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야기 중 가리왕의 전설이 있다. 도망치던 비둘기를 숨겨준 가리왕에게 뒤쫓아온 독수리가 비둘기를 내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응하지 않자 독수리는 가리왕에게 ‘당신은 공평하지 못하다. 비둘기를 살려주는 것이 당신의 자비라면 배고파 죽는 나를 방치하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자비심인가?’하고 비판한다.

이에 가리왕은 자신의 살을 베어 비둘기 무게만큼 주기로 제안하고, 아무리 많은 살점을 베어 달아도 비둘기 무게만큼 나가지를 않았다. 마침내 가리왕 자신이 저울에 올라서자 비둘기 무게만큼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은 생명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경중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미국 사람이니까 그들이 한국인 보다 소중하다는 논리는 있을 수없다. 반면 한국인이 미국인 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도 있을 수 없다. 생명의 가치는 우열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가치에는 차별이 있는가 보다. 미군 궤도차에 두 명의 여중생이 깔려 죽었음에도 정작 그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어째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국가우월주의와 생명차별의식이 이면에 깔려 있다. 법적으로는 SOFA로 불리는 불평등조약 때문이다. 진정 미국이 우리의 우방임을 자처한다면 한국인의 인권을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평등한 조약이 되도록 SOFA를 개정하여야 한다.

작금을 보면 인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미국이 인권을 경시하고 있지 않은가? 두 여중생의 꽃다운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SOFA개정에 솔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