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와 열반 모양이 없도다”

兒心 眞俗非二 就是人)”라는 만장으로 표현했다.

일제강점시대였던 1930년 유점사로 출가한 덕암 스님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교가 하루빨리 깨어나야 한다면서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35년 일본 대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철원 심원사에서 불교전문강원을 수료했다. 이후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 선암사 칠전선원 등 전국 제방의 선원에서 참선 수행에 매진했다.

선암사 칠전선원 수선안거 중이던 44년 뜰에 핀 꽃을 보고 홀연히 대오견성 했다. “꿈에서 깜짝 깨어 티끌속에 세계 있음을 깨달으니 꽃은 뜰속에서 웃고 새들은 창밖에서 노래하네(警覺一夢中 一微含十方 花開庭中笑 群鳥□窓外)”는 당시 읊었던 오도송이다.

해방 이후 비구-대처승간 분규 때에는 동국학원 감사, 태고종의 전신인 불교조계종 교무부장, 월간 현대불교 편집위원 등을 지냈고,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 조계종 교무부장, 종정 사서,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다시 분규에 휘말리자 승단화합을 위해 온 몸을 헌신했으며, 태고보우국사로부터 내려오는 한국불교의 법통과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비구임에도 불구하고 태고종을 창종했던 뜻도 여기에 있었다.

태고종을 세운 후에는 총무원장, 종무총장, 종승위원장, 교육원장, 선암사 방장, 법륜사 조실 등을 역임하며 대승교화 종단으로서의 기틀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깊은 수행력으로 종도들로부터 존경 받아 왔다. 86~93년 태고종 제13세 종정을 지냈고, 98년 제16세 종정으로 재추대되어 서울 종로구 사간동 법륜사에서 주석해 왔다.

덕암 스님은 하심(下心)하는 생활을 삶의 철칙으로 삼고 평생을 화두로 삼아 실천했다. 손상좌격의 나이 어린 스님이 신도들에게 법문을 하더라도 반드시 참석해 경청했고, 누구에게도 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철저한 지계와 선교겸수를 가르쳤다. “계가 없으면 선도 있을 수 없고 교도 있을 수 없다”는 가르침이었다. 스님을 따르는 종도들에게도 “성품바다가 깨끗한 것이 출가승이요 마음구슬이 밝고 맑은 것이 보살의 길이나니, 부처님 자비광명 돌이켜 비추어 번뇌망상 씻어내고 자비의 방에서 인욕의 옷을 입고 힘모아 함께 정진하라”고 지도했다.

또한 스님은 늘 무소유의 삶을 강조했다. 제자들이 주는 돈을 모두 모아 종단을 위해 내놓는 등 평생을 청빈한 삶을 몸소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법문을 할 때면 “세상에 나올 때 한 물건도 가지지 않았고 세상을 떠날 때 또한 빈손으로 가나니 장차 한 물건도 가기고 갈수 없거늘 욕심부려 내몸에 업만 뒤따르네.(生來無一物 去亦空手去 萬般將不去 唯有業隨身) 욕망과 집착을 버리면 밝은 천하를 얻을 것이요 능이 이를 행하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慾着心具亡 可得明天下 如是能行者 不滅永生也)”라는 가르침을 빠뜨리지 않을 정도였다.

98년 IMF 체제로 국민들이 노숙자로 내몰리자 그들에게 공양을 대접하며 한끼 식사만으로 수행을 이어오는 등 수많은 덕화를 베풀어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덕암스님 가시던 날-‘가시는 듯 다시 오소서’

덕암스님의 영결식이 열리던 11월 26일 오전 10시, 서울 봉원사에는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려는 사부대중이 몰려들었다. 식의 시작을 알리는 명종 소리에 오색 만장이 휘날리는 도량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파도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한국불교의 진정한 큰스승 덕암 큰스님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비통함을 금할 길이 없다”는 태고종 총무원장 운산스님의 목 메인 영결사가 도량에 퍼지는 순간에는 덕암스님을 보내는 서글픔에는 출가도, 재가도 없었다.

생자(生者)는 필멸(必滅)이요 회자(會者)는 정리(定離)라, 무릇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태어나면 반드시 소멸하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정한 이치인 줄을 어찌 모를 것인가. 그러나 영결식이 끝난 뒤 다비를 위해 태고총림 선암사로 이운되는 스님의 법구를 따라 나선 3천여 사부대중은 가슴으로 빌고 또 빌었다.
‘가시는 듯 다시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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