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선두주자 성운 스님 인덕원 이사장

성운 스님은 … 부산에서 출생해 10여세에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했다. 용주사 해인사 화엄사 월정사 상원사 등 강원과 선원에서 경학과 참선에 정진했다. 해인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했고 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과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사)한국교정교화연구소 전문위원, 종교단체 사형제도폐지운동 공동협의회 회장,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로 깨달음의 사회화에 동참했다. 현재 은평구 사원연합회 회장, 은평구민장학회 이사, 정토학회 회장, 한국불교학회 이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이사장, 삼천사 주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은 지금도 유효한가? ‘스피드 시대’를 지나 ‘초스피드 시대’라는 오늘날의 10년은 강산이 두어 번 내지 서너 번은 뒤바뀔 시간이다. 강산 보다 빠르게 변하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풍속이나 문물이고 보면, 현대사회에서의 10년은 매우 짧은 시간이다. 변화의 속도는 빠르지만, 성취(成就)의 과정은 복잡하다. 개인의 일이든 집단의 공무(公務)든, 주변의 일들과 상호연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성운 스님(삼천사 주지,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이사장)의 출가 이력은 10년을 주기로 변화해 왔다. 출가하여 힘든 일과 탁발, 배고픔에 시달리며 행자생활을 하고, 대강백들을 만나 경전을 배우며 ‘절 물’이 들던 법주사 용주사 해인사에서의 10년. 현대적 학문을 배워야 시대를 앞서가는 포교가 가능하다는 자각에 ‘무작정 상경’하여 공부하고 종무 행정을 배우며 사회복지에 눈을 열게 된 10년. 사회복지법인 설립을 발원하고 기도하며 실천불교의 다양한 밑그림을 그리게 된 10년. 인덕원을 설립하여 불교사회복지의 선두주자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10년. 그리고 불교사회복지를 학문의 차원에서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연마하여 새로운 전형(典型)을 제시하고 후학양성에 동분서주 한 현재까지.
출가 60년, 여섯 번의 ‘10년’ 속에 변하지 않고 흘러 온 것이 있다면, 수행자의 삶은 안으로 치열한 공부를 전개하며 철저하게 밖으로 회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성운 스님의 서원은 무엇이었고 그 성취를 위한 수행의 행로는 어떠했는가? 인터뷰를 앞두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며 수첩에 적은 메모들이 봄 들판의 풀잎처럼 무성했다.

△불교관: 불교는 중생이 고(苦)이서 락(樂)을 건져 올리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삼독심 제거의 길을 열어 주는 것.
△승가상: 중생의 고를 해탈시켜 주는 것이 불교와 승단의 사명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
△불교사회복지 사상: 불교를 통한 사회복지의 실천, 중생 고의 해탈 견인. “사회복지 현장이 저의 선방이요, 염불당이요, 기도터요, 하심터요, 복전입니다. 저는 이렇게 살아왔고 이것이 저의 불교사상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복지의 실천이 저의 불교사상입니다.”
△개인적 소의경전: 〈금강경〉 〈법화경〉 〈아함경〉으로 수행자로서의 삶과 사회복자활동의 ‘불이(不二)’ 확립. 특히 〈금강경〉의 공관(空觀)으로 나눔의 가치, 반야지혜로 복지시설 운영의 틀을 배움.
△법호 자안(慈顔)의 의미: 내면의 자비를 항시 드러내 누구나 인자한 얼굴로 대하고자 지은 자호.
△아쇼까 왕 연구: 아쇼까 왕의 한 마디에 전율. ‘내가 백성 위해 복지를 펴는 것은 살아서 남들로부터 존경받고자 함이 아니다. 나와 후손이 천상에 나고자 함도 아니고, 후생에 잘 되고자 함도 아니다. 오직 전생의 빚을 갚을 뿐이다.’ 이 한마디를 접한 수행자로서의 충격, 다소 어려움에 빠져 있던(약간은 지쳐 있던) 복지사업 원력에 새로운 힘이 되어 줌.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 한 충격으로 나 자신의 나태함을 돌아보고 다시 뛸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아쇼까 왕의 복지 정책을 연구해 박사학위 논문 작성. “현대의 고도화된 복지정책도 아쇼까 왕의 복지 실현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아쇼까 왕의 복지는 대단했어요. 기원전 3세기 당시 그는 동물들을 위한 병원까지 설립했으니까요. 일체생명의 존귀함을 이미 정책으로 실현한 거죠.”
△전국교도소 10만권 불서 보내기 운동 달성
△교도소 등 교정교화: 1978년부터 서울, 서대문구치소 등 교화위원활동.
△군포교 및 군법당 설립
△‘최초’ 그리고 ‘모델’: 지역 사원연합회 결성 통한 불교의 사회운동 전개, 도서관 운영에 있어 ‘RFID(자동대출반환) 시스템 도입’(세계최초의 시스템으로 국내외에서 벤치마킹 중).
△불사: 삼천사 중창불사 30년, 마애여래입상 보물 제657호 지정.
△종교계 사형제도 폐지운동 공동협의회 회장
△법인설립: 1984년 발원, 1994년 ‘인덕원’ 설립. ‘20명 보살’들의 기적 같은 도움.
△법인현황: 어린이 청소년 노인 시설 및 도서관 장애인 시설 등 22개 시설, 종사자 500여명, 연간예산 300억 원. 연간이용 연인원 1000만여 명.

인덕원 산하 22개 시설에 종사자 500여명

연인원 1천만명 이용 ‘복지 메머드그룹’

 

“서원 굳고 정진 간절하면 다 이루어져요”

치열하게 공부하고 철저하게 회향해야

인재 양성 위한 소수정예 교육기관 서원


△인덕노인종합복지관: 입원 대기자만 200여명. 타 시설에서 ‘원스톱 토탈 케어시스템’에 주목. 예배, 미사 공간까지 마련해 종교 자유 보장.
△동국대대학원 강의: 불교사회복지론 이론과 현장 노하우 겸한 강의로 정평, 현장 사례 위주의 교육과 최신 정보로 만든 PPT 활용 교육.
△100여 회의 수상 : 국민훈장 동백장, 만해대상, 대통령표장 등 다양한 활동에 대한 사회적 평가.

신록이 무르익어 가는 삼천사. 도량 한 가운데 사흘 전에 제막된 탑이 우뚝 서 있다. 월정사 9층탑의 양식을 따랐지만, 상륜부에는 보주가 아니라 황금빛 찬란한 사사자(四獅子)가 모셔져 있다. 사방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는 네 마리의 사자. 아쇼까 왕의 석주 상단에 있는 그 사자상이다.
부처님이 불교라는 성을 쌓았다면 아쇼까 왕은 그 성을 굳건하게 지켜 오늘에 이르게 한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불린다. 아쇼까 왕의 복지정책을 오늘의 복지사회 구현 모델로 연구하는 성운 스님의 서원이 담긴 탑이다. 탑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성운 스님은 이 탑을 제막함으로써 아쇼까 왕을 한국불교 사회복지의 새로운 이정표로 삼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대식 공부를 하자.”
이것이 성운 스님의 첫 서원이었다. 열 살에 동진 출가하여 절 생활에 적응하기 바빴으니, 출가의 서원이 따로 없었을 터. 다만, 출가 수행자의 길로 들어선 인연을 거부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매진함으로써 시나브로 ‘물’이 들었을 뿐이다.
“전생에 지어 둔 복이 좀 있었던지, 참으로 중요한 시기에 큰스님들을 만났습니다. 용주사에서 탄허 관응 운허 호경 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 숙여지는 큰스님들에게 경을 배웠으니까요. 그리고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체계가 서 있던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강주는 지관 스님이었어요. 졸업하고 후배들을 가르치는 중강이 되었는데, 그때 내가 신식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뼈아프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성철 스님과 일타 스님이 ‘선방 수좌로 기대되는데 나가려하느냐?’ ‘중 공부에 바깥공부를 할 필요가 있느냐’며 만류했지만 신식공부를 하고 싶어 상경했습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동국대 교정을 혼자 걸으며 ‘나도 여기서 대학 공부 하겠다’는 원을 세웠어요.”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이야기지만, 성운 스님에게는 뼈저린 시간이었다. 서울에 왔다고 그냥 ‘서울 스님’이 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숙식 해결이 급선무. 성운 스님은 학원이 가까운 조계사에서 수위실에 바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 소임을 맡았다. 화장실 청소를 하면 보시를 좀 더 받을 수 있어 학원비를 낼 수 있었다. 거기다 빗자루나 걸레를 넣어두는 창고를 ‘공부방’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 창고에서 영어 단어와 문장을 닥치는 대로 달달 외우며 공부에 매달렸다. 영어 공부에 특별히 공력을 들인 까닭은 세상의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이고 그 결과 1년 만에 〈TIME〉지를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스님은 이 때 〈TIME〉지를 통해 고령화 사회의 도래를 예견했는데 그것이 나중 노인복지 사업의 주역이 되게 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랐지만 그들은 스님이 ‘주경야경(晝耕夜耕)’ 한 피나는 노력을 몰랐다. 그렇게 학원을 다니며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후 방송통신대학에서 행정학을 공부했고 동국대학교에서 종무행정을 연구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는 2005년에 받았고 논문은 ‘아쇼까 왕의 복지사상 연구’였다.

“사회복지사업이 이 시대의 불사(佛事)다.”
성운 스님이 사회복지에 진력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은 하루아침의 결심이 아니었다. 순간의 각성에 의한 서원이 아니라 긴 시간 많은 인연들이 계합하여 뼛속까지 사무치게 세운 서원이라는 의미다. 스님은 잠시 서울 생활을 접고 큰 산 고찰의 선방을 다니며 정진한 적이 있다. 종단의 혼란상을 보는 젊은 스님의 선택이 지리산, 덕유산, 오대산 등이었던 것. 상원사에서 두 차례 100일 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깊은 골짜기 냇가 바위에 새겨진 불상을 보았다. 신기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1979년 다시 서울로 왔는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이 계곡으로 오게 됐어요. 지금은 은평 뉴타운이 된 곳이지만 당시는 저 아래가 모두 철거민이나 상이군, 결핵환자 등이 모여 사는 빈촌이었어요. 거기 작은 암자에 있던 스님을 만나러 왔다가 그 스님과 산책삼아 온 것이지요. 아, 그런데 마애불상을 보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왔어요. 오대산에서 꿈에 보았던 그 분이지 뭡니까. 가슴이 벅찼던 것은 그 다음일입니다. 마애불 근처에 단칸방과 작은 부엌이 딸린 암자가 있을 뿐이었는데, 암자를 지키던 스님이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겁니다. 뜻 밖에 암자를 맡게 되었던 겁니다.”
외진 북한산 골짜기 암자에 몸을 들여 놓았지만, 현몽(現夢)한 부처님의 도량이었으니 즐겁기 그지없었다. 곧바로 삼천사 중창불사를 발원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절의 면모를 다져나갔다.
“그런 가운데 총무원 사회부장을 맡게 됐어요. 중창불사를 하면서 도심 포교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고 행정학을 전공 했으니 나가서 일을 하면서 더 많은 걸 배우고자 했지요.”
총무원에서 소임을 맡고 나서 새롭게 본 것이 사회복지였다. 그간 은평구를 중심으로 이웃돕기나 교도소, 군부대 위문 등 나눔을 실천했지만, 그것을 사회복지라는 개념으로 정립하여 제도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눈에 들어 왔던 것이다.
“사회복지를 불교복지로 승화하여 불교의 사회화를 실현하면 그것이 최상의 포교이고 불교와 사회의 발전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무엇보다 복지법인의 설립이 필요했어요. 총무원에 복지법인 설립을 건의 했으나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삼천사를 근간으로 복지법인을 세우고자 원력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법인을 세우려면 재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아니었어요. 그때 삼천사 아래 지금의 인덕원이 자리한 땅이 맘에 들었어요. 그 땅에 복지시설을 짓고 싶었던 거죠. 땅도 없고 돈도 없는데 어떻게 복지법인을 만들고 시설을 짓는단 말인가? 무조건 부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 말고 뭐 있겠어요?”

“아쇼까왕 복지사상 원력의 새힘 되었죠”
수행·포교·복지는 곧 ‘상구보리·하화중생’
사회복지 사업은 이시대 불사중의 불사

서원이 굳고 기도가 간절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땅 주인이 어느 날 문득 땅을 팔겠다고 나섰다. 팔고 나서는 ‘내가 왜 팔았지?’ 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10억 원이 필요해 20명에게 부탁을 했는데, 단 한사람도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대출을 해 주었다. 20명 가운데는 보광스님(동국대 교수)도, 개신교 장로도 포함되어 있다. 성운 스님은 그 20명을 ‘20대 보살’이라며 평생 그 인연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땅도 재원도 마련되어 10년을 소원하던 복지법인이 설립됐다. 이후로 성운 스님의 복지 불사는 가속에 가속을 더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을 축으로 22개 시설을 운영하는 사회복지의 ‘메머드 그룹’이 된 것이다. 수행과 포교가 둘이 아니고 포교와 복지가 다르지 않다는 성운 스님의 신념과 서원이 불교사회복지의 내실이 튼튼해지고 현장이 넓어지는 힘이 됐다. 스님은 스님대로 강단에서 강의 하며 불교사회복지에 신명을 바칠 인재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짧게나마 저의 에피소드를 들려 드렸지만, 지난 60년의 출가 생활은 살아 온 매순간이 서원의 시간이었고 정진의 찰나였습니다. 그게 수행자의 길이고 불자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불자의 첫째는 신심입니다. 굳은 믿음을 바탕으로 원력을 세우고 정진(기도)하면 뭐든지 이루어집니다.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원을 참으로 많이 세웠고 그때마다 절실하게 기도하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서원과 정진은 항상 ‘현재진행형’입니다.”

-현재진행형이라면, 스님께 새로운 서원이 있으신가요?
“인재양성입니다. 지금도 대학원에서 강의는 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어요. 과거 중고등학생 시절 학생법회를 다녔던 분들이 불교계를 지키는 거목이 되었듯이, 어릴 때부터 확고한 불자로 자랄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 싶습니다. 소수 정예화 된 불교 유치원과 초등학교, 여자중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원이 있습니다. 여자중학교를 선택한 것은 모성(母性)과 태교, 양육 시기의 중요함 때문입니다.”

성운 스님에게 또 몇 번의 ‘10년’이 남았을지는 모르지만, 스님의 더 많은 서원이 이루어진다면, 그만큼 불국토의 면적이 넓어질 것이다. ‘성운 스님의 하루는 다른 사람의 일생과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쁜 스님의 일과는 그만큼 많은 이들의 행복이므로.

“한국의 미래는 어린이들에게 있는데 요즘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모두 복스러워 기쁩니다”성운 스님의 어린이 사랑은 각별해 서울시내 여러개의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노인공경 효사상 실천은 행복한 가정, 건강한 사회의 지름길 입니다” 은평구 노인 복지관에서 노인들과 송편을 만들고 있는 성운 스님의 법호는 慈韻(자비로운 얼굴)이다.
1980년대초 성운 스님은 종교계 사형제도 폐지 운동에 앞장서 공동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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