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사립학교는 고등학교의 절반, 대학교의 90%를 차지한다. 세계적으로 사립학교 비중이 높다는 미국이나 영국도 10%가 되지 않으며, 우리나라 다음으로 높은 일본도 20%가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가히 기형적이라 할 만하다. 우리나라 사학은 1948년 경 ‘농지개혁’ 때, 그리고 1990년 전후 사학 설립이 정부의 ‘허가’에서 일정 조건만 갖추면 관청의 허가 없이 설립할 수 있게 하는 소위 ‘준칙주의’로 사학법이 개악된 때 그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농지개혁을 피하기 위한 편법과 학교 운영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사학 난립을 부추긴 셈이다.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자는 데 왜 사학들이 맹렬히 반대하는지 이해할 것 같다. 간판은 ‘공익’을 내걸었지만, 속으로
대학의 기능은 교육과 연구이며, 자유롭고 창의적인 정신이야말로 대학의 근본 바탕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도 종교에 관한 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꽉 막힌 공간인 것은 다른 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종교계 사립대학에서 제도적으로 타종교인을 배제하는 대표적이 예는 채플과 종교과목의 강제, 특정종교인만의 교직원 임용 등이다. 종교지도자를 양성하는 특수학교라면 모를까, 일반종합대학에서 어떻게 학문의 자유와 교육의 수월성보다 특정종교의 선교가 더 중요시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대학채플은 기도, 찬송 등 기독교 예배의식으로 졸업 때까지 대개 4학기에서 8학기까지 1주일에 한 시간 정도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고, 단 한 학기라도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타종교
박광서(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2004년 대광고 강의석 군 사건의 본질은 종교 강요로 인한 인간의 행복추구권, 특히 종교의 자유라는 기본적인 인권을 심각히 침해하는 교육현장을 고발한 것으로, 수십 년 동안 시한폭탄 같이 잠재해 있었을 뿐 언제든 터질 것으로 예견된 사건이었다. 한 고등학생의 엄청난 희생에 의해 그동안 숨겨져 왔던 학교 내 종교인권이 사회 이슈화되기는 했지만, 자신의 직장과 신분까지 내던지면서까지 제자를 감싸 안고 보호하려 했던 스승이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생각되는 한 분을 잊을 수 없다. 바로 사건 당시의 대광고 교목실장 류상태 목사다. 류 목사는 개인의 이익보다 기독교와 사회 전체를 먼저 생각하는 양심적인 지성인이요, 용기 있는 실천가였다. 성실한 교사이자 성직자였던 그가
{image1} 내가 사는 뉴욕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다. 특히 맨하탄(Manhattan)은 어찌나 붐비든지 발 들여 놓을 틈도 없다. '맨하탄에 없으면 아무 데도 없다'는 이곳 속담처럼 '없는 것이 없는 곳'이 맨하탄이다. 많은 사람들이 맨하탄에서 일하고 맨하탄에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 맨하탄에 한번 이변이 생겼다. 일대 정전(停電)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불야성을 자랑하던 맨하탄에 전기가 나가자, 천지는 일시에 암흑으로 변했고, 맨하탄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어두운 밤이면 날뛰는 도깨비귀신 같은 범죄자들이 각종의 범죄를 자행했다. 범죄자들은 남의 눈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경찰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가 불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낮도깨비 같은 범죄자들은 자
학교 내 종교자유 문제는 교사나 학교장 개인의 종교성향도 문제지만, 그보다 종교 사립학교 내에서 제도화ㆍ관행화 된 강요나 차별이 폐해가 더 크고 고질적이란 점에서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인권문제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렇게 초법적으로 학교운영을 할 수 있게 된 배경이 기득권화ㆍ권력화 된 일부 종교계라는 점에서 국민적 관심이 새삼 요구되고 있다. 종교 사립학교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차별과 인권침해 행위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아 모르거나 간혹 문제가 불거져도 그저 교사나 학생 한 개인의 특수한 문제이겠거니 하며 남의 일처럼 생각해온 게 사실이다. 설사 일부 국민들이 경험했거나 알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다가 결국은 입시라는 중대사를 핑계 삼아 마음속으로 적당히 타
어린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부모와 같거나 그 이상의 존재다. 그런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종교적 차별대우는 학생들의 어린 시절을 어둡게 할 수 있기에 어른들이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자식을 학교에 맡기는 학부모들은 학교나 교사에 대해 웬만하면 문제 삼지 않는다. 아니, 문제 삼을 수 없다. 그것은 아이가 알게 모르게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서다. 선생님과 학생의 이러한 특수 관계 때문에 피해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은 말도 못하고 속앓이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후유증이 크고 오래 간다. 문제 발생 시 학생의 전학이나 교사의 전근은 모두 미봉책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그 아이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마음의 깊은 상처는 누가 치유해 줄 것인가. 기독교 국가도 아닌데 가
박광서(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교육현장에서의 종교 강요 및 차별 행위는 교사의 개인적인 행위와 학교 차원 또는 제도적 관행 두 가지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교사가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거나 타종교인 학생들을 차별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정신적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경우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애가 가져온 가정통신문에 성경 구절이 적혀 있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했다던 어느 불자의 얘기가 생각난다. 학부모로서 내심 당황했겠지만 그렇다고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고 해서 선교 의도가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받아보는 학부모의 종교가 타종교일 경우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려 깊은 교사
미래사회는 물질과 효용성보다 다양성, 행복 등 비물질적 가치가 중시되는 탈물질ㆍ감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들 한다. 또 다양한 진리가 공존하는 글로벌 문화시대에 여러 종교가 활성화되어 있는 한국사회는 그 나름대로 인류문화에 기여할 자격과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반갑고 일리 있는 얘기이다. 그러나 세계사상 유례없이 급성장한 기독교의 편협성과 배타성이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견해 또한 만만치 않다. 여러 종교들에 대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김용옥은 최근 한 교회에서의 설교 중 “기독교는 질시와 배타와 반목의 좁은 패거리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비판했다. ‘사랑’이란 간판을 내걸고 ‘미움’을 가르쳐 ‘패거리 문화’를 만드는 게 종교가 할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학연
2003년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슈뢰더 독일 총리는 정치적ㆍ종교적 중립이 상호 지켜져야 한다는 이른바 ‘세속주의(secularism)’에 충실하기 위해 공립학교와 직장에서 교사나 공무원들의 히잡(이슬람 여성의 머리 스카프) 착용을 금지하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2004년에는 영국 정부가 종교적 증오 유발행위를 금지하는 법률 제정을 추진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영국은 최대 7년 징역형까지 가할 수 있는 ‘인종 증오 유발 금지법’을 이미 1986년에 제정된 바 있는데, 이슬람권과 기독교권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국내외 상황을 고려할 때 다른 종교에 대한 적대 또는 차별행위의 금지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여 종교적 증오를 유발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확대 적용키로 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종교근본주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현대 과학사상의 영향력 확대에 대항하여 반동적으로 일어난 일종의 종교운동이다. 중세까지 종교는 정치ㆍ과학ㆍ철학ㆍ예술 등의 여러 분야와 미분화된 상태에서 그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갈릴레오(1564~1642), 뉴턴(1642~1727), 다윈(1809~1882)이 주도한 과학혁명을 거치는 동안 기독교 교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그 중 기독교에 가장 위협적이고 큰 타격을 준 것은 1859년 ‘종의 기원’이란 저서로 발표된 다윈의 ‘진화론’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기독교는 스스로의 권위를 다시 찾으려는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고, 1881년 프리스턴대학의 하지와 워필드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교리를 고수해야 한다는
수년 전 한 결혼정보회사가 미혼 남녀들을 대상으로 ‘연인간의 종교 갈등’을 묻는 설문 조사를 실시, 연인 10명 중 4명 꼴로 종교 갈등을 경험했고 이중 절반 이상이 종교 문제로 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특이할 점은 종교 갈등이 주로 불교와 기독교 사이(47%)에서 있었다는 점이다. 불자로서 우리 사회의 종교간 불화에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예일대를 졸업하고 숭산 스님을 만나 한국선불교를 접한 후 승려가 된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 현각 스님이 지하철에서 눈을 감고 있을 때 기독교인이 다가와 “예수 믿으세요, 부처는 사탄입니다. 왜 기독교나라에서 온 당신이 머리를 깎고 마귀의 종교를 믿습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현각 스님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
무엇을 가족이라 말하는가? 선남자가 집에 살면서 즐거울 때 같이 즐거워하고, 괴로울 때 같이 괴로워하며, 일을 할 때에는 뜻을 모아 같이하는 것을 가족이라 말하느니라. 정해년 설날, 가족과 함께 건강하게 보내셨습니까? 먼 길 마다않고 달려온 친지들과 풍성한 명절 음식을 앞에 두고 즐거운 시간 가지셨겠지요. 하지만 이른바 ‘명절증후군’이라 부르는 후유증도 만만치는 않을 것입니다. 한 포털사이트 통계에 따르면 주부들에게 명절은 이제 육체와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날’로 꼽힐 정도라고 합니다. 명절 음식과 손님 치르기 등 끝없이 이어지는 가사노동 때문입니다. ‘명절증후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장시간 운전에 지친 남편이나 학업ㆍ취업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는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새 남쪽에서는 봄소식이 들려온다. 새해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달이 지난 것이다. 3월. 소생과 약동으로 상징되는 3월을 맞는 불교계도 분주하다. 각 종단이 올 한 해룰 어느 해 보다 보람 있게 장식하기 위한 사업들을 본격 추진하기 때문이다. 지난 두 달 사이 각 종단 수장들은 기자회견이나 간담회를 통해 올 한해 종단 운영의 기조를 밝혔다. 조계종은 ‘수행과 전법’을 대전제로 △종풍진작과 수행승가 진흥 △대중원융살림 회복 △전법과 복지 진흥 △사회와 인류를 위해 봉사 하는 수행 종가 등의 4대 l전을 제시했다. 그에 따른 구체적인 사업은 20대 핵심과제로 정리해 발표했다. 이에 앞서 천태종도 수행풍토 확립과 환경 및 민족 화해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천태종은
사찰생태연구소에서는 지난 2002년부터 우리나라 108개 주요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자연환경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그동안 돌아보고 느낀 점은 사찰의 고유한 생태경관(生態景觀)이 크게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관은 ‘경치’와는 다르다. 경관은 단순한 시각적 풍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관(landscape)이라고 하면 생태적인 가치가 들어 있다. 즉, 자연생태가 살아있어야 비로소 경관이라 말할 수 있다. 나무와 숲과 계곡 등 생태적 요소가 훼손되거나 변질되면 경관이 망가져서 더욱 낯설어 진다. 사찰은 전통적으로 산중 숲속에 자리하고 있어서 절로 가는 길은 어디나 숲길이었다. 그 숲길은 번잡(煩雜)의 세계에서 명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길이요, 세간(世間)에서 출세간(出世間)으로 가는 길이다.
한국에도 이제 해양심층수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 일본 노르웨이 등 오래전부터 해양심층수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로부터 심층수 생수를 비롯하여 수많은 제품들을 수입, 고가로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늦은 감 있으나 한국도 동해 권을 중심으로 해양심층수에 대한 연구와 활용이 막 걸음마를 떼고 있다. 해양심층수라면 적어도 바다 아래 몇 백m 깊은 계곡을 흘러 다니는 물로, 우선 오염돼있지 않고 표층수에서 얻을 수 없는 영양가가 많이 포함돼 있으며 표층수에 비해 온도가 아주 낮다. 태고 적부터 남북극의 빙하에서 녹아나온 차가운 물이 그 무게 때문에 바다 밑으로 갈아 앉아 바다 밑 깊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것인데, 그 물길이 지구를 한바퀴 돌면
{image1}_c ‘비유품’에 보면 장자와 세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노는데 정신이 팔려 불타고 있는 집 안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는 세 아들에게 장자는 이와 같이 소리쳤다고 한다. ‘너희가 좋아하고 가지고 싶어 하던 희유한 장난감이 여기 있는데, 너희가 지금 와서 가지지 아니하면 반드시 후회하리라. 저렇게 좋은 양이 끄는 수레(羊車), 사슴이 끄는 수레(鹿車), 소가 끄는 수레(牛車)가 지금 대문 밖에 있으니, 타고 놀기가 좋으니라. 너희는 이 불타는 집에서 빨리 나오너라. 달라는 대로 너희에게 주마.’ 이 말을 들은 세 아들들은 아버지가 말하는 장난감이 마음에 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서로 밀치고 앞을 다투어 불타는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러자 장자는 여러 아들들이 무사히 나왔음에 기뻐하며
{image1}_c‘우리는 모두 예약자’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그 기차는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그 기차는 여느 열차와 다른 특징이 하나 있다. 승차 순번은 있지만 도착 순번이 없다는 것이다. 먼저 탔다고 해서 꼭 먼저 도착하는 것도 아니고, 늦게 탔다고 해서 나중에 도착하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언제 자신이 탄 기차가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할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종착역에 도착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종착역에 도착하자마자 저승사자에 의해 끌려 내려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죽음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으며, 아무도 신청하지 않았지만 예약된 죽음을 향해 달
{image1}_c살아있다는 것은 흔들림의 연속인 것 같다. 많은 것들을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튼튼한 뿌리를 얻는다. 지난 한해도 그러했다. 늘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받아들이는 것, 의연함을 배우는 것이 삶이라고. 또다시 새해를 맞이한다. 새로운 것은 늘 설레임과 함께 막연한 불안도 동반한다. 지난한해 불교계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어떤 때는 간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떠나갔고 그리고 서서히 잊혀졌다. 그 자리는 다시 새로운 인연들로 채워졌다. 이웃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왜 우리는 떠나가는 사람에 대해 안타까워하지 않고 간절히 붙잡지도 않는 것일까. 누구의 잘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이런 불교계의 현실이 나는 참
“세상의 온갖 경전과 소(疏) 논(論)을 다 통달하면, 이 때문에 깨달을 때에 부처님의 지혜를 얻어 다시는 미혹하지 않게 된다. 이런 지혜를 무애지(無碍智)라 한다.” ‘책 안 읽는 한국인’은 이제 수년째 되풀이되는 ‘해묵은 한탄’이 되고 있다. 미디어캠퍼스의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1명은 전공서적과 잡지를 제외하고는 한 해 동안 단 1권의 책도 읽지 않았고, 한 달에 한 권 이상을 읽는다는 비율도 35%를 넘지 않았다.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독서실태도 나을 것이 없다.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9명은 하루 책 읽는 시간이 10분도 되지 않았고, 문화관광부와 한국출판연구소가 1993년부터 10년간 조사한 ‘국민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중 23.7%가 한해 단
‘열심히 공부하면 신랑얼굴이 바뀐다.’ 어떤 TV광고에 한 학교의 급훈으로 이런 내용이 떴다. 아울러 지독히 못생긴 신랑과 결혼하게 되는 꿈을 꾼 여학생이 기겁을 해서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에게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라고 채근하는 것보다 동기부여라는 측면에서 무척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된다. 이 광고를 보면 남자들만 예쁜 여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도 잘난 남자를 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멋진 남자와 예쁜 여자가 환영받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기야 예뻐 보여서 손해 볼 건 없다. 얼마 전 자동차가 고장 난 것처럼 길가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차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반응실험을 본 적이 있다. 옷 잘 입고 예쁜 여자와 대충 헐렁한 옷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