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향해 출발할 때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남북정상이 55년만에 만나는 사실만해도 역사적인 일이라 생각하였다. 구체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는 이르다고 보았다.

그러나 2박 3일간의 회담 성과는 예상과 기대를 크게 뛰어넘는 것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파격적인 환대와 두 정상의 화기애애한 만남의 모습은 남북간의 이해와 신뢰의 분위기를 성숙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두 지도자는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북관계의 획기적 변화를 가져올 다섯 개 항목의 중요한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물론 남북간에는 7.4 공동선언,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합의 등 여러 차례의 공동 선언과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약속들은 문서로만 남고 남북관계의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룩하는데 별다른 역할을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상간의 직접합의라는 비중과 함께 과거에 비해 크게 개선된 국내외적 조건이 뒷받침되었다. 과거로 되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회담은 한반도 역사에 있어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통일의 물꼬를 튼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러한 성과가 두 정상의 만남으로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지난 3년 이상 김대중 대통령이 추구해 온 포용정책의 성과와 이를 바탕으로 한 신뢰가 쌓여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처음에 북측은 포용정책을 북한을 변화시켜 흡수하려는 음모라고 의심하고 비난했다. 그러나 성심과 인내로 일관성을 유지했기 때문이 북한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금강산 관광 사업 등을 통하여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었다. 공동선언으로 밝힌 5개항의 합의사항은 하나 하나가 남북한 관계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내용이다.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에 합의하고 통일방안에 대해 접근을 본 것은 그 동안 자주의 원칙에 대한 해석과 통일방안을 둘러싼 남북간 견해차이를 크게 극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8.15에 즈음하여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과 비 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에 합의하고(3항) 경제협력 및 제반분야의 교류, 협력을 활성화하기로 것은(제4항)은 두 정상이 원칙의 합의만이 아니라 이를 가시화 하는 구체적 사업을 전개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합의사항 실천을 위한 당국자 대화의 재개와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 합의는 이번 정상회담과 합의가 일회성이 아니고 지속적이고 제도적으로 추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남북양측 모두에게 남겨진 과제는 곧 이어질 당국자 회담과 분야별로 전개될 남북회담을 통하여 정상간에 합의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세부사항에 합의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당국자 회담, 연락사무소 재개, 핫라인 설치,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 8.15를 즈음한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관계 화해 분위기를 더 한층 고조시킬 일들은 큰 문제없이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직 미지수로 남는 것은 그러한 사항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가 지불할 대가는 얼마인지 그리고 우리 국민들이 정상회담을 환호한 그러한 정도로 그 대가를 기꺼이 지불할 의사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이 우리 국민들에게 다가온 정도로 북한주민들에게 김대중 대통령과 한국이 이미지를 구축했는가는 의문이다. 그들의 TV에는 김 위원장의 발언조차도 보도되지 않도록 철저히 언론통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후에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김대통령이 출발전 성명에서 밝힌 바 있는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 그것이다. 뜨거운 민족애와 통일의 염원을 간직하면서도 남북한에서 다시 나타날 수도 있는 역작용을 염두에 두고 절제된 목표와 차분한 심정으로 상대방의 입장도 고려하고 자신의 처지도 생각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합의된 내용이 실천에 옮겨질 수 있도록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정 천 구 (정치학 박사, 영산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