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불논단] 불자의 최소 조건
불교·불법·불도는 다른 표현에 불과 다르지 않음 알면 실천 저절로 행해져 삼귀의·보시 실천, 청정으로 나아가야
예전에 어느 불교 전법사가 주창한 캐치프레이즈가 있었다.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도 불법을 바로 아는 이는 드물고, 불도를 바르게 실천하는 이는 더욱 드물다’라는 것이었다. 평범한 글이지만 비교적 강한 전달력이 있다고 생각됐다.
오늘날 종종 발표되는 통계를 봐도 다른 어떤 종교보다 불교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틀림없는 것 같으니 첫째 구호는 의미 있는 진단이라 할 수 있다. ‘드물다’라는 말도 그렇지만 불법이라는 말에 어떻든 복잡한 교리체계 등을 떠올리게 돼 두 번째 표어도 수긍할 수 있다. 세 번째 구호, 불도를 바르게 실천하는 이는 더욱 드물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스스로 불교를 잘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인용한 캐치프레이즈라면 불교를 바르게 실천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아무리 불교가 좋아도 불교를 바르게 실천하는 이가 없거나 활용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불교는 자연적으로 도태될 것이다. 과연 불교가 무용지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불교를 무용지물이라는 것은 옳은 진단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앞의 캐치프레이즈가 왜 의미 있게 들릴까? 정답은 없다. 그렇지만 그 답은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불교니, 불법이니, 불도니 하는 용어의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대개 사람들은 용어의 함정, 언어의 함정에 쉽게 빠진다. 말은 의미의 전달을 위해 유사하게 모습을 바꾸는 속성이 있다.
불교나 불법, 불도 등의 표현에는 그 차이가 없지 않으나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를 붓다의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것은 초보적 이해이다. 불교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세상 대중들에게 전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그 가르침의 다양한 법(교설이나 존재)이나 법칙을 칭하기 위해 불법이라 하며, 세상 대중에게 가르쳐 그 교설을 따라가니 불도라 칭해지는 것이다.
결국 불교, 불법, 불도라고 하는 것은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그것을 좋아하고 알며 실천하는 데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으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실천은 저절로 행해지게 돼 있다. 불교를 좋아하고 알고 하는 행하는 순간 불자[bauddha]가 되며, 그것은 수계라는 의식으로 확정된다.
그래서 불교를 행하는 것은, 즉 불교·불법·불도를 실천하는 방법은 고통의 현재에서 벗어나 피난처로 돌아가서 의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붓당 사라남 가차미/ 담망 사라남 가차미/ 상강 사라남 가차미’라는 삼귀의의 서원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돌아가 의지할 곳은 붓다·담마·승가인데,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붓다를 칭명하고 받들겠다/ 붓다의 가르침을 삶의 지표로 삼겠다/ 청정한 승가를 공경하며 살아가겠다”라고 해석해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붓다의 제자, 바웃다의 최소 조건이다. 여기에 보시의 베풂으로 인색함을 덜고 청정으로 나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