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의 조각 : 불전(佛殿)ㆍ의식(儀式)ㆍ불상(佛像)을 중심으로

- 강사 : 송은석(삼성리움미술관 고미술학예연구실 선임연구원)
- 주최 : 서울대 박물관
- 일시 : 5월 28일
- 장소 : 서울대박물관 강당


‘한국사는 불교사와 함께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중국불교가 한국 땅에 전래되고 해로(海路)를 통해 간다라 양식의 불교가 가야국으로 전해진 이후 국가의 운명과 함께해온 것이 한국불교다. 1600여년의 시간이 흘러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의 종교는 분명 다원주의 형태이다. 문제는 다원주의 방식의 종교 스펙트럼이 지향하는 방향은 하나의 밝은 빛으로 화합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진행 중인 서울대박물관 주최의 강좌 ‘불교미술-붓다의 세계를 보다, 그리다’에 주목한다. 궁극적 붓다의 세계를 현실에 비추어 이상화한 종교예술의 한 형태인 불교미술을 집중 조명한다. 불교미술로써 도달하고자 하는 염원의 세계는 욕구 충족의 재현을 넘어 붓다의 가르침이 지닌 본래의 함의(含意)를 담는다.
임진왜란 후에 재건된 사찰의 대웅전은 크고 작은 여러 의식과 예불이 행해지던 복합적인 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시대 불교의례집인 <작법귀감> <범음집> <석문의범> 등에서는 대웅전의 내부를 삼단(三檀)으로 나누어 상단을 불단(佛壇)ㆍ중단을 신중단(神衆壇)ㆍ하단을 영단(靈壇)으로 구분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후기의 대웅전은 기본적으로 석가불을 예경하는 불전이지만 별도의 예경공간이 없었던 신중과 영가(靈駕)를 대웅전에 함께 모시게 됨으로써 다수의 예배단이 함께 설치된 복합불전의 기능을 지닙니다.
불전 안에서 행해지는 의식이 많아짐으로써 불전내의 구조가 변화됩니다. 불상의 3가지 요소는 부처의 몸과 부처의 힘을 상징하는 광배(光背) 그리고 대좌(臺座)입니다. 고려시대까지는 잘 지켜져 오다가 15세기 불상에서 보면 광배가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광배는 없어지고 후불탱화 혹은 벽화가 그려집니다. 전 세계 불상들 중에서 광배가 없는 불상은 조선시대가 유일하다고 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든 ‘소조아미타불좌상(塑造阿彌陀佛坐像)’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광배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 1476년에 제작된 후불벽을 갖고 있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에는 이미 광배가 사라지고 후불벽화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후불탱화나 벽화가 언제부터 모든 사찰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불확실합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16세기 이전의 불전 대부분이 파괴되어 그 변화양상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후 17세기에 재건된 대부분의 불전에 봉안된 불전에 봉안된 불상에서 이미 광배 대신 후불탱과 후불벽이 일반화된 상황을 감안하면 늦어도 16세기에 전반적인 설치가 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후불탱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광배에 없던 수많은 불교존상들의 쓰임일 것입니다. 불전 내부에서 다양한 신격(神格)을 받들어 청하는 의식이 효과적이기 위해 형상화할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 중국의 명ㆍ청대 불전에는 조선시대 불전처럼 후불탱을 봉안한 에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중국의 불교신앙과 대비되는 조선후기 불교신앙이 가진 의식적 특징의 단면으로 해석됩니다. 더욱이 한정된 공간에서 예불의 공간을 확보하기위해 불단은 중앙의 뒤쪽으로 밀려 나고 불단은 넓어집니다.
17세기 불전 내부에서 일어난 평면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입면(立面)적 변화도 일어납니다. 불단의 천판(天板)에는 화려하고 높은 대좌가 올려 지게 되었으며 대좌와 별도로 불탁을 화려하게 장엄하게 됩니다. 예불과 의식에 사용될 공양물을 진설하고 상의 존엄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불단 위에 높은 대좌가 놓이는 현상은 이미 조선시대 초기인 15세기부터 나타난 것이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1층 또는 2층으로 구성된 보단(寶壇)이 천판 위에 놓여지고 그 위에 대좌가 놓여 불상이 봉안되는 위치는 더욱 높아집니다. 현재 조사된 바에 의하면 고려시대 이전의 불상 대좌는 대개 1미터 가량의 높이를 갖고 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오로지 대좌만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불상이 놓이게 되는 높이를 살펴보았습니다. 1430년에 조성된 강진 무위사 극락전의 불단은 높이가 82미터로 비교적 낮지만, 천판 위에 다시 71센티의 높이가 더해져 1478년에 조성된 아미타상은 153센티 높이에 봉안되게 됩니다. 불상이 높게 봉안된 원인은 불단과 대좌가 합쳐진 것이 직접적인 이유입니다. 17세 들어 불단이 높고 화려하게 장엄된 것은 불상을 좀 더 높고 성스럽게 보여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불전 내에서 예불과 설법이 많이 행해졌던 조선시대에는 좁은 공간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로 불상을 대해야했습니다. 예배 상에 친근감을 느끼게는 하였지만 존엄성과 경외감을 일으키기에는 부족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에 대한 조취로서 불상을 매우 높은 위치에 봉안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한 것은 아닐까요? 높게 우러러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인 불상이 예배자에게 큰 경외감을 일으켰을 것임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렇게 하여 높이 올려진 불상은 아래에서 올려보더라도 상호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으로 언급되어온 움츠린듯 한 자세와 숙여진 머리는 불교의 위축으로 인한 요인도 있을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요인은 불상 봉안의 위치 변화에 맞추어 불상의 원만한 상호를 구현하려는 조각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은 일반적으로 석가불을 주존으로 모신 전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후기 또는 중국 명ㆍ청대의 예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웅전은 사찰의 중심에 위치한 가장 중요한 전각이라는 의미가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불교를 이해하는 핵심이 삼방불과 삼세불입니다.
대웅전에 봉안된 불상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불상은 아미타불ㆍ석가불ㆍ약사불로 구성된 삼방불(三方佛)입니다. 대웅전에 봉안된 전체 불상의 66%를 차지합니다. 주존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협시한 삼불의 구성을 17세기 사찰의 주전각인 대웅전에만 봉안되고 다른 전각에는 봉안되지 않습니다. 전각의 크기에 따라서 삼불 사이에 4보살이 협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대웅전에는 삼불(三佛)만이 봉안됩니다. 이 삼불의 구성은 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의 교주인 아미타불과 사바세계영산교주(娑婆世界靈山敎主) 석가모니불 그리고 동방유리광세계(東方瑠璃光世界)의 교주 약사불이라는 공간상의 구분에 따른 불국토를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불교의 전통적인 방위 개념인 ‘方’을 사용하여 삼방의 부처님 세계로 칭합니다. 17세기 초반에 사찰이 재건되면서 삼방불이 전국적으로 조성되었던 사실을 보면 적어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 16세기 중반 경에는 삼방불상이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응진전(應眞殿, 羅漢殿)에는 중앙에 촉지인을 지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형의 제화갈라(提和竭羅)와 미륵(彌勒)이 협시한 형태의 삼존상이 봉안됩니다. 제화갈라는 과거불인 연등불(練燈佛)의 다른이름입니다. 미래불인 미륵과 현재불인 석가와 더불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존을 표현합니다. 조선시대 불상으로 삼존 모두가 불형(佛形)인 삼세불(三世佛)은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장연 송월산 학림사의 보광전에 미륵불ㆍ석가불ㆍ아미타불의 삼세불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겨져있습니다. 제화갈라와 미륵은 조선후기에 간행된 의식집인 <제반문(諸般文)>의 ‘나한청(羅漢請)’조에 좌우 보처보살로 나타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응진전 삼존불의 복장에서 발견된 복장발원문에도 제화갈라와 미륵이 석가불의 좌우보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등불에서 석가물 그리고 미륵불로 이어지는 수기삼존(授記三尊)의 완벽한 계승을 도와주는 존재입니다. 응진전에 삼세불이 주존으로 봉안될 수 있는 근거는 십육나한의 역할에서 이미 확보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불교미술-붓다의 세계를 보다, 그리다’는 일반시민 및 서울대학교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무료교양강좌다. 6월 4일 오후2시 서울대박물관 강당에서 강희정(서울대학교)교수의 "현세구복의 불교미술(Buddhist Art in Pursuit of Happines)"이라는 주제로 강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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