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인불자연합회(회장 이기흥)가 1월 18일 태릉선수촌 법당에서 임진년 신년하례법회를 봉행하고 ‘2012 런던올림픽’선전을 기원했다. 행사에는 조계종 포교원장 지원 스님, 태릉선수촌 법당 주지 퇴휴 스님, 이기흥 체육인불자연합회회장, 불자국가대표선수와 지도자 등 200여 사부대중이 참석했다. 이날 포교원장 지원 스님은 선수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도전정신을 갖고 남은 올림픽 기간을 잘 마무리 하라”고 당부했다. 한편 이날 법회에서는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하며 합장주를 선물했으며, 태릉선촌 법당 지도법사를 위촉했다. ?
1879년(고종 16) 어느 날. 스님은 문득 스승이 생각났다. 출가한 지 25년만이었다. 스승이 보고 싶어진 스님은 이튿날 바로 길을 나선다. 하지만 길을 나선지 며칠 되지 않아 스님은 발길을 돌려 돌아온다. 절은 동학사. 스님의 이름은 경허(鏡虛;1849~1912)다. 계룡산. 눈이 왔었다. 하얀 숲이 햇살 아래 고요하다. 까치 한 마리가 산을 내려온다. 까치 울음소리가 산을 덮는다. 울음소리가 사리지고 산은 다시 고요해졌다. 산이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고요’가 아닐까. 모든 언어가 산 앞에서는 ‘고요’가 된다. 그리고 그 고요의 점정(點睛)은 ‘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계룡산 기슭에도 고요하게 절이 하나 있다. 동학사. 동학사는 724년(신라 성덕왕 23)에 상원 스님이 조
동학사 승가대학(학장 법성)과 화엄승가대학원은 1월 9일 동학사 강설전에서 49회 졸업식을 봉행했다. 모두 23명의 학인이 배출된 이날 졸업식에는 마곡사 주지 원혜 스님, 동학사 주지 견성 스님, 승가대학장 법성 스님, 동문회장 성본 스님 등이 참석해 졸업을 축하했다.승가대학장 법성스님은 훈화에서 “게으른 천재보다 부지런한 둔재가 사회에 더 필요하다”며 끊임없이 정진하라고 당부했다. 식을 마치고 더 많은 공부를 위해 산문을 나서는 졸업생들을 동학사 대중이 기쁨 반 아쉬움 반으로 보내고 있다. ?
1월 2일 입적한 지관 스님은 유훈에서도 의 완간을 당부할 정도로 많은 애정을 나타냈다. 스님은 유훈을 통해 “속가와 불가에 대해 부끄러울 뿐 미련은 없다. 다만 가산불교대사림이 지금까지 12권이 출간됐고 아직 남은 8,9권을 정리해 부처님께 고하고 죽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다”고 밝혔다. 스님은 1983년 편찬을 발원하고 경국사에서 부처님께 삼천배를 올렸다. 사진은 경국사에 마련된 가산불교대장경 석판을 바라보고 있는 지관 스님. ?
고요 속으로 떠난다. 의심할 수 없는 고요 속으로. 벗어놓은 몸이 그 동안의 이름과 기억을 태운다. 이름 몇 자와 한나절만에 다 타버린 기억. 고요 속으로 떠나는 이는 그게 다였다고 말한다. ? 이별이다. 나는 나의 길이 있고, 너는 너의 길이 있어서 오늘 이 순간이 슬프고,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기에 남아 있는 날들은 안타깝다. 눈물로 읽어 내린 조사(弔辭)도 밤새 촛불 밑에서 쓴 만장도 모두 남아있는 우리를 위한 것일 뿐. 고요 속으로 떠난 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누군가 또 고요 속으로 떠났다. 밤하늘엔 달이 하나. 무슨 뜻일까. 달빛 아래 숲이 하나. 무슨 뜻일까. 그는 이제 알았으리. 고요 속에서. ?
2012년 새해가 밝았다. 늘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새해 첫 햇살에는 희망의 기운이 넘친다. 민중의 서원이 깃든 야외 법당 경주 남산에도 첫 햇살이 드리운다. 신선암마애보살유희좌상(보물 199호)이 그 햇살에 눈을 뜬다. 천년을 넘게 한 곳에서 바라본 햇살도 오늘은 새롭다. 중생의 목소리가 들여온다. 희망이 넘치는 한 해가 되어주기를…. ?
대한불자가수회(회장 나운하)가 12월 20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창립21주년법회 및 축하공연을 개최했다. 행사에는 국제불교지도자협회장 목탁 스님, 흥천사 조실 동봉 스님을 비롯한 사부대중 200여 명이 함께 자리했다. 나운하 대한불자가수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음성포교의 선두주자가 돼 그늘지고 소외된 곳, 젊은 층 포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나운하 회장은 ▷불자가수회 글로벌 진출 ▷산사음악회 이론화 ▷원로불자가수 노후복지시설 설립 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날 불자가수회는 백련암 주지 불동 스님, 박현진 대한불자가수회 후원회 고문, 배영희 일붕신문사 편집국장, 최윤희 BBS불교방송 PD 등에 감사패를 전달했으며, 코미디언 남보원 씨를 불자가수회 홍보대
“네가 인연 지을 곳은 250만 리 떨어진 해동이다. 그곳의 남쪽 지방에 명당이 있다. 그곳에 절을 짓고 중생을 제도하여 그곳이 불국토가 되도록 하여라.” 인도 수다라국 왕의 아들 안락국은 머나먼 고행 길에 오른다. 그리고 신라 땅에 절을 세운다. 경주 함월산 기슭이다. ‘달을 머금고 사는’ 산, 함월산(含月山). 그 능선 위로 파랗게 벼려진 겨울하늘이 떠있고, 그 쌀쌀한 하늘 끝에는 하얀 낮달이 걸렸다. 초승달이다. 밤새 그 작은 몸은 끝도 없는 어둠을 읽었고, 이제 하얀 낮달이 되어 현판처럼 걸려있다.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기림사다. 기림사는 643년(선덕여왕 12) 인도에서 온 광유 스님의 제자 안락국이 세웠다. 그 때는 임정사(林井寺)였다. 그 후에 원효(元曉 ; 617~68
겨울 숲을 종종거리던 다람쥐가 잠시 허리를 편다. 숲은 다비를 치렀다. 마른 나뭇가지와 잎들이 다비장의 사리처럼 흙 위에서 식어간다. 숲에 사는 모든 것들이 사리 수습에 나섰다. 사리 한 과 찾았을까. 온 세상을 뒤져 도토리 한 톨 입에 문 다람쥐가 돌담 너머에 있는 법당을 바라본다. 관세음보살. 산문을 나와 겨울 숲을 걷는다. 겨울 숲엔 한 철 주고받은 숲의 법어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무와 산새가, 꽃과 나비가, 바람과 구름이, 달빛과 풀벌레들, 이슬과 아침이, 천년과 천년이 주고받은 숲의 언어가 고스란히 있었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자연의 언어. 지금처럼 계속 산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 말씀도 지금처럼 산다면 영원히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노을이 발
조계종(총무원장 자승)이 12월 16일 조계사에서 성탄트리를 점등했다. 일주문에 세워진 세 개의 성탄트리는 불교의 참 가지인 생명, 나눔, 평화를 실천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점등식에는 총무원장 자승 스님, 조계사 주지 토진 스님, 조계종 사회부장 혜경 스님과 가톨릭 이정주 신부를 비롯해 대구 대전 부산 등 각 지역 가톨릭 부제 40여 명이 참가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15일 성탄 축하 메시지를 발표하고 “세상의 모든 빛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며 “자기 안의 빛을 바로 보고 그 빛을 더욱 밝혀 그늘진 이웃을 살피자”고 말했다. ?
연등회보존위원회는 12월 8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불교지화장엄전승회 창립총회를 열고 초대 회장에 정명 스님을 추대한데 이어 1층 로비에서 ‘종이로 피어나다, 전승전통등 및 불교지화 展’을 개막했다. 지화전 개막식에서 조계종 총무부장 영담 스님과 종단 관계자들이 출품된 김태연 대구대 교수의 작품 ‘운화(雲花)’를 비롯해 동해 삼화사 수륙재 장엄으로 쓰인 지화 모란 부채난등 등을 보고 있다. 전시는 22일까지 계속된다. ?
‘이렇듯 3, 4년이 지나니 천운이 순환하여 흥진비래(興盡悲來)에 고진감래(苦盡甘來)라, 부운이(浮雲)점점 걷힘에 태양이 다시 밝아오니, 성총(聖聰)의 깨달음이 계시어 민후의 억울하심을 알고, 장빈의 요음간악함을 깨치시어 의심이 가득하시니 대하시는 기색이 전과 다르시고 서인(西人)들이 후의 삼촌 숙질을 다 처벌하시라고 날마다 아뢰기를 수년에 이르렀으되 상감께서 마침내 불윤(不允)하시니 이러므로 민씨 일문이 보존되었던 것이었다.’ 중에서. 모든 것을 알고 난 숙종은 후회했다. 길은 하나였고 멀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먼 길’이란 있을 수 없었고, 다른 길도 역시 있을 수 없었다. 그 먼 길 끝에 가엾은 여인 인현왕후가 있었다. 후회스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숙종은 그 먼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와 티벳하우스코리아가 티베트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소신공양한 스님들을 기리는 추모제를 12월 1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마련했다. 티베트에서는 현재까지 13명의 스님들이 소신을 단행했다. 이번 추모제는 마하이주민지원단체협의회가 주관하고 조계종과 조계사, BTN 후원으로 진행됐다. 추모식 후에는 참가자들이 함께 조계사 경내에서 촛불 기도를 올렸다. 지관 스님은 호소문을 통해 “티베트인들에 대한 중국의 무력행위 중단을 촉구한다. 중국이 ‘공생공존, 자유와 평화’의 미래를 열어갈 것을 호소한다. 하루 빨리 티베트의 평화가 오길 부처님 전에 기도 한다”고 말했다. ?
아침 출근길이었다. 가로수에서 떨어진 노란 낙엽이 날아와 가슴에 부딪혔다. 낙엽도 나도 몰랐던 일. 누가 알았을까. 그 순간을. 나는 나의 자리에서 밤을 보냈고, 낙엽은 밤새 달그림자를 섰다. 그리고 낙엽 한 잎이 물음이 되어 떨어진 아침. 반야심경도 없고 법당도 없는 그 아침에 나는 낙엽 한 잎에 매달려 출근을 했다. 오랜만이었다. 멀리서 걸려온 도반의 전화에선 겨울비가 내렸다. 도반도 나도 몰랐던 일. 누가 알았을까. 그 순간을. 비는 그렇게 멀리서 내렸고, 도반이 전해준 빗소리는 온종일 가슴을 적셨다. 그리고 젖고 젖은 가슴이 끝내는 말을 했다. 보고 싶다고. 비도 오지 않는 저녁. 나는 먼 빗소리에 젖어 퇴근을 했다. 어디선가 낙엽은 지고, 어디선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은 11월 24일 해인총림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원로의원 인환 정관 월탄 암도 스님, 덕숭총림 방장 설정 스님, 원로의원 종하 근일 스님 등 스님 7명에게 대종사 법계를 품서했다. 2004년과 2008년 대종사 법계 품서에 이어 세번째로 열린 이번 법계 품서식을 통해 대종사는 총 35명이다. 설정 스님과 종하 스님이 이날 받은 대종사 가사를 정대하고 있다. ?
꼬불꼬불 고갯길이 힘겨워질 때 쯤 일주문이 나타났다. 들판의 벼를 베어내듯 날 선 바람이 숲에 걸린 마른 잎들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깊은 겨울에 오고 싶었던 절, 불영사. 꼬박 이틀 쯤 내린 흰 눈이 도량을 덮고, 그 그림자 비친 은빛 연못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풍경을 볼 수 없다. 바라는 인연은 늘 쉽지 않다. 서쪽 산마루에서 부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법회를 열고 있다. 바위 모양이 영락없다. 불영사는 651년(진덕여왕 5)에 의상 스님이 창건했다. 후에 의상 스님이 다시 돌아와 9년 쯤 살았다. 원효 스님도 여러 해를 함께 살았다고 한다. 여러 차례 중수와 중건을 거쳤고, 임진왜란 때는 영산전만 남기고 도량이 모두 소실됐다. 1701년(숙종 27)에 진성 스님이 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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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마음음악제 한마음선원(주지 혜원)이 11월 12~1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한 ‘한마음음악제’가 1만여 청중에게 큰 법열을 전하고 성료됐다. 1300명이 무대에 오른 이번 행사의 수익금 전액은 소외계층 지원에 쓰인다. 한마음선원장 대행 스님은 12일 첫 공연 후 리셉션에서 “공생 실천이 절실한 때에 그 뜻을 음악으로 전하니 그 울림이 더욱 감동적이었다”며 출연진과 관계자, 동참대중에게 “힘 모아 소원성취 하십시요”라고 축원의 박수를 보냈다. 12일 첫 공연에는 조계종 호계원장 법등 스님, 포교원장 지원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법산 스님, 불교인권위원장
안개가 숲을 깨운다. 잠들었던 나무와 풀들이 눈을 뜨고, 어둠에서 잠을 깬 산새는 지붕 위에서 아침을 기다린다. 새벽종이 닦아놓은 마당으로 아득하고 아득했던 태양이 다가온다. 산사에서 잠을 깬 어느 날 아침. 빈손의 아침은 영화로웠던 어제보다 컸고,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지붕 위의 산새가 곁에 없는 도반보다 가까웠다. 먼 길을 왔어도 다시 가야 할 길이 있고, 백팔 번 절을 하고도 부처님을 볼 수 없었던 그 아침. 그렇게 산사에서 맞은 아침은 어쩌다 꾼 꿈같았다. 아침, 눈을 뜨고 일어나야 하는 시간. 삶을 이어가야 하는 소중한 순간이다. 안개 속의 나무와 풀도, 지붕 위의 산새도, 멀리 있는 도반도, 모두 아침을 맞았다. 외면할 수 없는 삶, 그 속에서 또 한 번 피할 수 없는 시간, 아침. 산사의
절은 깊은 곳에 있지 않았다. 길옆에 있었다. 노랗게 익은 은행잎이 소리 없이 쌓이고, 문밖 들판에서는 갈대숲이 일렁인다. 듬성듬성 끊어진 돌담을 대나무로 깁고, 마당 한 편엔 미륵불을 모셨다. 사천왕문을 들어서자 백구 한 마리가 짖는다. 흥복사다. 흥복사는 650년(백제 의자왕 10)에 고구려에서 백제로 망명한 보덕 스님이 창건했다. 그 때의 이름은 승가사(僧伽寺)였다. 1597년(조선 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어진 절을 1652년(인조 3)에 흥복거사가 중창하고 흥복사라 했다. 1965년에 전강(田岡 ; 1898~1975) 스님을 모셔와 선원을 개설하고, 1965년 도영 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어느 날, 통영의 미래사에서 효봉(曉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