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는 무아(無我)이어야 한다
선시는 무아(無我)이어야 한다
  • 윤창화 민족사 대표
  • 승인 2011.07.0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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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화의 선원총림을 가다37- 선시, 선문학의 세계

▲ 제주 법화사에서 2006년 건립된 탄허 스님 선시비.

선(禪)은 문학이 아니다. 선은 언어도단의 세계로 문자와는 먼 거리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승들은 문인(文人)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선시(禪詩), 선문학을 낳았다. 탈속 무애한 시적(詩的) 영감, 그것은 직관적 사유로부터 발아된다.

깨달음의 세계, 선(禪)의 세계에 대해 읊은 선승들의 게송(偈頌, 싯구)을 ‘선시(禪詩)’라고 한다. 선문학의 백미는 선시이다. 선시에는 깨달음의 순간을 노래한 오도송(悟道頌), 임종에 즈음해 읊은 열반송(涅槃頌) 그리고 일상 속에서 선미(禪味)를 느낄 때 읊은 시(詩), 선의 세계를 노래한 시(詩) 등이 있다.

그러나 모든 선시는 탈속함이 있어야 한다. 해탈한 선승의 입에서 나온 싯구가 그리움ㆍ이별ㆍ슬픔ㆍ고뇌 등 애잔한 감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거나, 중생적인 감성 혹은 음풍농월(吟風弄月)적인 시는 세속의 명시는 될지 몰라도 이른 바 선승의 시(詩)는 될 수 없다. 탈속한 맛이 없다면 그것은 선시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속적 시와 선시가 어떻게 다른지, 각각 한편씩 감상한 다음 그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겠다. 모두 다 널리 알려진 명시이다. 먼저 이백(李白; 701~762)의 ‘정야사(靜夜思; 고요한 밤의 그리움)’이다.

“침상 앞 밝은 달빛 바라보니/마치 땅 위에 내린 서리 같네./고개 들어 산에 걸린 달 바라보다/고개 숙여 고향을 그리워(생각)하네./[床前看月光/疑是地上霜/擧頭望山月/低頭思故鄕]/”이백은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울분을 안고 평생토록 중국 전역을 방랑했던 그의 심정을 잘 드러낸 대표적인 시(詩)이다. 특히 3, 4구 “고개 들어 산에 걸린 달 바라보다/고개 숙여 고향을 그리워(생각)하네”는 고향,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한 명시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 시 속에는 ‘그리움’이라는 애잔한 감정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읽고 나면 왠지 마음이 울적, 침울해진다. 수심이 깊이를 더한다.

다음은 고려 후기의 문인인 이규보(李圭報; 1168년∼1241년)의 ‘영정중월(詠井中月; 우물 속의 달)’이라는 시이다. 역시 이규보의 대표작에 속한다.“산에 사는 스님 달빛 탐내어/물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가누나./절에 가면 비로소 깨닫게 되리./물 부으면 달 또한 비고 없게 되는 걸/[山僧貪月色/幷汲一甁中/到寺方應覺/甁傾月亦空]” 이 시는 ‘일체는 모두 공(空)한 것’이라는 것을 달을 통해 묘사해 내고 있다. 산에 사는 스님이 우물에 비친 달빛이 매우 교교해 물과 함께 병 속에 담아 가지만, 암자에 이르러 물을 부으면 달도 함께 텅 비어 공(空)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물의 달을 사랑해 길어가고 싶은 것은 스님이 아니고 아마 이규보일 것이다. 맑고 아름다운 달빛, 보름마다 떠오르면 바라다보면 될 뿐, 탐하면 애착이 생긴다. 애착은 스스로를 구속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되 탐하지 말라는 것이다.

1, 2구는 달빛이 너무 좋아 탐내고 있는 모습은 여느 세속 시와 차이가 없다. 그런데 3, 4구에서는 “절에 돌아와 비로소 깨달게 되리./ 물을 부으면 달도 따라 텅 비게 되는 것을’이라며 ‘일체는 공,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결하게 일깨워주고 있다.

이 두 시를 놓고 본다면 이백의 시에서는 번민, 고뇌, 그리움 등 인간적인 애잔함을 불러일으키고, 이규보의 시에서는 애착, 탐욕은 무상하다는 것을 일깨워서 번뇌를 끊게 하고 있다. 이규보의 시는 선시로서도 백미이지만 문학적 가치도 매우 높다. 당송팔대가를 능가하는 시(詩)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진리’라서 언어문자를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不立文字] 곧바로 당사자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직시하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고 한다.[直指人心, 見性成佛] 그래서 선은 언어의 수식을 뽐내는 시문학과는 강 저편에 있다.

또 다른 선시를 하나 감상해 보자. 남송 때 묵조선 계통 선승인 천동여정(天童如淨; 1163~1228)선사가 지은 반야송(般若頌)이다. ‘땡그렁 뎅’ 하는 풍경 소리가 반야를 노래하고 있다고 한 시(詩)다. 선시 가운데서도 첫째나 둘째를 다툰다.

“온 몸 입이 되어 허공에 걸려/동서남북 바람 가리지 않고/바람과 함께 한결같이 반야를 노래하네/ 땡그렁 뎅, 땡그렁 뎅/[通身是口掛虛空/不管東西南北風/一等與渠談般若/滴丁東了滴丁東]/”

이 시는 선시 가운데서도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풍경소리가 반야를 노래하는 것으로 본 그 자체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시상(詩想)이다. 깊은 직관력을 갖춘 경지라야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소리”라고 노래한 적도 있지만, 천동여정의 시는 조금도 가식이나 군더더기를 찾아 볼 수 없다. 매우 문학적이면서도 선의 뿌리인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을 유감없이 읊어내고 있다.

통신시구(通身是口), 처마 끝에 달려 있는 풍경을 올려다보면 그것은 그대로 입 전체다. 무심한 풍경은 동서남북 풍을 가리지 않고 바람과 함께 쉼 없이 반야지혜를 설하고 있다. ‘땡그렁 뎅’ ‘땡그렁 뎅’. 깊은 산사의 풍경소리는 니르바나로 향하는 반야의 소리, 무명 번뇌를 정화한다.

천동여정선사의 문하에서 수학한 일본 조동종의 개조인 영평사 도원(道元; 1200~1253)은 이 시가 선시로서 단연 최고의 격을 갖췄다고 했다. 도원은 이 선시에 감동돼 여정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선승의 입에서 나온 게송, 즉 선시는 탈속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문학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선과 시(詩)의 결합체가 선시이기 때문이다. 선시는 조금도 가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속에 자기가 있어서도 안 된다. 또 인간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어서도 안 된다. 선시는 번뇌 망상을 제거해 주는 언어라야 한다. 무아(無我)이어야 한다. 다시 한 구를 더 보도록 하겠다.

“천 척의 낚싯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 일자마자 만파(萬波) 따라 인다./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서 고기 물지 않고/ 청아한 달빛 속 배 가득 허공 싣고 돌아오네./[千尺絲綸直下垂/一波載動萬波隨/夜靜水寒魚不食/滿船空載月明歸]”

이 시는 당대(唐代)의 선승인 선자덕성(船子德誠, 미상) 선사의 시이다. 너무나 유명한 선시라서, 남송 때 선승인 야보 선사가 재음(再吟)한 이후에는 마치 야보송처럼 알려져 있다. 1구는 무심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2구는 만법일여의 경지, 3구는 고요, 적멸의 경지, 4구는 공(空)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1~4구까지 뭐 하나 번뇌 망념이 끼어들 틈이 없다. 감상적인 것 같은데도 그렇지가 않다. 특히 “맑은 달빛 아래 배에 가득 허공을 싣고 돌아온다[滿船空載月明歸]”는 결구는 이 시의 압권이다. 또 하나의 선시를 감상해 보자.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 밑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 하나 없네./[竹影掃階塵不動/月穿潭底水無痕]”

이 시는 <금강경 오가해>에 있는 야보선사의 게송인데 아주 문학적이다. 그러면서도 절묘하게 무집착의 세계, 공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먼지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적멸(寂滅)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다. 번뇌의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 마음을 건드려도 조금도 티끌이 일어나지 않는다. 달빛이 연못 속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다. 그것은 곧 공(空)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공의 세계에는 흔적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그것은 공이 아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는 “대나무가 섬돌을 쓸어도”라고 해야 맞는데, 지금 야보선사는 상식과는 달리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라고 읊고 있다. 부사의(不思議)한 경지이다. 그림자와 달빛, 지금 이 둘은 분명 있지만, 실체는 없다. 무집착이고 공(空)이다.

선승들이 읊은 시라면 모두 선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논한다면 선의 경지, 선지(禪旨)를 드러낸 시(詩)가 아니면 ‘선시’라고 할 수 없다. 공, 무아, 무집착, 무소유, 불이(不二) 일여(一如), 일체유심조, 언어도단 등 선의 세계를 드러낸 시가 아니면 그것은 일반적인 시(詩)일 뿐, 선시는 아니다. 현대 스님들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선문학의 대표적인 장르는 선시이다. 선과 시(詩), 시와 선의 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천착한 사람은 남송 말기의 이론가인 엄우(嚴羽; 1197?~1253?)이다. 그는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선의 목적은 오직 묘오(妙悟)에 있다. 시(詩)의 목적도 묘오에 있다[禪道惟在妙悟, 詩道亦在妙悟‘”라며 선과 시 모두 궁극적인 목적은 묘오(妙悟)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문학사에서는 ‘시선일여(詩禪一如)’ ‘시선일치(詩禪一致)’라고 한다. 또 그는 선승들의 시는 성당(盛唐) 때까지가 가장 뛰어나고(第一義), 만당(晩唐) 이후는 격이 떨어진다[第二義]고 평하고 있다.

한국 현대문학에서 ‘선시(禪詩)’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이다. 이때부터 문학에서 조금씩 ‘선시(禪詩)’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하게 된 것은 석지현의 <선시(禪詩)>(1975, 현암사)이다. 그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중국, 한국 선승들의 시를 모아 번역을 하고 선적(禪的)인 해설을 달아 출간했는데, 한 때는 이른바 선객이나 시인치고 선시 한두 편 외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후 승려들의 현대시도 모두 선시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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