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 22. 소설_양주길을 걷다

칼바람 속 첫눈이 전하는 겨울 풍경 

2025-11-21     장보배 작가
한양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였던 양주에 태조 이성계가 사랑한 회암사의 거대한 흔적이 남아 전해진다. 1만여 평 부지에 총 8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설계된 회암사지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선정돼 있으며, 정식 등재를 위한 절차가 진행 중이다.

화염 같은 더위에 한 방울의 물이 귀하듯, 깊은 어둠 속 여린 등불이 태양처럼 귀하듯, 더는 물러날 곳 없는 겨울의 칼바람을 견디게 하는 것은 자그마한 온기. 그리고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그리운 어떤 곳이다. 

저기 천보산 너른 들판 위,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왕을 기다리며 잠든 왕궁이 있다. 마르지 않는 감로의 물이 메마른 목을 적셔 주고 꺼지지 않는 등불이 깊은 밤 찾아올 이를 기다리는 곳. 첫눈 내리는 어느 날, 그렇게 돌아올 누군가를 위해 영원의 궁전은 겨울 산을 지킨다. 

첫눈을 기다리며
눈이 내릴 것이다. 지금의 절기는 소설(小雪).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은 이름처럼 첫눈과 함께 돌아온다. 겨울이 일어선 입동이 지났으니 곧 눈이 내리고 세상은 완연히 겨울의 풍경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15일간 이어지는 하나의 절기. 옛사람들은 그 절기를 매번 5일씩 나누어 3후(三候)로 삼았다. 그리고 절기마다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 서서히 오르내리는 천지의 기운을 오롯이 기록에 남겼다. 

철에 따라 변화하는 만물의 상태나 징후를 뜻하는 ‘물후(物候)’가 바로 그것. 얼핏 보기에는 크게 다름이 없어 보이는 겨울 풍경에도 반드시 변화는 있기에, 색이 더해지고 또 물이 빠지듯 그만의 물후를 남긴다.

소설의 모습은 첫 번째 5일은 무지개가 걷혀 더는 나타나지 않고 다음 5일에는 천기(天氣)는 오르고 지기(地氣)는 내리며 마지막에는 그 길이 막혀 완전한 겨울이 된다고 했다. 

겨울이지만 맑은 하늘과 따스한 햇볕이 사라지지 않아 ‘소춘(小春)’이라는 별칭을 가진 특별한 절기. 하지만 자연은 어김없이 제때의 모습을 찾아가기 마련. 소설과 함께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처럼 순식간에 기온은 떨어지고 바람은 거세어지며 평균 5도 이하의 겨울이 시작된다. 

서둘러 오는 추위만큼 겨울 채비로 바쁜 것도 바로 이즈음. 전국의 사찰에서도 막바지 김장 울력과 함께 겨우내 먹을거리 준비로 분주한 때다.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산사의 김치 나눔이 연일 이어지는 것도 주로 이맘때의 풍경.

산사의 처마에는 곶감과 시래기, 호박고지가 차례로 매어 걸리고, 산나물과 고구마, 무말랭이는 바람과 햇살에 몸을 맡긴 채 장독대 위에 펼쳐진다. 겨우내 선방 스님들의 체력을 보해 줄 산야초는 한지에 곱게 싸여 갈무리돼 필요할 때마다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어느 날이면 늙은 호박이 달큼한 식혜로, 또 단팥과 말린 고구마를 넣어 푹 끓인 죽이 되어 별미가 돼 줄 시간. 겨울의 모든 것은 생장하는 여름의 그것보다 몇 배나 품이 들고, 그래서 더욱 진하다.

점점 절기는 깊어지고 이제 지난여름의 무지개를 삼킨 하늘은 순백의 눈송이로 흘러간 계절의 소식을 전할 것이다. 아득히 먼 어느 날의 이야기와 함께.

회암사지 당간지주의 일부.

사찰, 혹은 궁궐

경기도 양주시. 해발 500m 천보산 아래 너른 대지 위로 옛 절터의 모습이 보인다. 이곳은 조선 최대 사찰이었던 회암사의 자리. 하지만 절터 또는 폐사지라는 말이 지닌 왠지 모를 처연함과 쓸쓸함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 

국내 어느 폐사지에서도 볼 수 없는 압도적인 규모의 사적(史跡).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건물지의 원형을 지키고 버텨 온 이곳은 거대한 성전, 동시에 한 왕의 정신적 쉼터로 기록된다.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수십 채의 건물, 한때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던 조선 최고의 사찰. 비록 과거의 목조 전각들은 모두 사라졌으나, 가람을 감싸고 있던 축대와 주춧돌, 기단, 거대한 규모의 괘불대만으로도 이곳의 위용은 빛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영광을 바라보는 저 크고 아름다운 석가모니 진신사리탑까지. 

회암사는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總本山)이었으며, 조선 초에도 선종 본찰로 크게 번영한 국찰이었다. 

그 처음은 고려 말 인도의 고승 지공 선사가 ‘이곳에 절을 세우면 불법이 크게 흥할 것’이라 하여, 그 제자인 나옹 선사가 대대적인 불사를 이루는 것에서 시작된다. 또 당시 불교계를 사상적으로 이끌었던 지공 선사, 나옹 선사, 무학 대사 등 이 땅의 선승들이 차례로 법맥을 이어 주석한 가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성장의 배경에 태조 이성계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던 것이다. 

태조는 자신의 스승인 무학 대사를 이곳에 모시고 수시로 회암사를 찾았다. 또 왕위를 물려준 뒤 그 스스로 회암사에서 수행에 전념하며 제2의 안식처로 삼았다. 자신이 숨을 거둔 뒤 불교계가 탄압받을 것을 걱정했던 태조는 무학 대사 생전부터 그의 부도탑을 세워서까지 이곳의 의미를 공고히 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피할 수 없었던 숭유억불의 거센 난풍은 한 왕의 안식처, 아니 위대한 불법의 요람을 끝내 쇠락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거대한 왕궁은 아주 오랜 시간 긴 잠에 빠지게 된 것이다.

궁궐과 같은 양식을 보이는 회암사지 계단.

두 가지 보물 

모든 것을 쓸어 버릴 듯한 광풍은 반드시 저 스스로 힘을 잃고 스러지기 마련이다. 한때 유교 사상에 취해 있던 유생들은 회암사를 불태우려 했고, 자비의 법음을 울렸을 범종은 대신 죽음의 무기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사라질 뻔했다. 억불정책의 위세에 취했던 어떤 이는 위대한 선승의 발자취를 슬그머니 지우고선 집안의 묫자리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제 지난 일이다. 

천보산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뒤덮였던 회암사지가 세상에 드러난 날. 그리고 반세기가 넘도록 이곳을 되살리려 한 학계의 노력으로 이제 회암사지는 새로운 보고(寶庫)가 되어 사람들을 기다린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2000년 이곳에서 국내 고건축 사상 최대 규모의 온돌시설이 발견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서승당(西僧堂). 서승당은 스님들이 머물며 겨울에도 참선할 수 있도록 온돌을 설치한 선원 형태의 대방이었다. 특히 이곳은 〈세계건축사전〉(1979년/세계건축협회)에 오른 경남 하동 칠불사의 아자방(亞字房) 온돌과 유사한 구조를 이룬다. 그리고 회암사의 온돌은 아궁이 및 부엌, 굴뚝, 계단, 출입시설, 기둥 자리까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당시는 온돌구조가 나라 전반에 대중화되지 못한 시기였지만 이 또한 왕이 사랑한 왕실사찰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왕의 마음을 쉬게 한 사찰. 그의 영원한 궁궐은 그렇게 오늘날까지 자신의 옛이야기를 전한다. 

500여 년 전 겨울, 첫눈이 나리던 그날에도 왕의 마음은 이 고요한 성전을 향해 달렸을지 모를 일이다. 알 수 없이 아득한 미래를 뚫고 그저 저 고고한 종소리와 부처님 곁에 머물기 위하여.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바람을 뚫고 살아 남은 그는 불법(佛法)을 통해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의지와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저 뜨끈한 온돌과 함께라면 더욱. 

한 나라의 왕, 또 가진 것 없이 가난한 500년 전 수행자의 마음도 똑같이 위로해 주었을 부처님의 가르침과 온돌.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이 두 보물의 특별한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니 다가올 겨울도, 눈보라 몰아칠 어떤 날도 무섭지만은 않은 것이다. 

약 100년 만에 돌아온 3여래 2조사 진신사리.


▶한줄 요약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 맑은 하늘과 따스한 햇볕 사이로 5도 이하의 추위가 시작돼 사찰도 겨우내 먹을거리 준비로 분주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