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이에게]내 자불이 하는 거다 한다면 나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찰나찰나 화해서 나투고 끝없이 돌아가는 이 진리를 파악하라 우리가 이런 공부를한다고 해서 닥칠 게 안 닥치는 게 아니라 닥치는 거를 어떻게 능숙하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질문자1(남) 저는 요즘 현실에 대해서 좀 묻고 싶습니다. 요즘 정치가 굉장히 혼란스럽게 돌아가고 있는데요, 정말 걱정이 많습니다. 경제도 엉망이고요. 이번에는 정말 훌륭한 분이 나와서 우리나라를 건강하게 좀 이끌 수 있는 그런 분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생각도 없이 나왔습니다.
큰스님 나랏일이 걱정되십니까? 올해 특별히 그 질문을 하시고 그러는데, 우리 근본이 일체 만물만생과도 가설이 돼 있고 일체제불하고도 바로 직결돼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우주 삼천대천세계하고도 직결이 돼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말로 하고 몸이 움죽거리고 그래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함이 없이 하라 이런 소립니다.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알아서 그렇게 하신다면 남한테 유난히 저주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도리가 있다 이 소립니다.
모든 것은 이 우주 대천세계에뿐만 아니라 지구 하나도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 진리를 파악하신다면 우주의 주인이 되고 또 주인이 이끌고 결정을 해서 지구의 심부름꾼을 만들 수도 있죠. 그리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마음으로 오직 하시면서 느끼는 대로 깊이 안으로 하십시오. 잘못 나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모두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거를 알아야 하고, 또 어떠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 나가는가 그걸 알아야 하고, 지금 어떤 사람이 되면 우리 국민이 편안할까 하는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그 과거로부터 말입니다. 어저께도 과거니까 과거로부터 해 나온 걸 보면 현재에 그 도리가 다 나오게 되는 거니까요. 어떻게 돌아갈 건가 한번 생각해서 마음을 깊은 속에서 내십시오. 그럼으로써 바깥으로 끄달리지 않고 생활을 그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질문자2(남) 스님, 안녕하세요? 시험을 앞두고 있는 고3이거든요. 셋째 주 법회를 들으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2주 전에 셋째 주 법회 들으려고 올라오려고 생각을 했었는데요, 그때는 참, 시험에 대해서 두려움이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어제 고3 법회를 했는데 거기서 혜룡 스님께서 ‘내가 없다’ 그런 말씀을 하시데요. ‘나를 버려라’ 이런 말씀을 듣고 지금은 내가 없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거든요, 순간순간에요. 그러다 보니까 순간순간이 너무 행복하고요, 시험도 시험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냥 일과로 생각이 되고, 그냥 편안한 마음밖에 안 들거든요. 그런 제 마음에 대해서 스님께 정말 감사를 드리고요, 그리고 저를 비롯해서 전국에 있는 수험생들이 시험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마음 편하게 치를 수 있게 그렇게 마음 내 주기를 바라고 여기 섰습니다. 마음 내 주십시오.
큰스님 마음을 제 삼자에게 내달라고 하기 이전에 ‘내 마음을 내면 다 통한다’ 이런 걸 좀 알아야 돼요. 즉 말하자면 남한테 마음을 내 달라기 이전에 내 마음을 내면 더불어 같이 내진다는 말이에요.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하지 말라’ 이런 것도 아니고 ‘생각을 내지 말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을 보는데 어떻게 그것을 이것저것 다 버리고 편안하게 하겠습니까만, 편안치 못하든 편안하든 다 버리는 겁니다. 놓는 겁니다.
이 몸뚱이가 고정됨이 없이 바로 화해서 찰나찰나 나투는 까닭에 공했단 말입니다. 어떤 거를 할 때에 내가 했고 어떤 거를 할 때에 내가 안 했고 이게 없다 이 소리죠. 그런 까닭에 주인공 자불이 나의 모든 기능을 합해서 시험을 보는 거니까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잖어. 합격되게 할 수 있는 것도 너뿐이야.’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자기 보배를 자기가 응용 못 하고 바깥으로 끄달리면서 자꾸 내가 무엇이 모자라는데, 내가 무엇이 모자라기 때문에 누구한테 무엇을 물어봐야 하고, 책을 찾아봐야 하고 이런 문제들이 많이 생기죠. 그러니까 이 모두를 볼 때엔 모두 자기 할 탓이죠,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요. 모든 게 자기 할 탓이다, 자기가 하는 대로 삶도 악도 선도 다 살고 있다, 자기가 할 탓이다 이거죠. 자기가 한 대로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자기네들이 한 탓으로 이렇게 되니까 너희들이 좀 벗어나서 살아라’ 하고 일러 주신 거죠.
예를 들어서 닭이 왜 사람으로 부화를 못 하느냐. 닭으로 살던 습이 머리에 쟁여져서 닭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 닭의 습성이 있어서요. 돼지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소도 그렇고 다 그래요, 그 살던 습성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도 그 습성을 다 거쳐 올라온 사람들입니다. 올라와서 사람까지 이르렀는데 사람도 천차만별로 차원이 있으니 이것을 어찌하느냐 이런 소립니다.
그러니까 모두 생각해서 될 것도 아니고 ‘한생각을 잘하라’ 이런 뜻입니다. 생각하고 논의하고 그래서 될 일이 아니고 한생각, 보는 순간 듣는 순간 한생각 잘하면 그게 법이 된다 이거예요. 법이 되면 한 발짝 떼 놓지 않고도 가만히 그 보살 응신들이 다 해결을 해요. 우리가 지금 한 발짝 떼어 놓지도 않고 이렇게 사는 겁니다. 본래 한 발짝 떼어 놓은 바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직결돼 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 줘야 되는데 한 발짝도 떼어 놓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별나게 사는 걸로만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벗어나기가 어려운 거예요.
우리가 찰나찰나 화해서 나투고 끝없이 돌아가는 이 진리를 파악한다면 우리가 할 거 다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한 것이 되죠. 내가 항상 말하죠. 여기 올라올 때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지고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진다고요. 우리 생활이 그런 생활이거든요. 그러니 그 발자국 떼어 놓는 동안에 어떠한 발자국을 떼어 놨다고 말하겠습니까? 어떤 발은 떼어 놓을 때 내가 했고 어떤 발은 떼어 놓을 때 내가 안 했습니까? 떼어 놓은 대로 없어지는 것을요.
찰나에도, 지금 내가 말을 하면서도 과거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기 이전에 미래도, 바로 미래와 과거 교차로에서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음을 먹어도 한마음을 먹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내 몸속에도 생명들이 많으니까 한 개체를 더불어 한마음으로 해야 되는 거죠.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할 일이고 진리를 파악해야 할 일이고 진리 속에서, 악과 선 그 가운데서 내가 악에는 어떡하고 선에는 어떡해야 하는지 그 도리를 말하는 거죠.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에서 용법으로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거죠. 즉 말하자면 ‘공법’이라고 해도 되고 ‘용무’라고 해도 됩니다. 그렇게 함이 없이 할 수 있는 도리가 있다면 어떠한 거든지 손색이 없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실천을 항상 해 보십시오. 자기가 실천해야지 아무리 부처님이 있고 일체제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실천을 해서 감응이 되고 감응이 되면 한생각 해 보시고 ‘아, 이렇게 가는 거로구나’ 하고, 또 상대를 만나보면 내가 차원이 얼마나 됐는지도 알게 됩니다.
나는 항상 묻는 대로 얘기를 안 하고 어떻게 그렇게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틀립니까?
질문자2(남) 고맙습니다.
큰스님 하하하. (대중 웃음) 부처님 앞에는 길고 짧은 것도 없고 어떤 거든지 다 맞는다고 했습니다. 맞죠? 맞지 않는 게 어딨습니까?
질문자3(남) 저도 앞의 발표자하고 같은 수험생이거든요. 어저께 저 친구를 비롯해서 많은 수험생들이 고3 법회를 했는데 거기서 법사 스님께서, 아까 발표자도 말했지만 “나를 버려라” 그 말씀을 스님이 해 주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지 법사 스님께서 말씀하셨을 때는 ‘그래, 정말 나는 없는 거다.’라고 진짜 느끼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또 ‘정말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법회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서 또 이제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들데요. 그래서 갑자기 자신감도 없어지고 어떻게 보면은 정말 믿지 못하고 나를 못 버리는 거에 대해서 화가 나기까지 하는데요.
큰스님 그래서 질문한 거예요?
질문자3(남) 어떻게 했으면 좋은가 해서요. (대중 웃음)
큰스님 그런데요, 아까 내가 얘기했죠.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고 또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진다고요. 그랬죠? 그것이 가만히 편안하게 다 버리고 있으란 말이 아니죠. 어떻게 들었어요? 연방 발이 고정되게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떼어 놓는 거죠. 그러니까 아까 얘기할 때 ‘나를 버려야 된다’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자불이 하는 거다’ 한다면 나를 완전히 버리는 거예요. 안 그래요? 간략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나를 버려라” 하는 것은 나를 버리고 중심, 즉 자불만 믿어라 이 소리거든요. 학생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없으면 몸은 송장이 되거든요. 내 몸이 없는데 어떻게 자불이 있겠나. 그러니 몸뚱이는 자동차와 같고 자불은 운전수와 같고 기름과 같거든. 그러니 차는 운전수를 믿어야지?
또 딴 걸로 비유한다면 저 나무들이 뿌리 없이 사는 거 봤나요? 본래 자불과 학생의 육신은 같이 집을 삼아서 있어. 저 봐. 나무도 뿌리와 싹과 같이 달려 있지? 본래 그렇게 돼 있다고. 그러니까 믿고 안 믿고가 없이 믿어야 돼. 학생을 리드해 나가고 학생의 보디가드가 돼 줄 수 있고 학생을 이끌어 줄 수 있고 해결해 줄 수 있고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바로 자기의 참기사니까. 그러니 시험을 보더라도 이거는 자불 주인공 당신만이 이거, 이런 과목은 이렇게 할 수 있고 저런 과목을 볼 때 저렇게 할 수 있고 또 뭐, 동그라미를 그린다든가 거길 찍어서 놓는다든가 이런 데도 다 거기서 그렇게 하면서 찍고 돌아가야 돼, 모르는 거는. (대중 웃음) 이 안에서 하게 만들어야 돼. 바깥에서 하면은 도저히 올팡갈팡이 돼서 잘못돼.
이런 소리를 들었어. 누가 방콕으로 처음에 갔는데 여기서 시험을 봐도 안 된다 그러기에 그리로 가라고 그랬어. 그랬더니 가서 아마 절정에 도달했던 모양이야. 자기가 말도 통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냥 아주 간절하게 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말의 뜻을 바깥으로 자꾸 마음에 내 주니까 그 뜻대로 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방콕에서 말을 얼른얼른 배웠다는 거지. 금방 배워서 거기 졸업을 하고 또 중국으로 갔어요. 중국에 가서도 그렇게 할 거야.
그러니까 이게 사람의 지혜로운 요량에 많이 달려 있어요. 그런데 부모들은 지금 이렇게 시급한 학생들을 놔두고도 그거 한마디 얘기 안 해 주는 부모들이 많아요. 그거 뭐, 돈이 드니 못 해, 재산이 없어지니 못 해, 글쎄. 자손들이 아무리 해도 말을 안 들으면 ‘너의 주인공과 나와 둘이 아닌 까닭에 다 너에게도 불이 켜질 것이다. 이거를 그저 배우고 또 앞으로는 점점 잘 알게 될 것이다.’ 하고 관해 줘야 정작 싫다고 하는 사람에게까지도 뜻이 가지. 그리고 따르는 사람한텐 연방 해 주고.
어떤 사람은 하도 자기 엄마 말을 안 들어서 밥 먹는 테이블에도 벽에도 붙여 놓고 변소 안에도 붙여 놓고 그랬더래요. 그랬더니 그저 그렇게 하는 거니까 한번 해 보자 했던 모양이지요. 그렇게 해 보고 가니까 살면서 아주 좋거든요. 그러니까 그 후에 엄마더러 그러더래요. “나는 처음에는 ‘어디 정말 되나 안 되나 보자’ 하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누가 해 주고 가져가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시시때때로 그렇게 대치를 하고 보호를 하고 그렇게 나가는 겁디다.” 하고 고맙다고 하더래요.
그랬다는 셈으로 우리가 아무리 싫다 그러더라도 마음으로 관해 주고 벽에 붙여 놓고 한번 해 본다면 그건 진저리 나게 하는 거는 아니니까, 그리고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요. 하여튼 모든 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마음먹기에 달린 건데 마음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분란이 일어나고 그러는 거지, 마음을 제대로만 먹는다면 분란이 날 것도 앞서 대처해서 없애 버릴 수 있거든요.
이런 공부는 절의 스님네들만 하고 있는데 전자에 부처님 당시에도 이 공부를 가르쳤고 지금도 가르치고 계시고 우리도 배우고 있고, 이렇게 하고 갑니다. 그런데 이거는 마음이라고 하면서 그냥 마음으로써 하도록 이끌어 주는 사람들이 없어서 걱정이죠. 우리가 지금 살면서, 한 생을 사는 동안에 세세생생을 얻을 수 있는 도리예요. 지금 교차로인 중세계에 한 철 살다가 우린 몸을 벗지 않으면 안 되게끔 돼 있거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왜 사람이 살다가 고에서 허덕거리면서 또 늙고 죽어야 하나.’ 이런 걸 생각해서 그 도리로 나섰는데 이미 그건 과거로부터 나서게끔 다 해 놨어요. 그렇게 돼서 여러분한테 가르치려니까 또 그 길을 걸어야 했더라 이겁니다. 여러분에게 보여줘서 가르치기 위한 방편으로써 번연히 아는 것도 그냥 그 길을 되걸었다 이 소리죠.
보이는 데서는 이 컵이 그대로 있지만 안 보이는 데서는 이 컵이 사람도 될 수 있고 또 군사도 될 수 있고 컵 속의 물이 바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컵이 온갖 천차만별로 화해서 쓸모있는 용도로 쓰이게 되는 것이 또 보현행이에요. 부처님은 그 능력을 배출할 뿐이지요. 그리고 법신은 법신대로 행을 하는 대로 내물리는 거죠. 물려서 행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생각을 했다 하면은 법신이고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보현신이란 얘기죠. 화신으로서 보현신으로서 응신이 되신다 이런 뜻이죠.
우리들이 부처님과 더불어 다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걸 알면서도 항상 위축돼서 ‘아유,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해. 이런 건 도저히 난 할 수 없어.’ 이렇게 하니까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는 거죠. 내가 할 수 없다는데 이 속의 생명들의 의식들도 할 수 없다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쵸? 내가 할 수 없다 하면은 이 생명들이 다 할 수 없고 또 이 생명들이 다 할 수 없다면 바로 일체제불에도 먹혀 들어가지 않아요. 통하지를 않는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서도 할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양면을 다 버리면서 흡수하고 흡수하면서 버리고, 이렇게 처음에는 항상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자불 불성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참나가 있는 줄 알아야 하고 그다음에 참나가 있으니까 그걸 믿고 여여한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여여한 줄 알았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걸 알아야 하고,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걸 알았다면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고 아무리 끝없이 해도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알아야 구경경지에 이른다 이런 소리입니다.
지금 이렇게 앉아 계신 분들을 볼 때 여자 남자로 모습이 다르게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가 만들어서 그렇게 나온 거지 누구가 만들어 준 게 아닙니다. 나는 왜 죄가 많아서 여자로 태어나서 이런가 하고, 어떤 남자들은 아이구, 죄가 많아서 이렇게 남자로 태어나서 들볶이고 이런다고 하죠. 그 모두 피장파장이에요. 피장파장인데요, 남자로 태어난 사람들은 가슴이 넓어야 한다, 마음이 넓어야 가슴도 넓어지고 한 가정을 안아서 전 세계를 안아 갈 수 있다 이런 뜻이죠. 그런데 여자보다 더 작은 남자가 있고 또 남자보다 더 큰 여자가 있는가 하면 아주 더 작은 여자도 많고 이러니 이건 중구난방이에요.
하여튼 이 한 철 살기에 뭐 그렇게 아둥바둥하게 살려고 애쓰는지 난 모르겠습니다. 그거 뭐가 딱 떨어져서 깨졌다 하더라도 “아이구, 이걸 깨뜨려서 어떡하우.” 한다면 “그거 뭐, 이 세상에 몸도 깨지고 죽고 하는데 뭐 걱정이야, 걱정하지 말어.” 이렇게 살면 아예 편안하잖아요.
우리가 이런 공부 한다고 그래서 닥칠 게 안 닥치는 게 아닙니다. 닥치는 거를 어떻게 능숙하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는 거죠. 그러니까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오늘 저녁거리가 없는데 어떻게 하오?” 이러고 할 때 “산 입에 거미줄 칠까. 다 살게 되겠지, 먹게 되겠지.” 하고 부지런히 나가서 찾아보면 그날 굶지 않아요.
옛날에 있었던 얘기예요. 지금은 거기에 신경을 좀 안 쓰지만 그때에 이 절이 저 안쪽 요사채만 있고 아주 가난했을 때죠. 그런데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의 자손이 뭘 훔치러 왔어요. 그래서 붙잡아서 물어보니까 그런 지경이에요. 그래서 쌀 한 가마 반인가 있는 거를 다 몽땅 줬어요, 식구가 여럿이고 살 수가 없으니까요. 주고선 사시 마지 때 사시 공양을 올릴 것도 없었어요. 그랬는데 말입니다, 올리기 전에 말이에요, 쌀 세 가마니가 들어옵디다. 그게 내가 한 겁니까? 부처님이 계시면 될 거고 부처님이 안 계시면 안 될 거고, 만사가 태평하죠, 뭐. 그렇게 생각 안 돼요? 하하하. ‘내 자불이 있으면 될 거고 없으면 안 되고 그럴 거니까 너만이 다 알아서 해라.’ 하고 맡기고 하세요, 뭐든지요.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7년 11월 16일 정기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