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학교 앞에서 어린애를 안고 앉아 동냥하는 젊은 아주머니가 있었다. 두어 살 쯤 되어 보이는 아기는 늘 엄마 젖을 만지작거리며 안겨 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머리 위까지 강보에 싸인 채 안겨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아주머니는 사라졌다. 그 후 흉흉한 소문이 교실에 떠돌았다. 동냥 수입이 줄어들까봐 이미 죽은 아기를 열흘이 넘도록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지 아주머니는 ‘시체’를 부당하게 대우하고, 악용한 것일까? 간단치 않은 도덕적·법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다. 다 돈 때문이다. 돈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돈은 눈도 귀도 없지만, 그래서 무색무취하며 추상적이고 익명적이지만, 교환에 있어서만은 너무나 교활하다. 그래서 마르크스(Marx)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고, 셰익스피어는 아테네 신사들
한국 불교는 주로 지혜의 측면에 치우쳐 있어 자비의 실천이 실종되어 있다는 비판이 오래 계속되어 왔다. 불교의 사회화,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등은 이런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불교의 치우친 양상을 바로잡아가려는 하나의 큰 흐름 위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런 흐름이 커지고, 여러 가닥으로 구체화되는 그런 반가운 현상들이 이곳 저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가장 큰 예가 요즈음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나눔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승려의 노후복지기금 마련을 위한 ‘자비의 보험금 나눔운동’을 비롯하여 외국인 노동자, 소년소녀가장 돕기 나눔운동을 올해의 중요한 사업으로 제시하였다. 현대불교에서도 ‘나누면 모두가 행복합니다’라는 구호 아래 ‘나눔의 손잡기 운
계룡산 무상사 국제선원의 한 신도로부터 2월 19일 제보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인 즉, 무상사 대웅전 건립을 둘러싸고 공금횡령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신도는 “무상사 측이 공사 도급자 A씨와 8억9천5백만원에 공사계약을 하고 공사대금을 지불했는데, 공사관리를 책임졌던 무상사 이사 B씨가 1억6천만원을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공사에 참여했던 6개 하청업체들은 공사대금 중 5천4백만원을 받지 못해 반발하고 있고, 신도들도 상당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청업체 관계자인 C씨는 “이같은 얘기는 모두 사실이며, 이사회에 몇 차례 진정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사회가 조직적으로 B씨를 감싸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횡령의혹을 받고 있는 B씨는 사실여부를 확인하
“…(보살은) 모든 국토 가운데 지옥과 같은 곳이 있으면 애오라지 그곳에 가서 그 고뇌를 없애서 교화하고, 축생처럼 서로 잡아먹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나서 그들을 이익되게 한다.…” 한국 사회에서 ‘성격좋은 사람’ 소리를 들으려면 오관을 닫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관용도’를 최대치로 늘리는 수밖에 없다. 예컨대 전직 대통령 아들의 괴자금에 대해서는, ‘다행이야, 명색이 전직 대통령인데 29만원이 뭐야. 몇백억은 쌓아두고 살아야지’ 하고 생각하자. 이승연 누드 사건은 ‘용케도 육신의 무상(無常)함은 제대로 알았어. 그래도 보여줄 만한 몸일 때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하고 봐 주자. 내친김에 ‘차떼기’로 불리는 정치인과 기업의 검은거래에 대해서도 국세청의 수고를 덜 기 위한 ‘소득재분배’
“나는 12년 동안 여인의 모습을 찾았지만 끝내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비유컨대 마술사가 환상으로 여자의 몸을 만든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어찌하여 여자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가?’ 하고 묻는다면, 옳은 질문이겠습니까?” 의 관중생품(觀衆生品)은 중생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릴 것을 권고한 후, 사리불로 하여금 분별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는 천녀의 설법을 담고 있다. 위의 대답은 “여자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가?” 하는 사리불의 질문에 대한 천녀의 답이다. 이는 “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조그만 법도 얻음이 없기에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는 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과 이 이른바 ‘여성즉신성불론(女性卽身成佛論)’의 입장이라면, 그 대척점에는 ‘팔경법(八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서울 관객 1백만을 돌파하는데 여섯 달 걸렸다. 그러나 ‘실미도’는 일주일, ‘태극기 휘날리며’는 5일 만에 전국 2백만 관객을 돌파했다. 10년 동안 한국영화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떻게 관객점유율 15%의 한국영화가 50%대로 뛰어 올랐으며,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던 서울 개봉관 숫자가 2백여개 이상으로 늘어났는가, 그리고 사양산업으로 인식되던 영화산업에 대규모 자본이 밀려드는가, 우리는 설명해야 한다. 수용자와의 행복한 소통에 성공한 다른 대중문화가 그렇듯이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 요인도 복합적이다. 한국 현대사의 감춰진 부분이 드라마로서 표현되었다거나, 한국전쟁이라는 소재에서 이데올로기를 탈색시키고 형제애에 초점을 맞춤으로
세계는 지금 불교에 주목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 미래 인류의 종교심을 충분히 감당할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한국불교 선, 학(禪, 學)의 역사와 전통은 현대세계 불교의 중심에 자리매김 될 수월성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불교권 국가 가운데 한국불교의 세계인지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서구권에서 떠올리는 불교는 티베트나 동남아시아 그리고 일본이다. 티베트와 동남아 불교는 19세기부터 서구학계가 직접 연구에 참여했고, 같은 시기 일본은 자력으로 서구사회에 일본 불교 알리기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때늦은 감 없지 않으나 조계종에서 국제 업무를 전담할 부서를 신설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교계에서 한국불교 세계화를 위한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해외에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크게 재물을 모은 다음 한꺼번에 보시를 하겠다.” 그러나 크게 모으기도 전에 임금이나 수화(水火)나 도둑에게 빼앗기든가, 그런 화를 면한대도 문득 죽게 되어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런 사람은 우유를 한꺼번에 짜려는 사람과 같다. 대보름을 맞는 마음이 몹시도 불편했다. 아무 죄 없이 태어난 아이들이 길거리에 버려지고, 전기가 끊겨 촛불을 켰다가 일가족이 변을 당하고, 저녁 운동을 나갔던 아이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이 삭막한 세상에, 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따위는 가당찮은 일이다. 농경사회에 뿌리를 둔 대보름의 풍속이 오늘날처럼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도 본래 모습으로 전승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 본래 의미는 오늘날 말하는 ‘시민의식’과 일맥상통한다. 핵
내 나이 열 살도 채 안 된무렵, 그 때 나는 흥얼거리기를 좋아 했었다. 그 나이에 무엇을 알았으랴만 “자왈 위선자는 천보지이복하고 위불선자는 천보지이화니라(子曰 爲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 공자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준다’고 했다)”는 구절을 외고 또 외웠다. 아니 차라리 떠들고 다녔다고 해야겠다. 뜻은 그만두고 그저 공부를 빙자한 욕설이라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그런 암기식 교육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펄쩍 뛰겠지만 그때는 무턱대고 외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도 그런 공부 덕분에 지금도 가끔 원문을 외울 수 있어 좋다. 아마도 반복학습을 통한 훈습(薰習)이 아쉬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한참 나이가 들어서 안
온갖 정성 두루 쌓인 이 공양을 부족한 덕행으로 감히 받노니 탐심을 여의어서 허물을 막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아 도업 이루고자 이제 먹노라. 밥 : 곡류 따위를 익혀 끼니로 먹는 음식. 주로 쌀밥을 일컬음.(이희승 감수 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한국인에 있어 밥의 의미는 이런 사전적 의미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밥은 단순히 음식의 한 가지가 아니다. 생명 또는 가장 숭고한 노동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밥숟가락을 놓았다’는 말은 죽음을 뜻한다. 태아에게 탯줄과 같은 것이 밥이라는 얘기다. ‘밥줄’이라는 말은 직업 또는 생계 수단의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다. ‘밥’의 의미 반경은 ‘빵’의 그것으로 갈음될 수 없다. 종교적 희생의례(犧牲儀禮)의 문화인류학적 의미는 누구도 단
청개구리 우화가 있다. 청개구리는 언제나 엄마의 말과는 정반대로 행동하여 엄마의 마음을 무진장 아프게 하였다. 엄마 개구리가 임종을 앞두고 자식의 이런 마음을 꿰뚫고 자신의 시신을 강에 묻어달라고 하자 그때서야 아기 청개구리는 자신의 불효를 깨닫고 엄마 말에 순종하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비만 오면 청개구리는 슬피운다고 한다. 이 우화를 통해 우리는 참된 효도가 무엇인지를 배웠다. 하지만 청개구리 우화를 현대인들은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왜 청개구리는 엄마의 말과 반대로 행동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청개구리는 자신이 엄마와 다른 존재임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다름, 즉 개성은 표현되어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개성이 강조되는 시대다. 최근 인터넷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얼짱 혹은 몸
2003년 동국대는 중앙일보에서 조사한 전국 대학 종합평가에서 30위로 떨어졌다. 2002년도에 24위에서 1년 만에 이렇게 추락한 것은 전례가 없을 정도였다. 지난해 동국대의 교수 10여명이 타 대학으로 떠났다. 위기를 느낀 교수회가 12월 재직 교수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여건만 되면 동국대를 떠나고 싶은 생각을 해본 교수가 51.1%로 나타났다니, 대단히 심각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급여문제였다. 서울시내 대학 중 동국대 직원의 급여는 중상위인 반면 교육의 주체인 교수는 중하위권이기 때문에 거의 전체 교수가 복지에 대해서는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교수 식당이나 휴게소 하나 변변히 없다는 것 등 교수들의 쌓인 불평이 이탈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구걸하는 사람을 보고도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아귀지옥의 문을 여는 일이다. ‘실미도’와 ‘아침형 인간’. 요즘 가장 많은 관객을 불러들이는 영화와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다. 영화는 ‘웰 메이드’로 매스컴의 상찬을 받고 있고, 책은 ‘웰 빙’과 성공을 얘기한다. 이런 점 말고는 둘 사이의 유사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메시지는 오히려 대척점에 서 있다. 영화는 국가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된 개인의 시각에서 ‘국가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고 있고, 책은 철저하게 ‘개인의,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성공을 속삭인다. 여기서 영화와 책의 접점을 발견한다. 개인! 영화는 ‘호전적 애국주의’라는 최악의 국가주의에 희생된 개인에 대한 진혼곡으로 읽힌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일정 부분 우리 사회의
얼마 후면 엄마 일주기가 돌아온다. 벌써 돌아가신지 1년이 됐다. 엄마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았지만 난 1년을 거뜬히 살아냈다. 두 다리는 물론 두 팔도 자유스럽지 못했던 나는 47년 동안 엄마를 의지해서 살았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엄마 없으면 한(寒)데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네 살 궁리를 해라.”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이 없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장애인 딸을 강하게 키우셨던 것이다. 철없던 시절 난 엄마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다른 엄마들도 다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위에는 장애 때문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았다. 장애인 시설에 있는 아이들은 가족이 포기한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시설에서 산다는 것은 생명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법조인이 조계종 총무원 내 법률지원단에서 전문위원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한다. 불교 종단에 각 분야의 전문인력이 영입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이 때에, 특히 그 필요성이 절박했던 법률 계통의 전문가가 영입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출세간적인 종교로 여겨지고 있고, 그 종단의 핵심을 이루는 출가인들은 그 출세간성의 표상으로 비쳐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시대를 이끌어 가는 불교로 서기 위해서는 세간과 밀접하게 교류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서 문제는 발생한다. 그런 경우 스님들이 직접적으로 뛰어들게 되면 정신적인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잃기 쉬울 뿐 아니라, 전문성을 갖추지 못하여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나 실패를 겪기 쉽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께서 승가교육을 ‘선교육 후득도’체계로 바꾸겠다는 뜻을 밝혔다. 충분한 자질을 갖추도록 하는 교육과정을 선행시키고, 그런 다음에 비구(니)계를 받도록 하는 체계로 전환할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높은 자질의 성직자를 보유하여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키겠다는 조계종단의 의지가 표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또 그만큼 수많은 개선책이 제시되어온 승가교육의 체계를 혁신하는 새로운 출발이 될 수도 있으리라 기대하게 된다. 또한 이번의 개혁이 피상적인 제도의 개선에 그치지 말고 승가 교육체계를 전면적으로 검코하고 근본적 해결책을 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요청도 뒤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선득도 후교육’이냐 ‘선교육 후득도’이냐가 승가교육의 근본적
최근 독도의 그림이 들어간 환경 생태계 우표 발행을 둘러싸고 일본 정국이 보여주는 행태가 가관이다. 한 장관은 자기들도 독도가 들어간 우표를 발행하자고 하는가 하면, 수상은 독도가 엄연히 자기네의 땅이라 천명하였다. 그 장관은 얼마 전 한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 맞춰 식민통치를 미화하는 발언을 하여 양국 정상의 만남에 찬물을 끼얹었던 사람이고, 수상은 담화 발표에 앞서 전격적으로 일본의 전범이 묻혀있는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를 참배함으로서 식민지통치에 치를 떠는 우리 국민에게 또 한번의 상처를 준 인물로 일본 극우파의 대변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독도를 저들의 영토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그 섬에 자원이 풍부하게 있어서가 아니다. 독도와 그 주변에는 이렇다 할 자원이 없다. 그런데도
악업을 저질렀어도 마음을 돌려 고백하고 앞서의 잘못을 반성해 깨닫고 마음을 집중하여 거듭 참회한다면 과보를 받지 않는다. ―분별악업보응경 후안무치(厚顔無恥). 한국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 특히 국회의원의 하는 꼴에 이보다 합당한 말이 있을까 싶다. 당연히 감옥에 가야 할 비리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은 그들의 특수한 신체구조(발뒤꿈치 수준의 안면 피부)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어떤 집단에도 예외적 존재는 있는 법. 6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오세훈 의원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참회록은 쓰레기더미 속에 짓눌려 시들어가던 희망의 싹이었다. “…지난 4년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묵인한 무력함이 부끄럽고, 묵인을 넘어서서 어
조계종이 제9회 포교사고시를 끝내고 이번에 또 349명의 포교사를 배출했다. 이번 포교사고시에는 공무원, 군 장성, 교사출신이 대거 합격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응시생 수준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지원자들의 지역별, 계층별 분포가 다양해짐으로써 포교의 전방위활동이 기대되고 있는 것도 크게 환영할 일이다. 조계종이 1982년 3월 포교사를 배출한 이래 지금까지 모두 4700여명의 포교사가 양성되었으며, 포교사고시를 통해 배출된 유자격 포교사만 해도 국제포교사를 포함해 2000여명이 넘는다. 돌이켜보면 현대한국불교는 6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근40여 년간을 비구.대처 분규와 종단 내부갈등에 휩싸여 종교로서의 주요 본분사인 포교를 사실상 포기한 것과 다름
요즘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변화에 대한 요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정치물갈이니, 핵시설에 대한 근본적 반성, 환경에 대한 새로운 각성, 교육, 문화, 경제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변화를 외치고 있다. 이것은 아무래도 사회적 병적 현상이라기 보다는 가치체계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치체계의 변화는 사회가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할수록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가 많아지게 되고, 거기에 따른 다양한 충족을 요구함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욕구는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 그리고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수준과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서 변화된다. 특히 사회, 경제가 발전될수록 기본욕구는 다양해지고 수준이 높아진다 우리 사회는 빈곤이나 기아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