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붓다를 만나다] 22.순헌 황귀비가 피워 낸 연꽃

격동의 시대, 나라 안녕 기원한 대시주 

2025-11-14     이승혜 동아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순헌 황귀비 엄씨, 대한제국,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사진=emuseum

흑백 사진 속에는 화려한 두 폭 가리개를 배경으로 궁중 예복을 입은 여성이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서 있다. 어여머리를 하고 홍원삼에 대란 치마를 착용해 예를 갖춘 모습이다. 사진 속 인물은 만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궁녀로 입궁해 황귀비라는 조선 시대 내명부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위에 올랐던 순헌 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1911)이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는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이 여인의 지위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구한말 역사의 파고를 정치적 감각과 영민함으로 헤쳐 나가며 나라의 미래를 위해 여성 교육에 앞장섰던 순헌 황귀비는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했던 ‘대련화(大蓮花)’라는 법명을 지닌 불자이기도 했다. 

애기 나인에서 황귀비까지

순헌 황귀비 엄씨는 1854년(철종 5) 음력 11월 5일에 엄진삼(嚴鎭三)과 밀양 박씨(密陽朴氏)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무덤인 영휘원(永徽園)에 세워진 비석에 의하면, 1859년(철종 10)에 입궁해 궁녀가 됐으며 이후 명성 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됐다고 한다. 구한말의 재야 문인 황현(黃玹, 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1885년(고종 22)에 상궁 엄씨가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자 명성 황후가 크게 화를 내 죽이려 했으나 고종이 만류해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는 것이다. 

순헌 황귀비의 이름이 역사에 재등장하는 것은 1895년(고종 32)의 일이다. 1895년 10월 8일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고 닷새 후, 고종은 궁 밖에 있던 엄씨를 다시 입궁하게 했다. 재입궁한 엄씨는 1896년(고종 33) 2월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했던 때부터 그다음 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고종을 측근에서 보필했다. 엄씨는 1897년(광무 원년) 10월에는 경운궁에서 영친왕 이은(李垠)을 낳았고, 황자를 낳은 공으로 궁인에서 종1품 귀인(貴人)으로 책봉됐다. 

이후 10여 년 사이에 연이어 높아진 품계는 그녀의 정치적인 감각을 잘 보여 준다. 엄귀인은 1900년(광무 4) 8월 정1품 순빈(淳嬪)에 진봉된 것을 시작으로 1901년(광무 5) 10월에는 순비(淳妃)로 승격됐고 경선(慶善)이란 궁호(宮號)를 받았다. 1903년(광무 7) 12월에는 이윽고 황귀비로 책봉됐다. 엄비의 지지 세력이 일 년 넘게 한결같은 덕으로 경효전(景孝殿)의 제사를 받들고, 황자를 낳아 자손을 번성한 공을 인정해 달라고 상소를 올린 결과였다. 비록 그녀는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되지는 못했지만, 고종의 정비가 없는 상황에서 내명부의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1907년에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영친왕이 유학이란 명목 아래 일본에 끌려가면서 순헌 황귀비 역시 큰 시련을 겪었다. 순헌 황귀비는 한일합방 다음 해인 1911년 7월 20일에 망국(亡國)의 귀비 신분으로 덕수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불암사 괘불, 조선 1895년, 삼베에 채색, 남양주 불암사. 사진=〈한국의 불화〉

순헌 황귀비의 불화 발원

고종 대에는 왕실의 활발한 후원 아래 사찰이 중창되고 많은 불화가 조성됐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아들을 대신해 섭정했던 흥선 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은 서울과 경기 지역의 여러 사찰 재건에 나섰다. 당시 섭정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흥선 대원군이 거리낌 없이 불교를 후원함에 따라 대비, 왕비, 후궁, 상궁 등 내명부 여성들도 보다 자유롭게 불사를 후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됐다. 신정 왕후 조씨와 효정 왕후 홍씨와 같은 왕실 여성 어른들은 앞다퉈 불화를 발원했다. 왕실 여성들은 새롭게 조성된 불전 안에 봉안되는 후불탱화나 대규모 야외 법회에서 사용되는 의식용 불화인 괘불(掛佛)을 후원한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에는 왕손이 극도로 귀해짐에 따라 사찰을 왕자 탄생을 비는 기도처로 지정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왕실 식구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상궁들도 때로는 이들의 명을 받들어 불사를 수행하고 때로는 스스로 의지로 불사를 주도하고 동참했다. 

순헌 황귀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상궁 시절부터 황귀비 시절에 이르기까지 생애 각 단계에서 꾸준히 불화를 발원하고 불사를 후원했다. 고종의 승은을 입기 전인 상궁 시절에 여러 궁인과 함께 불사에 동참하거나 왕실 어른의 명을 받들어 불사를 수행한 사실이 확인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1878년(고종 15)에 거행된 화계사(華溪寺) 명부전 불화 불사다. 여러 점의 불화가 동시에 조성된 이 불사에는 효정 왕후 홍씨와 많은 상궁이 시주자로 동참했다. 순헌 황귀비의 이름은 ‘시왕도’(5·7·9 대왕)의 화기에 ‘상궁 갑인생 엄씨(尙宮甲寅生嚴氏)’라고 적혀 있다. 

한편 명성 황후 시해 사건 직후인 1895년(고종 32) 11월에 조성된 불암사(佛巖寺) 괘불의 화기에는 ‘명을 받든 신하 상궁 갑인생 엄씨’라고 기록돼 있어 황실을 대신해 불사를 봉행했음을 알 수 있다. 화기에는 고종, 왕세자 내외, 그리고 흥선 대원군의 건강과 안녕을 빌고 먼저 가신 명성 황후가 연화세계에 상품 상생하기를 바라는 기원이 적혀 있다. 세로로 긴 화면에는 석가모니, 약사, 아미타의 세 여래가 정면을 향한 자세로 그려져 있다. 중앙의 본존 석가모니여래는 왼손바닥 위에 연꽃을 든 특이한 모습이다. 석가모니가 든 연꽃은 보통 염화미소의 가르침을 상징하지만, 이 그림에서만큼은 연화세계에 명성 황후의 선가를 태워 갈 금련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엄씨는 순비로 책봉된 후에는 괘불을 대시주로서 발원하거나, 사찰을 창건하고 중창하는 불사를 도모하는 등 불사에 한층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예로 1902년(고종 39)에 발원해 한미산(漢美山) 흥국사(興國寺)에 봉안한 괘불이 있다. 이 불화 화기에는 시주자들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황실 가족을 위한 봉축문이 있어서 순비 엄씨가 주도했던 불사로 생각된다. 괘불 화면 상단에는 무량수불과 관음·세지보살의 삼존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가섭·아난존자와 문수·보현보살을 배치했다. 정면으로 화면 너머를 응시하는 무량수불은 오른손을 길게 뻗어 우리에게 내밀고 계시는 듯하다. 좌우의 두 분 협시보살은 각각 바깥을 향한 손에 탐스러운 꽃송이를 들고 있다. 화면 상단을 매운 오색의 서기와 구름은 화면에 상서로운 기운을 더한다.

흥국사 괘불, 대한제국 1902년, 면 바탕에 채색, 고양 흥국사. 사진=〈한국의 불화〉

괘불이 조성된 지 2년 후인 1904년(고종 41) 가을부터 흥국사에서는 황실의 후원으로 만일염불회(萬一念佛會)가 개최됐다. 만일염불회는 극락정토 왕생을 기원하면서 1만일을 기약하고 염불 수행하는 모임을 뜻한다. 흥국사에는 1929년에 세워진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가 남아 있어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비석의 음기(陰記)에는 고종을 필두로 순비, 고종의 또 다른 후궁인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梁氏, 1882~1929), 다수의 상궁과 신녀(信女), 스님과 신사(信士)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를 통해 흥국사 만일염불회가 왕실의 안녕을 비는 불교 의례였음을 알 수 있다.

대연화처럼 피어난 신심

순헌 황귀비 엄씨는 격변의 시대 속에서도 신심으로 불사를 이끌고 불화의 아름다움을 꽃피웠던 대시주였다. 어린 시절 궁녀로 입궁해 황귀비에 오르기까지, 그녀의 신심은 불사를 후원하고 대규모 불화를 발원하는 실천으로 이어졌다. 순헌 황귀비의 발원은 곧 시련을 겪던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였다.
 

▶한줄 요약 

순헌 황귀비 엄씨는 격변의 시대에 불사를 이끌고 불화를 발원하며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신심 깊은 대시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