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 가기도 바쁜데 왜 남의 잘잘못을 봅니까

▲ 삽화: 최주현

생활 속의 참선이 될 수 있도록…

문) 스님께서는 생활 속의 참선을 강조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같이 바쁜 사람은 절에 가기도 쉽지 않은데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저희들이 좀 더 생활 속의 참선이 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더 가르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생활하시면서 우주 진리가 더불어 같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간다는 건 아시죠? 우리 인간의 몸속에서도 시공을 초월해서 잘 땐 자고 모두 움죽거리고 그렇게 찰나찰나 돌아가죠? 또 우리 살아나가는 데 지금 현재도 이렇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고 있죠? 그게 전부 생활이죠? 그 생활이 요만큼도 빈틈없이 행선(行禪)입니다, 행선! 생활 자체가 행선이자 진리이자 과학이자, 이게 전체 물리학도 됩니다. 이건 전체입니다. 그러니 그 전체는 내가 있기 때문에, 각자 내가 있기 때문에 전체라고 하는 거죠. 그 전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거고요.
그러니까 나부터 알아야 모든 걸, 전체가 직결돼 있는 이 마음을 알 수 있고, 전체가 직결돼 있으니까 주인공이라고 할 수밖에요. 찰나찰나 돌아가니까 어떤 것을 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으니까 공했죠, 모두가? 그래서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모두 하는 거니까 일하면서도 똥 누면서도 밥 먹으면서도 항상 그대로 여여하면서 참선이며 행선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생활을 떠나서는 진리라는 거는 없고 참선이라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 생활에서 하나하나, 눈물을 흘리든지 괴롭든지 외롭든지 또 고달프든지 즐겁든지 그 모두가 다 내가 있기 때문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한테서 나오는 걸 나한테다 되놓는다면, 맡겨 놓는다면 모든 게 유유하게 걸림이 없이 돌아가고, 그렇게 되자 모든 것이 화목해지고 내 가정이 윤택해지고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갈등이 죄, 스트레스가 다 없어지고 업장이 다 녹아진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마음 편안하니 와선이고 모든 게, 와선이니 입선이니 참선이니 하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행선이 그대로 참선이고 진리니 그대로 여러분이 잘 생각하세요. 왔다 갔다 하지 마시고요.
수십억 마리가 같이 돌아가는 자신의 주인공을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지금도 끌고 다니는 그 주인공을 말입니다. 운전사는 바로 여러분의 몸을 끌고 다니는 그 마음이라는 겁니다.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는 기름은 여러분의 그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불법이다, 불법이 아니다라는 걸 떠나서 내 마음으로서의 나를 진짜로 믿고, 내 거죽을 믿지 말라고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죠. ‘내 거죽을 믿지 말고 너부터 알면 나의 속도 알 수 있느니라’ 하고요. 그러니 생활선이라는 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문) 성경에서는 하느님이 모든 걸 창조했다고 보는데 불교의 관점에서 이 우주 만물은 어떻게 생겼으며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우주의 근본 자체가 여러분 마음에 직결돼 있습니다. 여러분 몸이 오대양 육대주도 될 수 있어요. 이 뇌를 보세요. 얼마나 복잡하고 거대하게 돼 있나. 우주 천하 만물만생이 다,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되는 것은 생각에, 마음에 의해서 진화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식 자체가 바로 요런 거다 하고 모르면, 귀도 먹고 그러면 벌레는 벌레대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가 어떻게 가다 보면 벗어나게도 되겠죠. 인간도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차원에 따라, 전체가 차원이 크고 작은 관계상 눈이 뜨여지고 귀가 뜨여지는가, 이러한 문제에 의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여러분이 될 수도 있고 편안치 못하게 사는 여러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 중생이다 부처다 하는 것도 백지장 하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 먼저 생각하지 마시고 공부를 진짜 하려면 무조건, 무조건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거기다 일체 만법, 생활을 다 맡겨 놓고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고, 당신만이 나를 끌고 다닐 수 있고, 당신만이 내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고, 내 몸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내 주인공밖에 없다. 대신 가 줄 사람도 없고 대신 먹어 줄 사람도 없다. 내가 혼자 와서 혼자 지금 길을 걷고 있다’ 이런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참 나를 발견하고 감응이 될 때, 그 때에 한번 하늘을 쳐다보고 울고 한번 땅을 내려다보고 땅을 치고 울게 되고, 그 때 바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진짜 자유인 말입니다.
그렇게 모두 아는 거, 알려고 하는 거, 이런 걸 다 놓으십시오. 우선 나부터 알아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한테 뜻을 몰라서 답변을 안 해 드리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바로 내 동생 같고 자식 같고 형제 같은 겁니다, 모두. 연세가 높으신 분은 내 부모 같고 모두 이렇습니다. 남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 년이 되든 한 달이 되든 정해 놓지 말고 꾸준히 공부해 보세요. 여러분의 차원에 따라서 빨리 싹이 날 수도 있고 더 빨리 클 수도 있고 아주 밑에서 싹도 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뭔 줄 아십니까? 비유하자면 콩이 아주 잘 익었다면 그냥 건드리기만 해도 탁 벌어지죠. 그런데 덜 익은 거는요, 속껍데기가 짝짝 붙어 가지고는 까도 안 까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죽음에 임해서 고생을 하고 죽는다는 뜻입니다. 안 까지니까. 까지기는 해야 할 텐데 안 까지거든요. 그래서 아픔을 그렇게 견디지 못하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몸을 벗는다는 이치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가고 싶으면 그냥 툭 건드리기만 해도 콩깍지가 탁 벗어지게끔 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시도록 노력하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가 해 나갈 수 있는 대로 해 나가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지 말라 이겁니다. 이 생각이 나거든 맡겨 놓고, 저 생각이 나거든 또 맡겨 놓고, 울고 싶거든 주인공 붙들고 울고 감사하거든 주인공 붙들고 감사하고, 그렇게 한 일 년 계속 가 보세요. 진짜로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모두 겉껍데기로서 애를 쓰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없으면 아무도 없어요. 내 몸에 불이 붙었을 때 남이 불을 꺼 주는 게 아니라 제가끔 자기 불 끄느라고 애를 쓰지, 누가 불 꺼 주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가엾게 생각하고 불쌍히 생각하고 자기 주인공한테 감사해야 합니다. 주인공이 자기를 얼마나 위하고 가르치려고 노력하는지, 때로는 그렇게 많은 살림살이에서 자기 마음을 떠 보기 위해서 이것도 보여 주고 저것도 보여 주고 꿈으로도 보여 주고 생시에도 보여 주고 이런단 말이에요. 그런 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주인공이 자기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러는데 왜 속습니까. 그래서 ‘환상천도 넘어서라. 모든 것에 속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 먼저 나를 발견하는 데 중점을 두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도 마음이라는데…
문) 제가 아는 사람이 절에 열심히 다니는데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도 마음자리에서 시키는 거라고 하면서 아주 당당하게 다니는 걸 보면 저는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서 이해가 안되는 진 모르겠는데 과연 마음공부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답) 여러분이 공부를 할 때 첫째 모든 것을 놓는다,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 그것이 방하착이라면 즉, 모든 잡념과 모든 전자에서부터 얻은 그 습성을 다 녹여버리고 자기의 참 생수 맛을 봐서 자기가 자기를 알았을 때, 또 이차적으로 자기를 또 다시 한 번 체험하면서 상대방과 나와 다시 죽는 법을 또 배워야 된다. 상대방과 나와 다시 죽는 법을 배워야 된다. 고 다음에 세 번째, 상대방과 나와 더불어 같이 나툴 줄 알아야 한다. 만약에 상대방과 나와 죽지 않는다면 상대방과 나와 같이 나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이러한 경험 저러한 경험, 우리가 살림살이에서 다 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아주 처음 공부하시는 분은 놔 버리는 데, 맡겨 놓고 사는 데 여념이 없어야 하는 것이 생활을, 온갖 작동을 다 하면서도 그 작동하는 것이 바로 자기 주인공에서 모든 것을 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운전수가 차를 몰고 다니듯이 그 운전수에 차는 달려 있는 거죠, 차가 운전수가 될 수는 없으니까. 그렇듯이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자기 전자부터의 종문서는 몰락 태워 버릴 수 있다, 이런 문제가 있고, 내가 나를 탄생했을 때 엉뚱하게 내가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엉뚱한, 이 세상에 걸맞지 않는 말과 행이 솟아나올 때도 있거든요. 그럴 때는 오관을 통해서 내가 보고 이것이 걸맞지 않는다면 자기가 제재해서 거기다 놔야 되는 법입니다. 무조건 보는 대로 듣는 대로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안에서 이렇게 가르치는 것도 무조건 들어서는 되지 않는 거라고 봅니다. 안팎이 다 그렇겠죠?
그래서 양면을 다 쥐고 이것이 옳으냐 이것이 옳으냐 하는 것을 갈피를 잡고, 더디게 갈 필요도 없이 자기가 즉각적으로 이게 잘못됐다는 거 잘됐다는 걸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못됐다는 걸 번연히 안다면 이것을 믿고 들어가라. 믿지 않는다면 물론 불평이 나오고, 또한 상대가 있으면 불평이 나옵니다. 믿고 상대가 없다면 불평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믿지 못하는 까닭에, 만약에 이 소릴 들었다 저기에서 저 소릴 들었다, 저걸 봤다 이걸 봤다 했을 때에 믿지 못하는 까닭에 그렇다. 믿지 못하는 까닭에 소릴 들었기 때문에 분이 일어난다. 소릴 들었기 때문에 나는 어떠한 말을 한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저 사람이 나라면, 둘로 보지 않았다면, 믿는다면 ‘아, 그렇기도 하겠지. 고정됨이 없으니까 때에 따라서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겠지.’ 하는 믿음이 있다면 거기에 한마디 할 게 없고, 거기에 말할 것도 없고 안 할 것도 없는 거죠. 자기 안에다 모든 것을 ‘아, 내가 지금 현재에 생각할 때는 이러한데, 전에는 안 그랬는데 어째 이렇게 될까?’ 하고 생각이 됐을 때는, 안에서 굴려서 자기가 자신에게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할 수 있는 그 방법이 바로 내가 지금 세 단계가 없는 세 단계에 의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그 도리를 거기에서 넘기지 못한다면 같이 죽어서 같이 나툴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심사숙고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더 이거는 심사숙고해야 된다.
때에 따라서는 여러분의 살림살이처럼 가정에서도 남편이 급하면 급한 대로 나가서 뛰다가 사흘도 못 들어오고 나흘도 못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남은 바빠서 돌아치는데 불평 불만 하겠습니까, 그걸 안다면. 제때에 밥도 못 먹고 제때에 잠도 못 자고 제때에 참, 그 몸을, 피로한 몸을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들어온 사람더러 말하겠습니까? 그걸 모르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겁니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당신 어디 갔다 왔어?” 하고. “나는 죽도록 그 가정을 위해서 했는데 이건, 당신이 좀 더 집에서 이렇게 해 줬으면 자식들과 모든 것이 이렇게 편편할 거를 왜 당신은 나가서 그렇게 돌보지 않느냐? 전에는 안 그러더니 맘 변했다.” 이거거든요. 그러나 남편은 그게 아니라 남의 속을 일일이, 나가서 일하는 걸 일일이 말할 수는 없고, 또 만약에 말을 해서 어떠한 불리한 조건이 생길 수 있는 말이라면 말을 못하는 거죠. 그렇다면 말을 못하고 나를 믿어라. 모든 것을 이렇게 하는 것도 믿어지고 저렇게 하는 것도 믿어진다면 아무 말 대상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좀 지혜를 넓힌다면 어떠할까요? 하나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둘을 생각하고 셋을 생각하고 넷을 생각하고 백을 생각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그걸 알 텐데 그걸 모르고 좁게 생각한다면 아니 됩니다. 그러면 더 커질 수가 없고 한 발을 한번 뛰어넘을 수가 없이 거기에서 멈춰지는 그런 경향이 있으니 항상 마음을 안으로 굴리면서 지혜를 넓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열반이라는 것이 뭔 줄 아십니까,
비유하자면 콩이 아주 잘 익었다면 그냥 건드리기만 해도 탁 벌어지죠.
그런데 덜 익은 거는 속껍데기가 짝짝 붙어가지고는 까도 안 까집니다.
그래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몸을 벗는다는 이치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가고 싶으면
그냥 툭 건드리기만 해도 콩깍지가 탁 벗어지게끔 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시도록 노력하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이 달라지질 않아요
문) 저는 제 남편과 이혼하고 싶지만 아이들 때문에 참고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 여러 번 조언을 해 봤습니다만 여전히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같이 사는 게 막막할 뿐입니다. 정말 제 남편도 달라질 수 있을까요?

답) 모든 게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 자기가 하는 것대로 끼리끼리 이렇게 맞상대가 되고 모이게 되고 거론이 되고 전달이 되고, 그걸 가지고 업보다 업보다 하는 겁니다. 유전이다, 업보다. 인과응보다. 이런 문제가 돌아가는 겁니다.
저는요, 예전에 이런 걸 봤어요. 아주 가난한 어느 여인이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둘이 너무도 가난해서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너무도 가난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어도 그렇게 마음이 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한테 요만큼도 생명에 언짢음을 주려고 하지 않고 남의 거를 거저 먹으려고 하지도 않고 그랬기 때문에 고만 죽어버리기까지 했죠. 그래서 저는요, 그 사람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데 사람이라고 합시다. 보이는 사람이라고 그래도 좋습니다. 그 사람을 저는 항상 믿고 열쇠를 맡기고 일을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쪼끔도 깔축은 없는데 융통성이 조금 없어요. 지혜가 있고 좀 더 하면은 좋을 걸…. 이런 게 조금 아쉽긴 해도 너무나 착하니까. 모든 각 우주의 법망에 어디든지 통과가 안되는 게 없거든요. 이것이 인간에게도, 이 지구에도, 어떠한 물체에도, 어떠한 별성에도 통신이 되는 겁니다. 전체 통신이 가능하죠. 그런 거와 같이 그렇게 착한 사람은 어디서 돌보든지 돌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남한테 뭐든, 이 마음공부를 하는 분들은 저 사람이 어떠한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그건 보지 마라 이겁니다. 지금 나 가기도 바쁜데 왜 거길 봅니까. 네? 왜 거길 봅니까? 그거부터 배워야지, 만약에 그거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이건 만날 그 그릇에서 엎드러져서 그 그릇에서 만날 헤어나질 못해요. 그게 습이에요.
그래서 잘못되는 거를 그대로 보지 마라 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보면서 보지 말고 안에다 놔 버려라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잘못된 물건은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 물건을 생산해 내도록 자비를 가져라 이 소립니다. 물건이 잘못되고 녹이 슬었으면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 좀 더 이렇게 해서 내면은 좋을 거 아니냐 이겁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거기다 넣으면 다시 생산이 돼서 나오게 될 수 있는 그 기간이 있을 거다 이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걸 참지 못해서 이거를, 이거는 “이 접시에 쪽이 떨어졌어!” 이럭하면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쪽이 떨어졌으면 쪽이 안 떨어지게 용광로에 넣어라 이겁니다.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금 이 쪽이 안 떨어진 것이 나오도록만 용광로에 넣고 말로 하지 말라 이겁니다. 왜? 지금 내가 바빠서 죽겠거든요. 지금 다시 자꾸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 생산을 해내야 할 텐데, 생산하는 거는 나중이라도 자꾸 넣어야 됩니다. 스스로 넣게 되면 스스로 용광로에서 새로 또 발견이 되면서 ‘아, 그때는 이렇더니 새로이 이게 나오는구나.’ 하고 또 달리 보일 때가 있고 달리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겁니다. 물건이 다르니까. 달라졌으니까.
그러니까 고정되지 않다는 얘깁니다. 고정되게만 보지 마라 이거예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달라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행을 다른 거를 하고 고정된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한 가지를 보고 고정되게 말을 집어낼 수 있겠습니까. 내일 다르고 모레 다르고 일 년 후에 다르고 몇 달 후에 달라질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그러니까 고정되게만 보지 마시고 둘이 아니게 마음을 내면서 마음을 여유 있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잘되다가…
문) 놓고 가는 공부를 하다 보니 처음에는 참 잘됐어요. 그런데 편안한 마음이 계속되다 보니 의정도 안 나고 뭔가 마음의 채찍이 필요한데 안되니까 조급한 마음이 들어서 갑갑해집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답) 아니, 왜 그렇게 요량이 없습니까? 그것이 잘되는 것만 알았지, 내리고 타는 거를 몰라서 그래요. 타면 내리고 내리면 타는 걸 몰라서, 걸림 없이 돌아갈 줄 몰라서 그래요. 50% 물질세계의 그 되는 것만 알았지, 물질세계로 나오게 할 수 있는 영향력을, 그 보이지 않는 데서 걸림 없이 돌아가는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그대로 되게 이렇게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이걸 어떡하지? 이거 이렇게 하려고 그랬는데,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그냥 맡겨 버리고 놓으면 되지, 뭐가 답답합니까, 그렇게?
마음은 체가 없어서 빨리빨리 생산을 해서 빨리빨리 현실로 나오게 하는 작업도 어려운 작업이에요. 그런 건데 그렇게 그냥 급한 마음을 가져서 되겠어요? 좀 느직하게 가지고, 예를 들어서 안되게 하는 거라면, 안되게 해서 좋은 일이라면 안되게 하고, 또 되게 해서 좋은 일이라면 되게 해라 하고 놔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가게를 한다 뭐를 한다 하는 것도 남의 돈을 부쩍 얻어 가지고는 아니, 하게 해 가지곤 망한다면 그건 안 하는 것만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못하게 하는 거라면 못하게 하고, 되게 하려면 되게 하고, 이걸 양단간에 ‘너만이 알아서 할 수 있다.’ 이러고 해결을 봐야 그게 지혜로운 마음이지, 그저 아무 거라도 해서 웅둥거려서 하기만 하면 좋은 것이 아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거를 양단간에 점을 찍으려면 그렇게 해서 놓는 거예요. 믿는 사람은 조급하지도 않아요. 왜 믿질 못하고 그렇게 조급하게 굴어요? 어련히 자연적으로 생길까 봐. 안 그래요?


869 호(2012-01-01)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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