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始原)의 영산(靈山)을 찾아 중국의 산하를 여행하면서 기록한 자전적 여행기인 ‘영혼의 산’은 실로 고요히 흐르는 물처럼 편안히 읽힌다.
작가는 ‘영혼의 산’에서 결코 ‘우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라고 말할 때 곧 의심에 휩싸이며 ‘우리’보다 더 기만적인 것은 없다한다.
“나는 끊임없이 팽창해 가는 이 부자연스럽고 위선적인 ‘우리’의 사용을 피해왔다. 만약 내가 ‘우리’를 사용하게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내가 비할 수 없이 비겁해졌거나 헤어날 수 없는 정신적 고갈에 빠졌다는 신호가 될 것이다.”
작가의 ‘우리’에 대한 해석이 철학적인 것이었든 정치적인 것이었든 오늘의 한국에서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인 것 같다.
인류라든가 세계 등으로 확장되지 않은 좁은 의미의 ‘우리’라는 말에는 공동운명과 함께 짙은 배타성이 엿보인다.
특히 한국인에겐 ‘우리'의식이 강하다 한다. '우리 집' ‘우리동네’ 식으로....
한편 '우리'라는 말에는 안도감을 주는 그 무엇이 있다. 결코 나에게 해롭지 않은 같은 편, '우리'는 선(善)이고 그것이 악(惡)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더욱이 ‘우리는 깨끗하고 정의롭다’, 철석같이 믿는 독선의 경지에 들고 보면 다른 편은 모두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가오싱젠이 해석한 ‘우리’에는 그런 뜻도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여러 ‘우리’들이 위험한 충돌양상을 보이고 있다. 크게 확장된 ‘우리’가 아니면 ‘우리’자체가 악의 쪽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게 하는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김징자(언론인. 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