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년전만 해도 오래된 절에 가면 어김없이 좋은 샘이 있어 절마다 독특한 물맛을 볼 수 있었다. 샘물은 부처님께 올리는 청정수로 쓰였고, 스님들이 차를 우려내는 찻물로 쓰였으며, 음식물을 장만하기 위한 식수로 쓰였다. 절터가 좋다는 말은 장풍득수(藏風得水)하기 바람직하다는 뜻이니, 물이 좋고 풍부하지 않은 곳은 애당초 좋은 터가 될 수 없었다. 풍수지리서를 보면, 좋은 물과 좋지 않은 물이 있다 하지만 산사에서 만나는 물은 절에 사는 모든 이들과 절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득이 되는 것이지 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샘물이 좋은 절은 이름도 특이하다. 옥천사, 정수사, 감로사, 약천사 등 절 이름만 들어도 그 절의 물맛이나 물의 성분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
절 마당 부처님 만나는 준비공간 마음 정돈에 쇄석 바닥 등 장애 이른 아침 비질을 하여 곱게 정리되어있는 절 마당의 정갈함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티끌 하나 없이 쓸어낸 마당은 청아한 스님들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사찰에서는 평정고산수정원을 구성하는 왕모래를 갈퀴로 긁어 일정 간격의 파도문양을 만드는 것을 수행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갈퀴로 정리하여 단정해진 문양을 바라보면서 일본인들은 파도가 찰랑거리는 내해의 경관을 떠올린다고 한다. 교토의 료안지(용안사) 방장 툇마루에 앉아서 지긋이 정원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모습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자연을 관조하는 방식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사찰의 고산수정원을
어릴 적 어머니 손잡고 절에 가면서 걸었던 산길에 대한 추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른 새벽 산길에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산새들의 노래 소리가 즐거웠고, 바람소리, 물소리가 정겨웠다. 인적 없는 조붓한 길가에는 참나리꽃, 도라지꽃 같은 여름 꽃이 피어나고 나무에도 향내 그윽한 꽃들이 만발하여 우리를 반겨주었다. 오래 걸어서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산길은 비록 투박하기는 해도 나름대로 멋이 있었다. 돌이 튀어 나오고 나무뿌리가 드러나 걷기에는 불편했지만 발바닥으로 느끼는 감촉만큼은 그럴 수 없이 좋았다. 요즘은 깊은 산에 자리 잡은 절 주변에서도 예전에 걸었던 멋스러운 산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히고 포장을 한 진입로는 예외로 치더라도 조금만 경사가 급하고 험하다고 생각이
불구에 새겨진 시주자 이름 무주상 보시 제대로 알자 보시의 본뜻은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널리 베푼다’라는 의미이나, 일반적으로는 사찰에서 행하는 불사에 신도들이 재물을 내놓는 일로 이해한다. 부처님께서는 보시의 기본 조건으로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을 가르치셨다. 보상을 바라면 그것은 이미 보시를 행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오염되어 본래 의미가 퇴색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속인들에게 있어서 보시는 자신의 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원인으로 전락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단지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낸 보시가 다른 이들에게 아상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전락된 것은 절대적으로 피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불교사
사하촌(寺下村)은 절 아랫동네를 일컫는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절 가까운 곳에 사하촌이 형성되어 사찰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도하고, 스님들의 수행이나 생활 그리고 신도들의 신앙활동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사하촌 기능은 변질되어 사찰과 무관한 술집이나 음식점, 혹은 놀이시설들이 자리 잡게 되면서 사찰의 청정환경을 헤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사찰에 가게 되면 길 양쪽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유흥음식점을 당연한 듯 생각하게 되었으며,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모습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나마 ‘문화재보호법’이나 ‘자연공원법’ 그리고 ‘전통사찰의 보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해서 사찰주변에 대한 정화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결과 어느 정도 옛 모습을 찾기는 하
절 입구에 ‘하마비’ 세운뜻 알자 사찰 환경 해치는 ‘나만 편하자’ 산사 가는 길 한쪽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진 경우를 간혹 본다. 하마비는 말에서 내려야 함을 알리는 작은 석비(石碑)인데, 선암사나 송광사 가는 길에는 오래 전에 세워진 하마비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절가는 길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으면 아무리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도 말에서 내려서 걸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하마비는 주로 조선시대에 만든 것으로 궁궐, 종묘, 왕릉 같은 왕실관련공간이나 서원이나 향교와 같은 유교공간의 초입에 세워져있다. 사찰에 세워진 하마비는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삼보를 모신 사찰에 출입할 때는 예를 갖추라는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더불어 조선시대에
등은 불을 밝히는데 쓰는 기구이다. 불교에서는 등을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상징하는 징표로 생각하여 광명대라고 하였으며, 부처님의 진리가 불빛에 드러나도록 하여 중생을 깨우치는 공양구로 생각하였다. 예로부터 불가에서는 등공양이야말로 복전을 일구는 최고의 공양으로 생각하였으며, 좋은 날에 연등행사를 함으로써 부처님이 증득하신 진리의 세계를 찬양하기도 하고 원등(願燈)을 세워 소원성취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탑을 세우고 부처님을 전각에 모실 때 항상 등을 같이 세워 탑과 불상을 환히 비추도록 하였다. 어두울 때에도 부처님의 진리를 밝혀 불자들에게 항상 부처님의 깨달음을 생생히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어두운 밤에 스님들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짐승의 위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기능적인 측
부도형식 신도 영탑원 유행 화장 의미·부도 상징성 훼손 불교의 장법은 전통적으로 화장이다. 부처님 입멸 후 불교교단에서는 화장을 기본적인 장법으로 받아들였으며,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불교도입 이후 성속을 막론하고 화장을 일반적인 장법으로 생각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가적 차원에서 유교의 예법을 기준으로 삼게 되면서 장법 역시 매장이 우선시되는 풍조를 보이게 되었으며, 불자들 역시 화장보다는 매장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그러나 묘지로 인해서 발생되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노출되면서 화장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제는 오히려 매장보다는 화장이 일반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스투파나 파고다 같은 사리탑이 불교의 상징이었듯이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부도 역시
일정한 틀에서 찍어낸 불상 신심·예술성 찾아 볼 수 없어 불상은 간다라와 마투라 두 곳에서 그 형태적 기원을 보이지만 어느 것이나 깨달은 이가 가져야 할 초자연적인 모습과 모든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애로운 스승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불교조각적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형태적 특성은 32개의 특징(相)과 80개의 작은 특징(好)으로 설명된다. 불상은 스투파와 더불어 불교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작용하였으며, 불교가 전파되는 지역의 문화에 따라 형식적 진화과정을 거치게 된다. 불상이 만들어지면서 사찰은 형식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보인다. 그것은 스투파가 중심이 되던 공간의 구조가 부처님을 모신 불전으로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A사찰에서 볼 수 있는 진입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