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 불사 펼쳐온 남상민 한국예절문화원장

 팔상도 회화 자수 91점 제작 ‘화제’
견사값만 1억5천만원 …대작불사

불교 학자 남편 전종식씨 해설 붙여
30여년 동안 전국 전시 대중 감동
부부함께 ‘경전독송’ 하루 열고 닫아

 

자수로 표현된 부처님 ‘열반상’. 남상민 원장은 부처님의 일대기를 91점의 작품으로 표현해 화제를 모았다. 이후 전국을 돌며 전시를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1979년 신라호텔에서는 불교자수연구발표전이 열렸다. 남상민 한국예절문화원장겸 불교여성개발원 부원장(78)이 10여 년 세월동안 밤잠을 설쳐 완성한 부처님 일대기 자수 91점이 세상에 선보여 졌다. 남 원장의  혼신이 그들 안에 있었다. 모든 게 자신의 과업이라고 생각한 남 원장의 작품은 탄생부터 열반까지 부처님 일대기로 표현돼 새로운 불교 예술을 펼쳐냈고 전국을 돌며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그의 작품은 당시 남편을 월남전에서 잃은 아내, 아들의 지병으로 고심하던 어머니 등 인간사 고통에 빠져 있던 중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줬다.
 
피난 중에도 사찰 들러 삼 배 올려  
4월 23일 서대문구 홍제동에 위치한 한국예절문화원을 찾았다. 그 곳에 남상민 원장이 있었다. 오랜 시간 학교 강단에 섰고 지금까지 한국 예절 등 전통을 지키기 위한 삶을 살아온 남 원장.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녀는 부처님 일대기를 한 땀 한 땀의 자수로 펼쳐내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고 젊은 시절부터 매진해온 돈독한 불자였다. 우선 그녀를 오늘에 이르게 한 큰 서원이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의지해 온 불가와의 인연에 대해서도 물었다.


“어린 시절부터 불교 집안에서 자라 늘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갔어요. 그때는 법당 가서 절하고 스님 뵙는 게 좋았어요. 또 절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25 전쟁 때에요. 당시 중3이던 저는 언니와 다섯살된 남동생과 함께 피난을 갔어요. 지병으로 누워 있던 아버지와 간호를 해야 했던 어머니만 결국 서울에 남고 저희 남매 셋이서 청평으로 또 계룡산으로 피난을 갔죠”


세 남매는 그렇게 한 달 넘게 서울서 걸어서 청평 유명산까지 피난을 갔다. 배가 고팠고 다리는 끊어질 듯했고 무간지옥의 전쟁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두려움도 배고픔도 물리칠 수 있는 큰 묘약이 있었다. 그건 바로 어디에 가도 항상 그녀를 자애롭게 내려다보며 웃고 계신 부처님이었다. 그녀는 지나는 곳마다 사찰이 있으면 들어가 3배를 올렸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졌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부모를 두고 온 서러움도 배고픔도 잊을 수 있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절만 보면 들어가고 싶었는지 몰라요. 절이 있으면 혼자 들어가 삼 배를 했어요. 부처님전에 삼 배를 올리면 이상하게도 정말 마음이 편해졌어요. 한 끼 먹을 밥도 없을 정도로 힘들고 가난했던 피난 시절이었는데 그렇게 부처님한테 위안을 받았죠”라며 당시의 힘들었던 상황을 회고하며 상념에 젖는다.

평생의 도반 남편을 만나다
이후 남 원장은 동명여고에 진학하면서 그녀 일생의 업으로 삼아온 자수를 만나게 된다. 전쟁 후 모두가 가난해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그때 학교에서 선생님 한 분이 미국인 잠옷을 대량으로 가져와 자수 놓는 일을 시킨다. 당시 학생들은 그렇게 자수로 돈 벌어 집안 생활비에 보탰고 어려운 시절을 이겨냈다. 그녀 역시 생계 때문에 자수를 배웠다. 그렇게 숙련된 실력을 차곡차곡 쌓던 중 남 원장은 고3이 됐고 자수기능대회에도 나가게 됐다. 여기서 최우수상을 타면서 그녀는 당시 교장 선생님의 눈에 들었다. 선생님은 낮 12시까지만 학교 공부를 하고 오후 부터는 교장실서 자수만 놓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그 덕분에 남 원장의 자수 실력은 나날이 향상돼 갔다.


이후 남 원장은 수도사범대(현 세종대) 가정학과에 입학 하게 되고 졸업식날 꽃다발을 덜렁 안겨준 남자 한 명을 만난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이자 평생 도반이 된 전종식(대승기신론연구회장)씨다.
“남편은 저희 과 친구 오빠였어요. 그 친구가 저를 오랜 시간 올케감으로 점 찍어 놓았다고 해요. 그렇게 한 번도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남자가 저한테 졸업식날 덜렁 꽃다발을 안겨줬어요. 그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죠. 이게 저희 친정집에서 가족회의를 열 만큼 큰 문제가 됐어요. 아버지와 오빠가 반대를 심하게 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부부의 인연이었든지 몇 달 후 한 식당에서 우연히 다시 남편을 만나게 되면서 결혼까지 이르게 됐죠”


현재 불교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남편 전종식 씨는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해 교통부와 철도청  공무원으로 일해 왔다. 남 원장도 동명여고 교사를 거쳐 세종대 인하대 동덕여대 한양대 등의 가정학과에 자수 강사로 활동했다. 그녀는 또한 한 집안의 며느리로 아내로 어머니로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꿈을 꾸게 된다. 자신의 주변에 빛이 찬란하게 발현하신 부처님이 지나가는 신기한 꿈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신기한 꿈이라 생각했고 이를 당시 홍법사 주지인 최일현 스님에게 털어놨다.  
“당시 스님은 서울로 올라와 홍은동에 터를 잡고 불사 하던 시절이었죠. 그날 스님을 찾아가 꿈 얘기를 해줬더니 불교계에 장엄한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 팔상도 책을 한 권 건네주었어요. 남편도 부처님 일대기를 담은 이 책을 갖고 수를 놓자고 했어요”


이후 남 원장은 해인사 송광사 등 전국 사찰을 돌며 부처님 일대기 고증 작업을 거쳐 이를 회화 자수로 표현하게 된다. 힘겹고도 어려운 고행이었다. 자수만 잘 놓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바탕서부터 밑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자수를 놓는 과정까지 모든 것을 섬세하게 고려해야 하는 고난위도의 작업이었다.
우선 바탕으로 사용할 천부터 결정 해야 했다. 견 면 인조 합성섬유 등 다양한 소재의 바탕천에 커피 진흙 산성염료 백반 등을 활용해 물감으로 사용해 바탕화면을 칠했다. 이 바탕천들이 잘 마르기 위해서는 습도 햇빛 바람 등 모든 환경이 잘 맞아야 했다. 여기에 도안을 뜨고 10가지 이상의 견사로 원근법 등이 다양한 자수기법을 활용해 작품을 마무리 했다.


 “당시 창경궁 같은 넓은 공간을 찾아가 거기에서 천을 말렸어요. 비용도 만만치 않았어요. 생활비의 5배에 해당하는 액수를 쏟아 부었죠. 당시 견사값만 1억 5000만원이 들어갈 만큼 큰 불사였지요. 남편이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형편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남편은 더 최선을 다하라고 항상 저를 격려해줬어요.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저를 격려한 건 아니었어요. 심지어 어떤 이는 왜 부처님 얼굴에 바늘을 찔러 자수를 놓냐는 비난도 많이 했어요. 이게 옳은 일인가를 고민 했고 굳이 이런 말까지 들으면서 이 작업을 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것이 제 사명이고 꼭 해내야 할 업(業)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고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죠”

남 원장은 서대문구 홍제동에 한국예절문화원과 자수박물관을 겸해 운영 하고 있다. 사진은 남원장의 자수 작품인 열반상

부처님 일대기 자수 완성은 나의 ‘서원’
이렇게 남 원장이 갖은 고생을 하며 작품 스무 점을 완성할 무렵 남편과 함께 당시 송광사 방장 스님 구산 스님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일생일대의 큰 변혁을 준 중요한 만남이었다. 
“스님이 당시 서울 종로구 사간동 법련사에 잠시 머물고 계셨어요. 그래서 스님을 찾아가 그동안 만든 자수를 보여드렸죠. 스님께서 작품을 보면서 매우 기뻐하셨죠. 앞으로도 꾸준히 연구해서 작품을 불교적으로 한층 더 승화시켜보라고 격려와 당부까지 해주셨죠. 그리고 남편에게는 백련 거사, 저에게는 해인광이라는 법명을 내려 주셨어요. 이후 남편은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게 됐고 저는 부처님 일대기를 자수로 완성하는 일이 제 일생의 큰 서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렵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 작업을 할 수 있었죠”


이후 남편 전 씨는 동국대대학원 불교학과에 입학해 공부하며 그동안 〈대승기신론을 통해 본 원각경〉 〈대승기신론을 통해 본 금강경〉 등 다수의 책을 펴냈다. 또한 지금까지 대승기신론연구회의 회장직도 맡고 있다. 특히 지난 2008년에는 사비까지 들여 번역한 〈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와 〈금강경의 세계〉 등 불서 600권을 전국 승가대학 학인들에게 무주상 보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남편은 사실 구산 스님을 뵙기 전에는 불교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그렇게 해서 구산 스님을 뵙고 발심하고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불교적 지식과 불심이 많았기에 제가 힘들어 할 때마다 남편은 교리를 공부하는 학자로서 부처님 일대기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해줬고, 저는 자수를 통해 불교를 홍포하는 포교사가 되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이후 남 원장은 탄생에서 열반에 이르는 부처님 일대기를 91점의 자수로 완성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남편 전 씨가 해설을 붙여 1979년 신라호텔에서 첫 전시를 열었다. 그녀의 작품은 30여년 동안 전국을 돌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런 진심이 그녀에게 전해졌을까? 그녀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팸플릿에 들어갈 작품 사진을 무료로 찍어주는 거사, 전시장을 빌려주는 전시 관계자, 또 정성들여 밥을 싸오던 관람객도 있었다.
“이중 제일 기억에 남는 보살이 있어요. 명문대생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이 장롱을 옮기다가 허리를 다쳐 몇 달을 누워 있어 마음고생이 심하다고 했어요. 그분께서 제 작품에 감명 받았다며 전시 기간 내내 그렇게 밥을 싸오셨어요. 또 한 분은 남편을 월남전에서 잃은 여자 분이었어요. 죽은 남편의 옷을 걸어놓고 매일 말을 걸 정도로 남편을 그리워했죠. 그 분도 제 작품을 보고 많은 위안을 받고 간다고 했어요. 그 동안의 고생과 애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며 큰 보람을 느꼈어요”


그렇게 30여년 전국을 돌며 부처님 탄생과 열반까지의 일대기를 작품으로 알리는 불교 전법사 역할을 톡톡해 해낸 것이다. “최근 전시는 3년 전 길상사에서 있었어요. 그때도 지방에서 버스를 대절해 관람을 하러 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죠. 또 어떤 교포 분은 비행기를 타고 우리나라로 오던 중에 저의 전시 소식을 들었대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첫 일정을 취소하고 전시장으로 왔다고 하더군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제가 그동안 공들여 만든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뿌듯했죠”

새로운 서원이 생기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수를 놓지는 않는다. 7ㆍ8여년 전 건강상의 문제로 자수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지난 88년 설립한 사단법인 한국예절문화원 운영에만 매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한국의 예절의식, 관혼상제, 다도, 복식예절 등의 수업이 이루어진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예절 교육을 매우 중요시 배웠어요. 저희 아버지는 여자가 밥상에서 입 벌려 쌈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예절을 중요시 여겼어요. 시어머니가 며느리 생일상을 차려줘야 한다고 할 만큼 가족 간의 예절을 철저히 하셨죠. 그렇게 한국식 예절이 제 생활에 배였고 이제는 그 전통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늘 불자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는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반야심경〉과 〈천수경〉으로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마무리 한다는 남 원장. 차를 마시면서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하루하루 일상을 곧 수행한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이제 그녀의 서원은 불교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리이타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내 것만 챙겨 살기보다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내 것을 내주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여유롭고 즐겁잖아요. 마지막 남은 서원이 있다면 불교박물관을 만드는 거예요. 그곳에 제가 만든 작품을 전시해 사람들에게 부처님 일대기를 알리고 불법을 홍포할 수 있는 기회를 삼았으면 합니다”


병환으로 걷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자수 작품을 손수 펼쳐 보여주던 남 원장.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어떤 고통이나 짜증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부처님을 향했던 그 마음이 온화한 평정심을 지켜주며 그녀의 새로운 서원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글=정혜숙 기자  bwjhs@hyunbul.com
사진=박재완 기자 wanihollo@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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