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8년간에 걸친 발굴 조사 끝에 조성 당시의 사격을 드러낸 황룡사지. 이제는 연구 대상이라기보다 관광지로만 더 친숙한 이곳에 대해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한 소장 학자들이 있어 주목된다.

화제의 학자들은 11월 10일 '황룡사의 제조명과 보존정비 방향'을 주제로 열린 신라문화연구소의 제22차 학술회의에서 황룡사 목탑의 설계도면 제작을 제안한 권종남(세경대) 교수와 황룡사를 중심으로 세워진 천여 년 전 경주시(당시 왕경·王京)의 모습을 추적한 박방룡(국립경주박물관 학예사) 박사.

이날 '황룡사 목탑의 건축제도에 관한 고찰'을 발표한 권 교수는 "문헌으로만 알려진 목탑 가운데 유일하게 평면 규모와 층수 그리고 높이 등을 알려주는 게 황룡사 목탑"이라며 "황룡사 목탑의 설계도면을 그릴 수 있다면, 1차 사료 부재로 연구의 첫발도 내딛지 못하고 있는 한국 고대 목탑 연구에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룡사 목탑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황룡사사찰주본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해지며, 여기에는 설계도면을 그리는 데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권 교수에 따르면 이 정보들을 토대로 우선 시작해야 할 연구는 목탑의 구조 방식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권 교수는 <황룡사사찰주본기> 내용 중에서 신라 문성왕(839∼856) 대의 기록에 주목했다. 여기에는 황룡사 목탑이 동북쪽으로 기울어져 국가에서 수리를 위한 재목을 모았으나, 목재가 부족해 30여 년이 지나도록 수리를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따라 권 교수는 "현대 건축에서도 그 견고성을 인정받고 있는 법주사 팔상전, 일본의 법륭사오중탑, 중국의 불궁사 석가탑의 건축 방식을 연구하고, 황룡사 목탑의 구조 방식을 추론하는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안홍 스님 등 당대 중국 유학승들이 황룡사 목탑 건립을 처음으로 제안한 만큼 운강 석굴과 같은 동시대에 조성된 중국의 석굴 건축 방식을 토대로 황룡사 탑의 특징을 추론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권 교수는 "황룡사 목탑의 초석간 간격으로 처마의 길이를 역산하면 무려 4.7미터에 육박한다"며 "처마를 떠받드는 공포 역시 당대 사찰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공포였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신라 왕경(지금의 경주)의 조성과 황룡사 창건'을 발표한 박방룡 박사 역시 "황룡사는 기존의 학설과 같이 왕경의 남쪽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중심에 있었다"며 "황룡사를 중심으로 한 왕경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박사에 따르면 현재 진행중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황룡사지 남북도로 발굴은, 신라의 왕경이 황룡사의 창건과 함께 직선형의 도로가 건설되면서 형성됐음을 시사하는 유적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박 박사는 황룡사의 담장이 세워진 지역과 연접한 왕경대로를 발굴 조사한 결과, 황룡사 창건 시기보다 늦은 6세기 중반에 건설된 것으로 밝혀졌다는 데 주목했다. 10미터의 너비로 확인된 왕경대로는 왕경 지역에서 유례가 없는 초대형 도로인데, 신라의 왕궁인 월성 담장과 황룡사 담장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즉 황룡사는 왕경대로를 중심으로 월성과 마주보는 중요한 자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왕경의 남쪽이 아닌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박 박사는 <삼국유사>의 중악(中岳),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진산(鎭山)이라는 산 이름에 주목하고 "황룡사지와 인접한 낭산이 '중악'이나 '진산'으로 불렸을 뿐만 아니라 황룡(黃龍)의 '황(黃)'은 오방위(五方位) 정중앙을 상징하는 말"이라며 "신라인들이 왕경 전체를 불국토로 보았고, 따라서 그 중앙에 있는 낭산을 수미산과 같은 생각하고 사찰을 세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남동신(덕성여대) 교수의 '신라 중고기 불교치국책과 황룡사', 신동하(동덕여대) 교수의 '신라 불국토사상과 황룡사', 신창수(창원문화재연구소) 박사의 '황룡사 발굴성과', 곽승훈(목원대) 교수의 '신라 황룡사 승려들의 활동' 등이 발표됐다.

오종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