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과 출세간] 인공지능 시대의 침묵

침묵, 지배 구조 불협조·저항 전략 묵언, 자기성찰·관계 회복의 기술 침묵과 묵언 다시 배워야 할 시점

2025-11-21     이화행 교수 / 동명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인공지능(AI)이 일상의 거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분석하는 시대, ‘침묵’은 사라지는 감각처럼 보인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뉴스와 정보에 반응하고, 대화형 인공지능과 수시로 의견을 교환한다. 소셜미디어에서 입을 다물면 존재가 지워지는 듯한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사회과학 연구들은 오히려 침묵이 사회적 관계를 재구성하고 권력을 드러내며 공동체의 분위기를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실천 행위임을 밝혀 주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 공간에서는 특정 의견이 알고리즘에 의해 반복 노출되면서 그것이 실제보다 훨씬 더 강한 다수 의견처럼 보인다. 이는 독일의 커뮤니케이션학자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이 1970년대 제시한 ‘침묵의 나선’ 이론으로 잘 설명된다.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고립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 여론 형성 과정에서 특정 의견이 지배적인 의견처럼 보일 때 사람들은 소수 의견을 말하면 배척당할 것이라고 느끼고, 이를 피하기 위해 침묵을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다원적 무지라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즉 우리는 실제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함에도 다수가 특정 의견을 지지한다고 잘못 인식하게 된다. 알고리즘은 이 과정을 더욱 부추겨, 특정 의견만을 재노출하며 우리의 인식 지평을 좁혀 버린다. 여기에 다른 사람들은 여론에 휘둘리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제3자 효과’까지 결합하면서 사회는 더욱 왜곡되고, 사람들의 행동은 점점 조심스러워져 자신의 침묵을 정당화하기 쉬워진다.

결과적으로 알고리즘의 노출 구조, 사회적 고립에 대한 두려움, 다원적 무지와 제3자 효과가 서로 얽혀 침묵을 확대하고 여론을 기울게 만드는 디지털 나선 구조를 형성한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이유가 결코 무지나 무관심이 아니라, AI 기반 공론장이 만들어 내는 심리적·사회적·기술적 압력 속에서 침묵이 더 안전한 선택이라는 판단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침묵은 단순히 사회적 압력의 결과만은 아니다. 의식적으로 선택된 침묵은 오히려 저항의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류학자 제임스 C. 스콧은 약자 집단이 공개적 반발 대신 은밀한 저항을 한다고 설명한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배 구조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 침묵은 일종의 전략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묵언(黙言) 역시 이러한 능동적 침묵과 맞닿아 있다. 묵언은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내면의 탐·진·치를 가라앉히고, 타인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듣기 위한 수양이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적 여백’의 확보라고 설명한다. 말의 부재를 통해 뇌가 정보 과부하에서 벗어나고 감정적 반응이 조절되며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 회복된다. 즉 묵언은 자기성찰만이 아니라 관계 회복의 기술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언어를 학습하고 플랫폼이 우리의 반응을 설계하는 시대에 침묵은 퇴보가 아니라 성찰을 위한 전략적 공간이며, 정보 과잉 속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보호하는 일종의 지혜다. 지금 우리는 거대한 소음의 시대를 건너면서 침묵과 묵언이라는 오래된 실천을 다시 배워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