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세계 모든 생명
모두 내가 될 수 있고
내가 행할 수 있고
이끌 수 있어야 부처

내가 벗어나야 남을 벗겨줄 수 있어
자녀 사랑하는 부모마음이 곧 부처
말썽피우는 자식 업식 녹이면 밝아

불보살 가피도 타력인지요

문)진정한 보살정신은 모름지기 모든 중생이 성불한 다음에야 마지막으로 자신도 성불하겠다는 발원에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모든 중생의 성불을 기약하시며 몸을 나투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수억 겁의 습에 찌들어 평소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성불하기란 요원하고 자신의 성품을 보는 일조차도 기대하기란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런 까닭에 중생들은 자연히 제불보살의 가피를 빌게 되는데요, 이와 같이 견성 성불을 바라면서 불보살의 가피를 비는 것도 타력신앙이라 하여 배척할 일 인지요?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 밖으로 빈다면 그것도 타력이지요. 유마힐거사가 아파서 문수가 병 문안 왔을 때 “중생들의 병이 다 나아야 내 병이 낫겠노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회사를 운영하더라도 모든 것을 착수 해놓고 물건을 만들어서 시중에 내놔야 다른 사람들을 구제 할 수가 있는 거죠? 한번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내 몸뚱이 속에 중생들을 먼저 제도시켜야 법신·보신·화신이 충만하게 화해서 바꿔져 털구녘을 통해 들고나면서 응신이 돼 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내 몸 속에 있는 중생들이 다 제도가 돼야 마지막 자기가 성불로 완성을 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나를 완성하려면 내 속에 있는 중생부터 다 제도시켜야 만이 내가 완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둘로 보고 망상이다 뭐다, 또는 어떤 애고가 오면 밖으로만 온통 빌고 야단법석을 딴 데다가 하느냐 이겁니다. 그게 무슨 격이냐 하면 길을 가다가 엎드러져 놓고는 일어나려고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다 이겁니다. 땅에서 엎어졌으면 땅을 짚고 일어나야지 어떻게 허공을 허우적거려서 일어날 수 있습니까? 불보살님과 하나가 되지 않고 아무리 불보살님께 빌어 본들, 과거에 부처님이 이 자리에 계신다 할지라도 그건 안됩니다. 나를 깨닫는 것은 절대적으로 자기가 먹을 건 자기가 먹어야 되는 법입니다. 항상 그렇게 얘기했죠. 자기만이 똥 눌 수 있고, 잠 잘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죽는 것도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고요. 이 다섯 가지만은 대신해 줄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물며 내 마음 찾는 건데, 찾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건데 대신 누가 밥을 먹어줍니까? 타력이니 아니니 하고 분별하지 말고 진정 나를 발견해서 자유인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세상 너무 불공평해 보여요

문)세상은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요. 나쁘게 사는 사람이 더 잘 살아요. 착하게 사는 건 바보 같고 당하는 것 같아요. 세상에 태어나 나쁜 짓 안하고 착하게 사는데 그런 사람들이 더 상처받는 게 업 때문이라니 너무 불공평해요. 평생 자신이 의식하는 시간을 착하게 산 것으로 보답 받으며 살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요. 부조리로 가득 찬 것 같아요.

답) 악과 선이 어찌 없겠소? 그렇지만 고정되게 선이다 악이다 할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동시에 모두들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마음이란 그 놈이 도둑질도 시키고 선한 일도 시키고 좋은 일도 시키지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늘 좋은 일만 하는 게 아니고 악한 짓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늘 악한 짓만 하는 게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나타나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죠.

모두가 찰나찰나 화하기 때문에 평소에 착하던 사람도 앞에 일이 닥치면 어쩔 수 없이 나쁜 짓을 하게 되고, 또 나쁜 짓을 하던 사람도 어느 순간 일이 눈앞에 닥치면 좋은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러니까 좋은 일 하는 사람, 나쁜 일 하는 사람을 굳이 따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니까 말입니다. 어떤 것을 나쁘다고 하고 어떤 것을 좋다고 할 수 있겠느냐. 마음을 바로 쓸 때는 착하게 되고, 또 한 생각을 잘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악한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옛날에 한 강도가 어느 수풀 속을 지나가다가 보니까 한 여인이 어린애를 등에 업고 안고 걸리면서 엉엉 울고 가더랍니다. 그런데 밥도 못 먹여서 애들이 “엄마, 밥줘! 밥줘!” 하고 울고 가는데 참혹해서 그 강도가 볼 수가 없었더랍니다. 그래서 강도가 아닌 척 하고서는 다가가서 “어린애가 배고프다 그러는데 먹을 게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먹을 것도 없거니와 남편도 붙잡혀 가서 영 오지 않고 집도 오막살이 하나 있던 것을 뺏기고 어디로 갈 데가 없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강도질하면서 뺏어서 넣어뒀던 돈을 그 아이들 어머니에게 주면서 오두막이라도 하나 장만하고 먹고살라고 하면서 먹을 거 조금 집어 온 거는 그 애들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도둑질을 하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구나.’ 하고요.

그런 것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길에 가다가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발길로 차면서 말리는 척해요.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요. 말리는 척 하면서 돈을 얻구요. 그러나 그것뿐이 아니죠, 여러 가지 가지죠. 돈을 좀 달라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구가 돼서 휠체어를 타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요, 그냥 버젓이 좋은 일 하는 것처럼 하면서 남 보는데 이렇게, 그 마음이 말입니다. 그렇게 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쑥스러워 할까봐 몰래 그냥 넌지시 얼른 넣고 가는 사람이 있어요. 물건을 아주 비싼 값에 다 팔아주고 가기도 하구요. 또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육신이 불구인데도 불구하고 물건을 깎아서 사는 사람이 있죠. 그러니 얼마나 천차만별입니까? 그 마음들이. 그런 거를 생각할 때, 나무라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모르니깐 도둑질도 하고, 모르니까 어리석은 짓도 하고, 모르니깐 나쁜 짓도 하는 거지 마음이 못 돼서 그런 게 아닙니다. 모두가 몰라서 그러죠. 알게 될 때까지는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죄가 없다고 할 수밖엔 없습니다. 모두가 죄가 없는 겁니다. 죄가 붙을 자리가 없죠. 왜냐? 쉴 사이 없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는 반면에 컴퓨터에 입력이 되는 대로, 만약에 우리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거기다가 되 입력을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가르치는 게 그거죠. 주인공에서 나오는 모든 거, 일거수 일투족 나오는 거, 속에서 들끓어서 나오는 거, 바깥에서 치고 들어오는 액운, 모든 거를 주인공에다가 맡겨라. 그러면 앞서 입력이 없어지며 새 입력으로 들어가면서 새로 입력된 것이 현실로 나온다. 즉 말하자면 과거하고 현재하고 미래하고 통하는 통로는 그 자리밖엔 없다는 겁니다. 우주하고도 통하는 길이 그 자리밖에 없고, 모든 일체만물하고도 통하는 길은 거기밖엔 없어요.

그러니 나쁜 짓을 했으니깐 나쁜 줄로 알지만 가만히 지켜보면 매양 나쁜 것만은 아니죠. 자꾸 자꾸 마음을 내 준다면 선한 길로 접어들게끔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이끌어서 건져라’ 하는 거예요.

자식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문)가슴 답답할 때마다 삼배 올리는 신도입니다. 그토록 속을 썩이고 애를 먹이던 남편을 안보면 끝일 거라 등을 돌렸더니 남편보다 더한 스승이 있는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13세 된 제 아들 녀석은 책만 펴면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을 정도로 제 마음을 그렇게도 아프게 만들어 놓고서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야만 공부를 제대로 한답니다. 모습만 다를 뿐이지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그렇게 제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어떤 식으로 키워야 좋은 자식 인연되게 키울 수 있는지 스님의 크나크신 가르침 간곡히 바랍니다.

답)부인이라는 인연이고, 어머니라는 인연이니까요! 위에서도 회사 얘기를 했습니다만 어느 회사의 중역으로 있는 사람은 그런 소임을 맡고 있기 때문에 모든 직원을 다스려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죠? 또 보살님도 자식의 어머니요, 남편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 나름의 책임이 있는 겁니다. 어머니가 되기 전하고 어머니가 되고 나서는 다릅니다. 어머니가 됐기 때문에 자식들한테 사랑을 베풀고 더러운 것도 볼 수 있고 망난이 짓 하는 것도 볼 수 있는 거고 너그러움이 있는 거지, 만약에 어머니가 되기 전에 다른 집 자식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어버이가 돼서 자식들을 내 생명보다도 더 귀중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곤충에 이르기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부처의 마음이 모두 갖춰져 있느니라.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은 찰나찰나 나투면서 아니 되시는 게 없기 때문에 맑은 물에다가 비유를 하고 바다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 자식, 내 재산, 내 것만 아는 것은 개별적인 그릇의 얘기고, 부처님께서는 대천세계의 모든 생명들을 다 내가 될 수가 있고 내가 행할 수가 있고 나로 나투면서 이끌어 주시는, 말하자면 일체 보살이 다 이름이 각각 있는 보살이 다 될 수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일체 각계각층 중생들이 다 될 수가 있으니까 부처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어머니의 책임을 다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말로 행으로, 또는 무엇을 살 돈을 잘 주거나 옷을 잘 입히거나 잘 먹인다고 해서 부모가 제대로 사랑을 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사랑을 하는 것은 정신력을 길러주는 것이 진짜 사랑을 하는 거고, 자기 진짜 보배를 찾게 하는 것이 전 세계, 전 우주를 맡겨 주는 거나 다름없는 겁니다. 물질적인 재산을 아무리 많이 물려준다 해도 자기 진짜 보배를 알게 해주는 것보다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항상 이렇게 말을 하죠. 가정에서 부부지간에 사랑이 없고 어떠한 문제가 있거든 그대로 사랑하면서, 그대로 부드럽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부드럽게 하면서 다 맡기면 서로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남편이다 부인이다 하는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바로 거기까지 불이 들어오게 돼 있다. 그래서 망하게 하는 나쁜 습성을 고칠 수 있게끔 돼 있으니까 그렇게 하라, 또 자식도 육신을 잡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말로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잘해준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단 하나 그 업식을 녹여주면 스스로 밝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거를 주인공에 둘 아니게, 너와 나와 둘이 아니니 거기서 만이 부드럽게 행하고, 아주 정말 보배스런 인간으로서 자유인이 되게끔 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풍족한 사람이 되고, 모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고, 자비롭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 자리에서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뿌리를 싱싱하게 키워주고 보배를 찾게 해 주는 것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거기에는 거짓이 하나도 없어요. 계속 그렇게 해 보세요. 나가서 뭐 어떻게 하더라도 절대로 욕하거나 때리지 말고, 또 부부지간도 그렇고 다 그래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세요.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속에 들은 업보가 그러는 거니까, 의식들이 그러는 거니까 주인공! 뿌리는 나하고 둘이 아니니까 주인공만이 해결 할 수 있다고 믿고 맡기세요. 즉 말하자면 뿌리만이 싹을 푸르르게 살게 할 수 있다 이 소리죠. 그러니 그렇게 하면서 겉으로는 부드럽게 하는 겁니다. 진실로서 그렇게 해준다면 정말 고(苦)의 테두리에서 몰록 벗어날 겁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모두 착한 자식이 되고 화목을 가져오니 부부지간에도 더욱 사랑하게 되고, 가정의 질서를 문란치 않게 할 수 있고 아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것을 믿고 열심히 해보세요.

‘이뭣고’ 의심 꼭 내야 합니까

문)스님의 무애설법에 감사 드리며 가르침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헌데, 참선을 할 때 큰 신심, 큰 의정, 큰 분심이 있어야 하며 특히 이뭣고 하고 의심을 하라고 하는데 꼭 의심을 해야하는지요. 저는 그냥 지극히 내 마음을 관하기만 합니다.

답) 공부를 처음 시작했다면 그렇게 의정을 내는 거는 좀 힘들다고 할 수 있죠. 왜냐하면 처음부터 내가 ‘이뭣고’ 하고 의정을 내고 들어가잖아요. 근데 ‘이뭣고’를 줬을 때는 벌써 그걸 알고 줬단 말입니다. ‘이뭣고’ 하고 줬으면 이뭣고에다 모조리 다 그냥 놔버리는 거예요. 이게 과정입니다. 그런데 놓지를 못하고 전부 ‘이뭣고’ 하고 그냥 거죽에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되죠. ‘이뭣고’를 준 자체가 틀리다는 게 아닙니다. ‘이뭣고’도 놔버려야 돼요, 몰록. 의정을 따로 가질 게 뭐 있습니까. 이뭣고를 줬으면 의심말고 믿어라 이겁니다. ‘이뭣고’ 에다 그냥 내 몸이고 뭐고 전체를 다 놔 버리는 거예요. 몰록 그냥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그게 ‘하, 이렇게 희한하구나.’ 하게 되죠. 그렇지 않고는 안돼요. 이뭣고도 이름일 뿐인데요. 그런데 그것을 어느 스님이 주셨다는 것에 매달려 놓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된다면 그것이 방하착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릇되게끔 착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는 생각들에 젖어 가지고 아무리 말을 해줘도 ‘아이고, 그렇게 다 놓으라니 다 놓고 어떻게 삽니까’ 이러죠? 그래서 내가 그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걸어올 때 한 발 들고 한 발 놓고, 한 발 들고 한 발 놓고 이렇게 걸어오는데 그걸 짊어지고 다니느냐고 그랬어요. 우리가 지금 살림하는 게 그렇게 놓고 가는 겁니다, 그대로. 붙들고 가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마음으로 지어 가지고 온통 붙들고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그것대로 그냥 순응하지 못하고 매일 걸리는 거죠. 마음으로 지어서 창살 없는 감옥을 자기가 만들어 나오지 못하고 자유스럽지 못한 것뿐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 세월을 다 보내지 말고 그냥 바로 들어가세요. 너가 너를 끌고 다니니까, 너가 끌고 다니니 그대로 맡기고 그대로 지켜봐라. 못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고 잘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고, 안 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잘 굴림도 거기서 나오는 거 아니겠는가. 잘됐으면 감사하게 놓고 거기에다 맡겨라. 주인의 구멍은 그 한 구멍밖엔 없다. 그러니까 거기다 놓고 들고나면서 당신 끌고 다니는 거를 주인을 삼아서 꼭 그렇게 해서 나중에 스스로 깨우치면 자기 고삐도 없어지고 소도 없어지고 하듯이, 자기 주인이라는 이름조차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세상에 여러분이 육신을 가지고 나온 것이 공이자 색이고 색이자 공이니까, 그대로 그 공이 화두니라.’ 한 겁니다. 내 육신 나온 것이 화두이자 공이고, 공이자 화두이니까 지금 원형을 이루고 돌아가고 있다 이겁니다. 과거심도 현재심으로 돌아오고, 미래로는 아직 가지 않았으니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그대로, 내가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고정됨이 없이 공하였으니 공에서 나오는 것을 화두로 삼고 그대로 공에다 일임해서 맡겨 놔라.’ 이겁니다. 그러니 처음에 공부할 때는 모든 것을 근본에 맡겨놓고 오직 일심으로 믿고 들어갈 수 있어야 정신계의 50%와 물질계의 50%를 자기 자신이 자유스럽게 충당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의 뜻

문)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이게 보통 화두문자에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알기 쉽게 일러 주셨으면 합니다.

답)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뭘 먼 데서 찾습니까? 그대로 아닙니까? 한 사람이 스스로 열 가지 행을 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한 사람이 열 가지 행했다고 해도 줄지 않고, 만 가지 행을 한 것을 들여도 두드러지지 않죠. 우리 생활에 전체 들고나는 그 문은 하나이니까요. 문이라고 해서 이상스럽겠지만 말을 해야 하니 어쩌겠소?여자는 여자의 모습으로 나왔기 때문에 여자의 행을 해야 하고, 남자는 남자의 모습으로 나왔기 때문에 남자 행을 해야 하듯이 우리가 이 세상에 났으니 그게 바로 생활법이요, 그것이 참선이요, 그것이 행입니다. 하나로 들고 하나로 나고, 그게 그대로 행이에요. 여러분이 나오기 이전 그 자체도 바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겁니다, 지금. 예를 들어 콩 나무가 콩 씨를 찾는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말입니다. 콩 씨가 콩 나무로 화한 줄 모르고 콩 씨를 바깥에서 찾으니 찾을 수 있나.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대요. 콩 나무에 열린 콩 씨가 하는 소리가 “이놈아! 그 콩 씨는 여기에다 두고 바깥에서 찾으면 어쩌느냐?” 하니까 “어어! 콩 씨가 여기 있네.” 그러더라는 얘기예요, 콩 나무가. 여러분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겁니다. 굼벵이가 매미가 됐는데 매미는 자기가 전자에 굼벵이였었다는 걸 모르고 굼벵이는 매미가 됐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그게 한 꺼풀 한 교차로인데, 그 교차로를 통과를 시켜서 벗어나려고 우리는 그러는 거거든요. 그래서 물리를 틔우고 지혜를 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한마음에 들었다 한마음으로 내고 한마음에 들었다가 한마음으로 내는 거니까, 잘했든 못했든, 악이든 선이든 전부 그렇게 하는 거니까 자기 주인공 그 하나에서 모든 게 들고난다는 그 뜻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지수화풍과 오행설의 관계

문)스님, 저는 종교와 철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청년 법우입니다. 제가 질문 드리고자 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지수화풍 사대를 근간으로 해서 모든 것을 설명을 하고, 유교에서는 음양오행설을 통해서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어떤 것이 더 올바른 방법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지수화풍과 오행설의 관계를 어떻게 보시는지 가르침 바랍니다.

답) 눈이 가는 데 귀가 가고 귀가는 데 눈이 가는 것을, 이름만 각각인 걸 가지고 뭘 이거니 저거니 따집니까? 직접 마음으로 먹고 싶으면 바로 먹는 걸 얘기하는데 아니 말이 왜 거기 붙어 돌아가겠습니까? 나는 오행설이 옳으니 사대가 옳으니 하는 말담을 하려고 이러고 하는 게 아니에요. 말은 다 필요가 없어요. 수만 년을 한다 해도 말은 필요 없어요. 내가 이거 먹어라, 이거 먹어라 아무리 해도 갖다 먹지 못한다면 그 소리를 수백 번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아무 소리가 없었다 할지라도 내가 목마르면 그냥 갖다 먹는 것이 행이에요. 이 행을 못할지언대 아무리 여러 말이 있어도 필요 없다 이거예요. 내가 목마를 때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서 탁 마시듯이 그렇게 마실 때 아무 이론이 거기 붙지 않듯이, 그게 바로 묘법이에요. 사람이 자기 몸뚱이 속에 그 많은 의식들이 있는데 만약에 그것이 빈집이라면, 집 주인이 없다면 그 속에서 막,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키듯이 일으키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병이 드는 거예요. 영계성이라든가, 유전성이라든가 또는 세균성이라든가 이런 것도 집이 비었으니까 마음대로 들락거리거든요. 그런데 집 주인이 있다면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내 집주인부터 완전히 믿고 둘이 통해야, 하나가 되지, 하나가 됨으로써 또 바깥으로 둘 아닌 도리를 배우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마음의 도리를 배우세요. 이론을 떠나서 내면의 보배를 찾으세요. 내면으로만 찾고 들어갈 수 있다면 마음이 평화스러워지고 내가 나를 발견해서 자유인이 되고, 내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들을 한마음으로 리드하면서 화합을 가져오게 되고, 화합을 가져오게 되면 건강하게 되고 병이 나지 않고, 그 다음에 내가 이 도리를 배워서 모든 것을 화합하게 할 수 있다면 내 가정도 화합과 또는 우애와 조화를 이루게 되고, 또는 나 하나도 그렇지만 세계도 조화를 이룰 수가 있고 평화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겁니다. 더 나가서는 이 지구의 수명도 늘이고 줄일 수가 있게 되는 거고요. 태양과 모든 월세계, 모든 혹성들도 나 아님이 없이 그 우주의 태양, 광대한 은하계, 그렇게 무수하게 많은 그 별들을 바로 요 한 점의 생각, 한 점의 생각으로 다 쌀 수 있다면 이게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중세계에 나는 사람들은 부처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권리권을 가졌기 때문에, 권리 행세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무한의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 겁니다. 그 무한의 능력을 여러분이 쓰지 못해서 못 쓰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첫째, 자기의 그 깊숙이 있는 한 점의 자기를 찾았을 때에 비로소 마음의 금궤를 찾을 수 있고, 자석도 찾을 수 있고 또는 자가발전소가 설치된 걸 알 수 있는 겁니다. 이 자가발전소 또는 자석을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데 발견을 못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그 깊숙한 자기의 한 점을 찾기 위해 오직 힘을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불경보다 세상사 가깝게 보여

문)도를 닦아야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전부 스님들이나 도인 노릇을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 향유하고 있는 문화 생활도 알고 보면 다른 선각자들의 피눈물나는 땀과 지혜의 결실로 우리 후손들이 그 열매를 따먹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어 과거보다 오늘이 배고픔을 모르고 병환에 덜 시달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과학을 하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 의학을 하는 사람 등등으로 인하여 오늘의 인간사회는 더 발전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적인 발전이지 내적인 발전이냐 하고 반문하실 지 모르지만 절에 조용히 앉아 일체의 번민을 끊고 염불하시는 것도 중요하나 현실에 더 가까이 앉아 고통을 겪고 있는 장애인이나 불우한 이웃들의 냄새나는 대소변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내는 훌륭한 이웃들의 모습에서 진정 인간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 사회는 부처인척 하는 헛된 부처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씨를 지성껏 심는 농부의 얼굴이 부처요, 공장에서 땀을 흘리며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우리 아버지들의 진지한 얼굴이 부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중생들의 삶과 멀리 계시는 스님들의 이야기는 항상 어려운 법문, 중생들에게는 선문답같이 느껴집니다. 우리에겐 세상사 걱정하는 갑남을녀의 진솔한 이야기가 불경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요.

답) 지금 질문하신 분은 자신의 생각이 전체를 위하는 생각이고,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기에 옳다라고 생각을 하실 테지요.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이것이 올바르고 저것은 틀리다고 세우는 생각이 나와 남을 가르고 자신을 고정시킨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개별적인 하나의 생각으로 산다면, 항상 그렇게 생각이 되고 모든 것이 그렇게만 보이게 될 겁니다. 이 사람보다 저 사람이 낫다, 저것은 필요하고 이것은 필요치 않다, 이것은 좋은 일이고 저것은 그렇지 않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는 가는 길이 있고 오는 길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반반씩 있다는 겁니다. 가는 길과 오는 길 이 두 개가 한데 합쳐서 작용을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작용을 못하는 까닭에, 사람들이 오는 것만 알고 되돌아가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힘겹고 고정관념에 가려서 살게 됩니다. 물질계와 정신계가 한데 합쳐져서 작용을 해야 보이지 않는데 50%에서 보이는 데로 나오게끔 돼 있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빠졌어도 헤어나기가 힘들고 그냥 여지껏 물질 세계에서 살아 나온 관습, 인과, 업보, 유전 이런 걸로 꽉 뭉쳐서 돌아가니까 이게 부작용이 나고, 그렇기 때문에 전체가 같이 돌아가서 이루어질 수 있는 공덕이 하나도 없단 얘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남도 도와 주면서 서로 함께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벗어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벗어나게 해 줄 겁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 죽는 거를 가리지 않고 다 버린다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다고 말입니다. 두려울 것도 없고, 이거는 된다 저거는 안된다 할 것도 없고, 이거 되게 해주쇼, 잘살게 해주쇼 잘 먹게 해주쇼 이럴 것도 없을 거고요. 나는 여러 세월을 돌아다니면서 불쌍한 사람도 알게 됐고 갈기갈기 찢어진 사람도 알게 됐고 인생 살아나가는 게 다 이렇고 축생 살아나가는 게 다 이렇고, 모두가 죄가 있다면 한 가지 모르는 게 죄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죄를 져서 죄인이 아니라 자기에게 그 위대한 보배가 있다는 걸 모르는 게 죄구나 하는 걸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하기로 작정을 한 거죠. 그런데 그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알 수도 없어서 항상 껍데기의 노예가 돼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그러다가 벗어나지 못하게 돼서 또다시 또 구르고 또 구르고 그런다면 그 불쌍함을 다 어떡하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자신 먼저 밝히라고 했습니다. 꼭 스님이 됐다고 해서 구제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떠한 장사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가다 보면 은연중에 자기도 모르게 건지게 돼 있습니다. 길에 가고 오다가도 건지게 돼 있고요. 얼마나 멋진 줄 아십니까? 남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길에 다니다가 그런 모순된 일을 보게 될 때에, 길을 가다가도 도와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을 때 참다운 인간의 본능과 자비와 더불어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 그 기쁜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과 바꾸자고 해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한마음 주인공이다 하는 것도 이런 포괄적인 하나이지 개별적인 하나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같이 기쁨을 가지려 한다면 진정 알아야 되고, 진정 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길이 내 생활과 따로 떨어져서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변을 살리는 속에 부처로 가는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생활 불법이라고도 했고요.

그러니 내 안의 근본의 능력을 진실로 믿고, 내 한생각에 나와 남을 더불어 함께 밝힐 수 있다면 더욱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한계 지워진 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걸으려고 하지 마시고 한찰나에 뛰어 넘을 수 있는 이 마음의 도리를 배워서 소중한 마음씨를 일체중생을 위해서 회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