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을 만난 사람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어/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따뜻하고 정감어린 말씀으로 세상과 함께 했던 법정 스님이 어린왕자 곁으로 가신 지 어언 두 해. 해방둥이 이해인 수녀가 곱다라니 수놓은 시 ‘나를 키우는 말’을 읊조리면서 “태초에 말씀이 있으셨다”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깊은 고요 끝에 나온 첫 말씀에는, 따뜻한 말로 서로 보듬어 안아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환하게 수놓으라는 큰 뜻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날마다 고운 말을 쓰며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이 세상. 험한 말을 하며 헛되이 보낸 세월은 얼마나 많은지 돌아보게 된다.

천주교신자는 법정 스님 사인을
불자는 이해인 수녀한테 사인을
맑고 투명한 修女님 언어에
소리 없이 박수를 보냅니다

어느 해 도예가 김기철 선생 전시회 때, 법정 스님이 오셨다는 말씀을 들은 이해인 수녀는 성당 다니는 엄마들과 전시회장엘 갔다. 그곳에서 보기 드문 신선한 풍경이 벌어졌다. 성당 다니는 엄마들은 스님한테 사인해 달라고 하고, 불자들은 이해인 수녀한테 사인을 부탁하는.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해로 말을 많이 할 선량들에게 일러주고 싶다. 법정 스님 수필집 한 권, 이해인 수녀 시집 한 권은 꼭 읽고 난 뒤에 출사표를 던지라고.

“76년 2월에 제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 나왔을 무렵, 법정 스님은 이미 <영혼의 모음>과 <무소유>로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계실 때였어요. 법정 스님 글에 매료된 동무가 불일암 주소를 적어 보내면서 <민들레 영토>를 한 톨 스님 암자에 날려 보내지 않겠느냐고 편지를 보냈어요. 저는 스님께 편지를 드리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동무 얘기를 듣고 불일암으로 편지를 드렸어요. 그런데 스님이 생각보다 빨리 답장을 주셨어요. 다정하게. 저는 스님이 쓰신 글 가운데 <영혼의 모음>에 있는 ‘어린왕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그런데 스님이 어린왕자 촌수를 이야기 하면서, 시는 누워서 읽어야 제 맛이라며 격려 말씀을 해주셨어요.”

修女님
보내주신 사연과 詩集 감사히 받았습니다. 어린왕자 촌수로 따진다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밤하늘별을 바라볼 줄 아는. 누워서 <민들레 영토>를 몇 편 읽었어요. 詩集을 뻣뻣한 자세로 읽을 수야 없으니까요. 맑고 투명한 修女님 言語에 소리 없이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영원한 사랑의 약속과 함께 시와 더불어 살겠다는 결의’에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나는 큰절에서 한 오리 떨어진 암자에서 혼자 삽니다. 밥도 짓고 나무도 하고 졸기도 하면서 비교적 게으르게 지내고 있답니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서는 무척 미안하지만 얼마동안은 이렇게 지내고 싶습니다…. 요즘 내 암자 뜰에는 해질 녘이면 달맞이꽃 잔치입니다. 저녁 시간은 그 애들이 문 여는 것을 지켜보면서 消日합니다….

허리는 꼿꼿이 세우고 묵상을 하라
빚을 져서는 안 되겠지만
사랑해야 할 빚만은 남아있다

두 분 현품대조는 법정 스님이 돈연 스님과 함께 이해인 수녀가 사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을 찾아 이루어졌다. “스님께 도너츠를 드렸더니 ‘증거인멸 합시다.’ 그러면서 드시데요. 증거인멸이란 말을 그때 처음 들었어요. 그때 스님 인기가 막 하늘을 찌를 때라 피하고 싶으셨나 봐요. 타종교 기관에 가면 숨을 수가 있잖아요. 우리 집에 오신 김에 예비수녀들에게 한 말씀해주시라고 부탁드렸어요.” 법정 스님은 수녀님들이 아침 묵상을 할 때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다고 모두 고개를 앞으로 수그리느냐 건강을 생각해서 허리는 꼿꼿이 세우고 묵상을 하라면서, 절제하는 삶과 수도생활 초심자들이 가져야할 마음가짐을 일러주었다. “스님과 광안리 바다를 거닐었어요. 그때는 바다가 한적했거든요. 스님은 ‘산만 보고 살면 국이 없는 밥을 먹는 것 같은데, 바다를 보면 마치 국이 있는 밥을 먹는 느낌이 든다’고 하셨어요.”

수녀원 아침 기도에 동참한 법정 스님은 ‘여러분이 빚을 져서는 안 되겠지만 사랑해야 할 빚만은 남아있다’는 바오로 성안이 너무 좋다고 베껴 쓰기도 했다. 스님은 이해인 수녀에게 여행용 성물(십자가)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바다 생각이 난다면서 천주교 분도출판사 시청각실에서 나온 닐 다이아몬드가 작곡한 ‘갈매기의 꿈’이란 영화 주제음악 테이프를 구해달라고도 했다. “산에서 우표 구하기가 어려우니까 예쁜 우표가 새로 나오면 구해서 보내드리면 아주 좋아하셨어요. 또 스님 부탁으로 <이름 없는 순례자>란 책을 구해서 보내드렸더니, 스님이 ‘내 지령에 즉각 응답해주신 수녀님께 감사드린다’는 편지를 주셨어요. 스님하고 서른 해 남짓 우정을 쌓았다 해도 만나 뵌 것은 열 번이나 될까요? 가끔 편지나 주고받는 인연이었어요.”

이해인 수녀가 지원자 담당을 할 때 보살피는 예비수녀들이 법정 스님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해인 수녀는 스님한테 하고 싶은 말 한마디씩 쓰라고 해서 스님에게 보냈다. “스님이 아홉 자매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자상하게 공동답장을 보내셨어요.”

아홉 자매님 고마운 편지에 대한 回信을 뒤늦게 씁니다. 말째 베로니카: 어제 큰절에서 수련하는 학생들이 40여 명 우리 佛日에 올라왔기로, 一列 횡대로 새워 놓고 거꾸로 보기를 시켰습니다. 그 모습 또한 볼만해요. 방문객들에게 노래를 시키는 게 요즘 내 취미랍니다…. 여섯 째 류 글라라: 요즘은 소위 日照量이 적어 잘 마르지 않은 빨래를 말려야 합니다. 땀 흘리지 않더라도 內衣는 자주 갈아입는 게 내 성미입니다. 베개가 높으면 안 좋대요. 高枕 短命也라…. 아가다: 그래요. 진정한 친구는 말이 소용없지요. 수도자는 말을 할 때 세 번쯤 생각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말이 나한테도 이롭고 듣는 쪽에도 이로운 말일까? 서로가 이로운 말이라면 하고. 이롭지 않은 말이라면 삼켜버려야 합니다. 꿀컥. 수도자가 말이 많은 것은 속이 그만큼 비었다는 증거입니다…. 셋째 아셀라: 올 여름 이 지루한 장마는, 비님을 좋아한다는 아셀라를 위해 있는 것 같군요. 그런데 농사가 안 되어 큰일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흉년이 들면 어쩌지요? 풍년이 들어 모두가 넉넉하게 살아지이다 하고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큰 언니 히야친타: 성급해서 하루 전날 왔다구요? 그래요. 집을 떠나려고 결심이 되면, 누가 어디서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조급해지는 게 모든 出家 수도자 심경일 것입니다. 마아가린 통에 바이올렛을 심듯이, 정성을 다해 수도생활에 한결같이 정진한다면,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될 것입니다. 8월 말쯤 우리는 현품대조를 하게 될 것입니다. 다들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1980. 8. 15  빗날  佛日庵에서 합장

“스님은 제게 새 이름 가운데 뻐꾸기 이름 밖에 아는 게 뭐가 있느냐면서 놀리기도 하셨어요. 또 대학원엘 갔을 때 비교종교학을 공부하는 것도 괜찮다든지, 중요한 터닝 포인트 때마다 조언을 해주셨어요. 지원자 담당을 할 때는 어린 나무는 뿌리를 잘 내려야 되니까 기초를 잘 잡아 줘야한다고도 하시고. 제게 야단도 치셨어요. 글씨 못 쓴다고. 편지를 두세 번 되풀이해서 읽어야 문맥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다고. 제게 가끔 후원금을 홍콩 돈으로 보내는 엄마가 있었는데, 보내온 돈을 착착 접어가지고 스님 뵈면 맑고 향기롭게 후원금이라고 드렸어요. 그러면 스님은 ‘또 러브레터 주는 거야?’ 말씀하곤 하셨어요. 제가 환속한 친구 때문에 힘들어하면, 달래주는 편지를 주시고. 한번은 유명세 때문에 하도 힘들어가지고 스님께 여쭈려고 광주에서 베토벤음악감상실을 하는 정옥 보살님이랑 불일암을 찾았어요. 그 때 스님이 밭에 가셔서 손수 농사지은 케일을 따다가 갈아 주셨어요. 너무 써서 얼굴을 찡그렸더니 대접을 하면 웃으면서 마셔야지 소크라테스가 독약마시는 표정을 하고 있다고….”

한번은 기자들이 법정 스님 마음을 묶어둔 난초이야기를 하면서, 수녀님 마음을 잡아둔 난초는 뭐냐고 물었다. 법정 스님이 아끼던 난초를 바람 쏘이려고 바깥에 놔두고 깜빡 잊고 나들이 갔다가 뒤늦게 그 일을 떠올리고 허겁지겁 돌아와 보니 뜨거운 햇살을 받은 난초 잎이 축 늘어져 있더라는 이야기다. 그 뒤 스님은 가까운 지인에게 난초를 들려 보냈다. 이해인 수녀는 돈이나 모든 살림을 공동체에서 관리를 해주니까 조개껍질 몇 개와 솔방울 몇 이 붙들어 맬까. 다른 건 없다고 답을 했단다. 말씀 끝에 인세 쓰임새가 궁금했다. 이태 전 법정 스님이 원적에 드셨을 때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 한 것 가운데 하나가 스님 인세는 어디에 어떻게 썼느냐 이었기에. “저는 계좌번호는 앵무새처럼 달달 외우지만 만들 때말고는 통장을 본 적이 없어요. 그저 한 해를 마감할 때 그동안 들어온 인세가 얼마나 되는지 경리과에 뽑아달라고 부탁해요. 출판사에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하니까요. 저도 사람이기에 궁금할 때도 있어요. 그러나 얼마가 들어왔는지 보게 되면 다른 맘이 생길 수도 있고, 또 옛날엔 이만큼 벌었는데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고 해서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아요. 이곳에 들어올 때 청빈서원을 하고 모두 공동소유기 때문에, 제게 도움을 청하는 이웃이 있으면 수녀원에다 ‘좀 도와주십시오’ 올려서 수녀원 이름으로 돕지. 제 이름으로 하는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에요.” 무소유는 철저하게 공동소유를 가리킨다.

몇 시간을 이야기 나누다보니 ‘내가 지금 암을 앓고 있는 분을 만나는 게 맞아?’ 싶게 이해인 수녀는 한 마디로 ‘씩씩 명랑’ 모드다. 까닭이 뭘까? “제가 밖에 살았으면 한 가정을 일궜겠지요. 그런데 수도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꾸렸으면 갖지 못했을 많은 벗과 이웃을 다 친척처럼 여기게 되었어요. 게다가 병을 앓다보니까 한 순간순간이 너무나 소중해요. ‘어? 내가 살아서 움직이네.’ 언젠가는 다 내려놓고 떠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 용서 못 할 일이 없고 마음이 넓어지는 것 같아요. 놀랐어요. 아픔을 요리하고 받아들이는 제 방법에. 울고 짜고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외려 기쁜 거야. 이런 저를 보면서 나 참 괜찮네. 아픔 가운데 진주를 발견한 이 기쁨.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몰랐을….”

암환자에게 러브레터를
다 낳은 함박꽃은 강퇴시키고
기도는 날줄과 씨줄이 어우러지는
살갑고 도타운 정情이자 그리움

이해인 수녀를 따르는 암 환자들은 “수녀님 같은 분도 암에 걸리니까 내가 암에 걸린 게 죄는 아니다.” 또는 “수술을 앞두고 걱정이 되는 데 수녀님을 생각하면서 힘을 얻는다. 나도 수녀님처럼 암하고 동무가 되어 동행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면서 이해인 수녀도 암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편지를 보낸다. “내 아픔조차도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야? 선물이네. 그러다 보니 푸념하고 한탄할 시간이 별로 없더라고요. 아픈 사람들이 친밀감을 느낀다니까 괜히 벙글벙글 웃게 돼요. 아픈 사람이 전보다 더 밝다고들 하죠.” 그렇기에 이해인 수녀가 머물면서 시를 쓰고 글을 다듬는 글터이자 작은 문학관인 서재는 암환자들에게나 그 밖에 다른 이들에게 위안과 기쁨을 주는 ‘마법의 성’이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모든 걸 다 이룰 수 있고 ‘명랑 씩씩’한 꿈이 샘솟는 곳이기에.

“암 환자들이 대개 침울해요. 언제 또 병이 도질까.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 수녀원에도 암환자가 늘어가니까 안 되겠네 싶어서 ‘아픈 사람 다 모이’게 해서는, 아픔을 상징하는 가시달린 ‘찔레꽃’이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암 환자 수녀님들 모이세요.’하기보다 ‘찔레꽃들 모이세요.’하면 듣기도 좋잖아요. 언론에 암 정보가 나오면 같이 나누기도 하고, 가끔 뭐 먹고 싶으냐고 물어서 나눠먹기도 하고, 얼떨결에 제가 ‘찔레꽃’ 대표이사가 됐어요. 왕언니.”
이해인 수녀는 새로 암환자가 생기면 러브레터를 써서 보내고, 명랑 투병을 한다. 다 나은 사람은 함박꽃이라고 부르면서 기꺼운 마음으로 강퇴시킨다. 지지난해, 간암으로 투병하던 찔레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꼬박 한 해를 앓다가 돌아갔는데, 발병하자마자 ‘수녀님, 저도 찔레꽃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랬단다. “그렇게 찔레꽃 학교에서 졸업한 그 수녀님은 비록 암에 걸려서 내일 당장 병원에 실려 가더라도 아직은 웃을 수 있으니 고맙다며 즐겁고 기꺼워했어요. 처음엔 재미삼아 찔레꽃 모임을 만들었는데 너무 좋아요. 저는 기억력이 좀 좋아서 누가 지나가는 말로 뭐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면, 기억해뒀다가 ‘수녀님, 이거 갖고 싶다 그랬지?’하고 주면 ‘아니, 수녀님한테 부탁드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하면서 눈이 동그래져요. ‘바람결이 전해주던데.’ 그러면서 줘요. 큰일은 못해도 매개 노릇을 잘해요. 기쁨 발견 연구회.” 그야말로 타고난 사랑을 주는 메신저. 기쁨 발견 연구회장이다.

“예기치 않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람도 그전 같으면 냉정하게 맞았을 텐데, 요새는 ‘이게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는데’ 싶어서 선뜻 맞아들여요. 정현종 시인이 ‘방문객’이란 시에서 ‘사람이 오는 일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한 사람 일생이 온다’고 했듯이, 그 사람 일생이 내게 오는 건 이 순간뿐인데 놓치고 후회 말고 잘해드리자. 그렇게 마음먹었어요. 어느 때는 몸이 고달프기도 하지만, 테레사 수녀님말씀처럼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하지 뭐’ 이러면서 이 일이 성당에서 올리는 기도 못지않게, 주님께 찬미 영광 드리는 일이다. 사람들이 날 만나면 기쁘다니까 보여줄 수 있을 때 기꺼이 보여드리지 하는 마음이에요.” 이해인 수녀 기도는 날줄과 씨줄이 어우러지는 살갑고 도타운 정情이자 그리움이고 애틋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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