섯 분의 노 보살님들. 반야회 회원들이었다. 박정자 선생님의 후배 교사들, 함께 전국의 절을 다니며 공부하고 기도했고 어린이 포교에 온 정성을 쏟은 분들이었다. 스승의 날에 영원한 선배요 길잡이인 박정자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해 이틀 뒤에 온 것이다.
“아이고, 교장 선생님. 더 고와지셨네요?”
포교현장에 늘 함께 다녔던 김시애 선생님이 손을 잡고 인사 하자 박정자 선생님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신다.
“어서들 와. 어쩐 일이야? 이렇게 모여서 오고. 관세음보살~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야?”
“저, 미선이에요. 선생님 저 모르시겠어요?”
“그래? 나를 여기다가 데려다 주고 도망가 버린 그 미선이?”
“하하하….”
좌중이 웃음바다가 됐다.
박정자 선생님 곁에 둘러앉은 후배 교사들은 모두 70대 노보살님들이다. 그러나 한창 절을 찾아다니고 포교현장을 누비던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은 영락없는 청춘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게 다 어린이 포교의 역사(歷史)였다.

“우리가 반야회를 만들고 회원이 늘어날 때는 정말 신바람이 났었어요. 회원이 늘고 다들 생활이 바쁘니까 지역별로 모임을 가졌어요.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82년에 어린이지도자연합회가 결성되어서 교장선생님(박정자)께서 부회장을 맡고 저희들이 일을 하게 됐지요. 영주암 정관 큰스님 원력이 교장선생님의 열정에 또 한 번 불길을 댕겼던 겁니다. 반야회는 어린이 포교를 위한 지도교사들의 소양과 신심을 길러주는 온상이었어요. 그 중심이 교장선생님이셨고요.”
“교장선생님은 많은 절을 찾아다니며 스님들께 어린이 법회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함께 다니다 보면 그 절실하고 확고한 의지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저희야 뭘 알았나요? 그저 교장선생님 따라다니며 불교도 알게 되고 포교도 하게 되니 마냥 좋기만 했지.”
“교장선생님이나 우리는 교사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포교 현장에서도 모든 걸 교육방식에 맞춰서 진행했어요. 법회를 한 번 해도 교안을 만들어서 지도하고, 놀이를 해도 계획을 세워서 했거든요. 그렇게 어린이 법회의 틀을 다진 것이 무척 중요한 일었다고 생각해요.”

"대한불교교사대학도 교장선생님이 뿌린 씨앗이 이렇게 자란 거예요. 교사들을 잘 가르쳐야 포교가 제대로 된다는 신념이 강하셨거든요. 아마 큰 스님들의 부촉을 실천하기 위해 어린이와 교사들을 포교의 축으로 삼으신 것 같아요. 사실 어린이 포교에는 교사들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교장선생님의 서원이 하나의 촛불이었다면 그게 반야회라는 수 백 개의 촛불로 번져갔고, 다시 어린이지도자연합회로, 교사대학으로 확산되면서 수 만 개의 촛불이 되어 어린이 포교가 자리를 잡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뭐든지 나눠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일마다 정성을 다하셨어요. 대강 넘어가는 것이 없었어요.”
“관음사로 모셔 드리고 사시던 집을 정리했는데, 모두 놀랐습니다. 새 옷은 한 벌도 없고 어지간하면 기워 입으셨고, 대부분의 물건들이 아주 낡았습니다. 뭐든지 함부로 버리지 않고 아끼고 또 아껴 쓰신 겁니다. 돈이 모이면 포교기금이나 장학금으로 내놓으셨어요. 아드님이 용돈을 드려도 그걸 다 나누어서 아주 조리 있게 쓰시잖아요?”


“교장선생님은 늘 ‘돈은 고여 있으면 흙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어린이 포교, 군부대, 교도소 방문으로 늘 바쁘게 사셨던 겁니다. 교사로, 교장으로, 장학사로 재직하시는 중에는 업무에도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고요. 평교사 때 연구수업을 하시면 전국에서 참관하러 왔을 정도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중에 박정자 선생님이 “잠깐만!” 하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당신들이 모두 나와 함께 (어린이 포교에) 애를 썼는데, 요즘은 전보다 못하지? 어린이 법회 보는 절도 많지 않고. 대구에서도 잘 되는 곳만 되고, 많이 안한다고 하던데. 어쩌면 좋을까?”
좌중이 다소 숙연해졌다. 어린이 포교에 대한 불교계의 무관심이 문제로 부각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반야회 회원들은 박정자 선생님의 걱정이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서먹한 분위기를 전화 시킨 것은 관음사 주지 지현 스님이었다.
 

예불을 마치고 들어오신 스님은 인사가 끝나고 “교장선생님 눈이 좀 어두우신 것 같다”는 김시애 선생님의 걱정을 해결해 주었다. 박정자 선생님은 백내장 수술을 하실 정도의 건강이 되므로 수술 일정을 잡기로 했다는 것. 지현 스님은 박정자 선생님과 인연이 깊다. 인연은 통영 미래사를 다닐 때까지 3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동련 초대 이사장을 맡았을 때는 누구보다 고맙고 든든하게 뒤를 지켜 준 것이 박정자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관음사에서 어머니를 모시는 정성으로 보살펴 드린다.
“박 선생님은 요즘도 매일 다라니를 수 백 번 독송 하십니다.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이 기도의 시간이라고 할 정도에요. 연세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총기가 맑으시고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십니다. 포교와 봉사 기도로 일관해 온 시간들이 나이를 초월하는 겁니다. 사람의 몸은 나이를 먹지만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몸의 나이로 살지 말고 나이를 먹지 않는 마음으로 살면 항상 여여(如如)하다는 것을 박 선생님을 통해 배웁니다. 젊은 날의 시련을 불심으로 다스리고, 그 공부를 어린이 포교와 봉사활동으로 회향하시니 진정한 사홍서원의 삶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박정자 선생님의 손을 잡고 여쭈어 보았다. 지금 소원이 있으시냐고.
“응? 소원? 두 가지 있지. 하나는 불국토에 인연이 주어져서 부처님 법 널리 전하는 것이야. 나는 요즘 이걸 기도해. 사람은 발원이 없으면 사는 보람도 없지. 그리고 또 하나는 자다가 그냥 그대로, 자는 그대로 가는 것이고. 내가 아프면 또 많은 사람들이 신경 쓰게 되잖아. 그러니까 자다가 그냥 슬그머니 가야지.”

박정자 선생님은 포교를 위해 4권의 책을 묶었다. 어린이 포교 방법들이 자세히 기록된 책이다. 대부분 절판이 되어 구할 수 없다. 김시애 선생님이 보관하고 있는 〈교단낙수〉는 1982년에 처음으로 펴낸 책이다. 책의 머리말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열일곱의 나이로 교단에 선 그날부터 어언 4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글로 시작된다.
그 책이 나 오고 다시 30년이 흘렀다. 모든 것을 세상에 돌려주고 절집에서 기도하며 내생의 전법포교를 기약하는 박정자 선생님. 놀랍게도 30년 전에 펴낸 책의 서문에 이런 시를 써 두었다.

내가 다시
또 한 번
내 인생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번 것은
연습으로 돌려 버리고
새로 맞는 그 나날들을
고쳐 쓸 수 없는
단 한 장의 정서(淨書)처럼
정성껏 정성껏
멋있고 값있게
인생을 엮으련만
이것이 부질없는 후회인 줄 알았을 때는
이미 다된
내 인생의 종점에 서고 말았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