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용 환 (충북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

인간은 시간 안의 존재이다. 욕망의 중심 축을 살다 보면, '시간자체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상상까지 하게 된다. 순간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상상은 비극을 초래하는 원천이 된다. 반야의 지혜는 인간이 시간 안의 존재임을 성찰 할 때 터득되는 지혜이다. 그것은 바로 무소유의 정신과 상통한다.

국민 모두가 체감하는 위기감이 사회전반에 급속하게 만연되고 있다. 지난 9월 18일은 악몽의 '검은 월요일'로 뇌리에 각인 되어, 3년 전의 'IMF 위기'를 다시 느끼게 하였다. 유가가 치솟고, 대우차 인수포기로 구조조정의 부진은 다시 불거지고, 투자자들은 주식을 투매하고, 정치권은 수많은 악재에 대처하지 못한 채 국민들의 불신감을 증폭시키는 진원지로 바뀌고 있다. 더욱이 전국의 의대교수들의 의약분업에 대한 초강경 성명서가 나온 바 있지만, 정치권은 '너흰 떠들어라, 내 갈 길은 간다'는 식으로 무반응이다.

현금의 총체적 사회위기감은 <도덕경>의 이러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삶에서 벗어나 자진하여 죽음으로 뛰어드는 수가 있다. 제 수명을 다 하는 사람이 열 중 셋이요, 단명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열 중 셋이요, 장수할 사람이 사지(死地)로 뛰어드는 사람 역시 열 중 셋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지나치게 오래 살려고 욕심을 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늘은 장수를 수명으로 주었건만 인간의 과욕이 오늘의 사지(死地)를 만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삶에서 관용과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반야의 지혜가 결여될 때, 생명의 풍요가 아니라 죽음의 공포를 중심 축으로 삼는 사회위기감이 고조되기 마련이다.

의약분업의 경우,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근본취지는 옳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 근본취지를 지나치게 경직하게 의식하여 정책을 수립하게 되면, 종국적인 피해는 환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다시 말하면, 근본취지를 살리면서 국민에게 이익되는 방향으로 모든 정책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복리와 이익보다 더 큰 문제는 있을 수 없다.

약을 어디에서 사고 치료를 어디에서 받아야 되는지는 환자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를 지나치게 제약하면, 환자의 자유선택권을 침범하는 꼴이 된다. 현명한 환자들을 고려하지 아니한 가운데, 의약분업에 종사하는 분들에 대한 배려와 관용은 고사하고 의료 정책의 유연성마저 상실한 나머지, 이 땅의 수많은 생명이 죽음의 공포 속에 떨고 있다. 종전보다 두 배가 된 진료비와 약값은 유가인상에 따른 전기료의 대폭 인상분과 함께 국민들의 어려운 살림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고도 왜 모든 책임과 부담을 국민들이 떠맡아야 하는지, 이전에 만반의 대책을 왜 수립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는 식이다.

앞으로 몇개월을 잃게 되면 우리 경제가 또다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는 절박한 이 순간에도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마이 웨이'만을 외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누구든 시간 안의 존재임을 망각하여 사태의 공정성을 직시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집단의 생명을 단축시키게 된다. 특정 개체를 살리되 전체를 고려하지 않으면, 종국적으로 사회위기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이제는 누란(累卵)에 처한 총체적 사회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생명화육의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반야의 칼'이 더 없이 소중한 때다. 우리 사회와 경제는 더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다.

'반야의 칼'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과 통한다고 할 것이다. 현금의 비극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관용과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한 채 공동체적 생명을 압사시킬 정도로 경직되어 가는 데 있다. 관용과 유연성 발휘를 발원하는 심정으로 옛 선현의 시구를 인용해 보고자 한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반야의 지혜를 회복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때라고 생각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