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의 불교미학산책] 22. 남산 1
‘법화경’ 영산 위에서 말하려 했던 것 남산서 미학으로 동국대·불교 톺아보기 대승불교 주축 ‘법화경’ 통이해 난해 경전을 이해·해석 대신 감상하게 돼
이번 산책에서는 동국대 서울캠퍼스를 둘러본 긴 시간 동안 이름만 언급된 남산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동국대가 남산에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남산이 동국대의 전제란 관점에서 출발하면, 지금에서야 말하기는 멋쩍지만 필자가 수차례 연재하는 동안 ‘미학’이란 전제를 얼마나 충실히 설명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산책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라도 미학으로 동국대와 불교를 톺아보는 작업의 전제가 무엇인지 밝혀야 할 듯하다.
필자가 〈법화경〉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점은 몇 차례 말씀드린 것으로 기억한다. 〈법화경〉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겉으로는 그리 대단한 인연이 아니다. 학부 저학년 시절 어쩌다 얻어 보게 된 〈대승불교란 무엇인가〉란 책 덕분이었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반세기 전 당시로서는 40년이 다 돼 가는, 한마디로 다소 낡은 연구집이었다. 하지만 필자가 사실상 처음 본 전문학술서였기에 불교를 연구한다는 의미가 어렴풋하게라도 잡힐까 싶어 열심히 읽어 봤다.
하지만 말 그대로 하얀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씨란 것 외에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난 벽이랄까, 그 충격은 상당히 컸다. 논문 몇 편을 모아 놓은 책이기에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없어서일까, 개별 논문들을 몇 번이고 통독했지만 읽었다는 사실 외에 해변의 모래를 아무리 꽉 움켜잡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지듯 글자들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중 손아귀에 남는 모래알 세 글자가 있었으니, 그것이 〈법화경〉이었다.
〈대승불교란 무엇인가〉란 제목에 걸맞게 그 책은 ‘대승경전 성립론’에 한 챕터를 할애했는데, 그 중심에 〈법화경〉 성립론을 먼저 설명하고 이를 기준으로 다른 경전들의 성립론을 구성했다. 말하자면 〈법화경〉이 북극성이고 다른 경전들은 이를 기준으로 흩어져 있는 별들과 같았다. 필자가 이해한 것은 〈법화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뿐이었다. 그래서 〈법화경〉이나 ‘법화’란 단어가 들어간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다음 만난 것이 천태였다.
천태 자체는 처음에 거부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법화경〉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이 경전을 바탕으로 전(全) 불교를 재편하고 있는 천태가 이해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또 다른 인연으로 천태를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필자는 청개구리처럼 화엄학을 들으며 천태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다.
필자가 학부생이던 당시, 지금은 은퇴하신 해주 스님이 화엄학을 지도하셨는데 수업이 시작되면 곧바로 무진법문을 풀어내셨다. 의상 대사는 오척신의 몸 그대로가 법성신이라고 했는데 해주 스님은 바로 그 오척신의 몸으로 화엄법계를 펼치시는 분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멋있었다.
그런데 화엄의 피할 수 없는 숙적이 바로 법화 아닌가. 대승불교의 지극(至極)이 누구인지를 두고, 화엄은 스스로를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특별한 ‘별교일승’으로, 법화를 일승이기는 하나 아직 방편이 남아 삼승과 함께하는 ‘동교일승’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법화를 말하기 위해서라도 천태를 해야 함을 느끼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 때는 화엄은 교학만 있고 천태는 교학과 수행을 일치시킨다는 점에 착안해 그 우위를 말하기 위해 천태의 교관일치를 주제로 논문을 작성했다. 나름 천태에 대한 이해도 어느 정도 있다고 말하기에 아쉽지 않게 쓴 논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논문을 작성하면서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천태의 핵이 〈법화경〉이 아니라 원교(圓敎)에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 천태는 법화주의가 아니라 원교주의라는 말도 시기를 비슷하게 해 다른 연구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청개구리로서 또 한 번 천태가 아니라 순수하게 〈법화경〉을 내 언어로 곱씹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됐다.
이때까지는 ‘이해’, ‘해석’이란 틀 안에서 〈법화경〉을 분석하겠다면서 달려들었다.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던 학부생은 이제 죽어서 없고 나름 연구자 구색을 갖춘 과정생이 못할 게 무엇이 있겠나 덤벼든 것이다. 여러 측면에서 접근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법화경〉을 말하지 않은 조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동아시아 불교 전체에서 〈법화경〉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연구자의 한 생애가 걸릴 일이었다.
이렇게 자료를 보면서 다시 여러 조사들의 해석과 이해가 〈법화경〉의 문맥과 맞는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충격적이었던 건 누구의 이해도 〈법화경〉과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러 선학들은 〈법화경〉의 특정 부분과 문장을 토르소처럼 잘라 필요한 부위만 가져가 요리했을 뿐, 경전 전체의 문맥을 고려하는 연구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런가’하면서 〈법화경〉을 읽고 또 읽었다.
또다시 충격을 받은 것은 〈법화경〉에 문맥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법화경〉은 구절구절 따로 보면 이해가 되지만 경전 전체를 통째로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제야 왜 조사와 선학들이 〈법화경〉을 토막 내 그 부분만을 경전의 전체인 마냥 인용했는지 알게 됐다. 본래 이해와 해석의 측면에서 〈법화경〉은 알기 어려운 경전이며 선학들 또한 자신의 알음알이에 맞춰 이 경전을 꾸겨 넣거나 빵틀로 지저분한 부분은 잘라 내어 정돈한 뒤 그릇에 담아 내놓은 것이었다.
연구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연구방법이라기보다는 사고방식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해’와 ‘해석’을 배제한 연구방법이라니. 사실 그때 살짝 공부를 놓게 됐다. 별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밖으로는 충실히 과정생 시절을 보내는 척하면서 도피하듯 다른 철학, 이론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별다르게 불교를 읽어 갈 길이 없어서 경전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때 도피하듯 찾아 읽은 책들 가운데 ‘미학’을 주제로 한 것들이 있었다. 해석의 반대로 감상을, 이해의 반대로 스타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필자는 〈법화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타일을 감상해야 함을, 그래야만 〈법화경〉을 통짜로 이해하게 됨을 직감하게 됐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