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가리왕은 자신의 살을 베어 비둘기 무게만큼 주기로 제안하고, 아무리 많은 살점을 베어 달아도 비둘기 무게만큼 나가지를 않았다. 마침내 가리왕 자신이 저울에 올라서자 비둘기 무게만큼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은 생명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경중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미국 사람이니까 그들이 한국인 보다 소중하다는 논리는 있을 수없다. 반면 한국인이 미국인 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도 있을 수 없다. 생명의 가치는 우열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가치에는 차별이 있는가 보다. 미군 궤도차에 두 명의 여중생이 깔려 죽었음에도 정작 그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어째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국가우월주의와 생명차별의식이 이면에 깔려 있다. 법적으로는 SOFA로 불리는 불평등조약 때문이다. 진정 미국이 우리의 우방임을 자처한다면 한국인의 인권을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평등한 조약이 되도록 SOFA를 개정하여야 한다.
작금을 보면 인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미국이 인권을 경시하고 있지 않은가? 두 여중생의 꽃다운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SOFA개정에 솔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